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 다닐 때의 일이다. 학교가 지명과 똑같은 '와세다'였는데, 신주쿠 가부키초(新宿区 歌舞伎町)까지 직선거리는 불과 4km 남짓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가려면 직행버스는 없고, 타카다노바바라는 곳까지 3km 걸어가서, 다시 야마노테센으로 환승 해야 했다. 버스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버스요금 150엔, 전철 120엔이면, 합계 270엔, 또 환승을 해야 하니 시간은 몇 배나 더 걸린다. 그래도 책방으로 유명한 기노쿠니야 서점(紀伊國屋書店)이나 각종 백화점, 유흥시설 등이 온통 가부키초에 밀집한 관계로 친구들과 함께 자주 찾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불편하니, 택시를 자주 탔다. 당시 기본요금이 우리나라 돈으로 1500원 정도 했는데, 4명이서 타면 신주쿠까지 6000원 정도니, 대중교통보다 택시가 더 싼 셈이었다. 지난 8일 오전, 필자는 용정산단 포애뜰 앞에서 택시를 타고 포천시청까지 이동했다. 거리는 불과 2.3km로 기본요금 정도의 거리였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취재시간에 맞춰 이동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가끔은 택시를 타야 하기도 한다. 포천시는 올해 1월 1일부터 택시 콜 호출 시, 콜
▲필자 석인호 작가. 날씨 풀리자 까치들의 합창소리 요란해 동네 공원에서 까치들이 일제히 날며 요란하게 울어댄다. 더러는 둥지를 떠나 다른 나뭇가지에서 울고 어떤 녀석은 땅바닥까지 내려와 논다. 추운 겨우내 한 마리도 안 보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까치들이다. 여러 놈들이 함께 날거나 시끄럽게 울어대 아침의 고요함을 깨뜨린다. 그들이 우는 건지 웃는 건지는 모르겠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날씨가 불과 며칠 새 영상으로 변했다. 급기야 오늘 아침의 최저기온은 영상 4도까지 올랐다. 갑자기 봄을 향해 한 달가량 건너뛴 듯하다. 나도 털모자와 장갑을 집에 두고 얇은 차림으로 아침 운동에 나섰다. 자주 가서 걷고 달리던 동네공원은 수목이 울창하다. 그중 공원의 외곽을 따라 늘어선 메타세쿼이아들이 일품이다. 위로 높고 곧게 자라 바로 옆 20층 아파트들과 키재기를 할 정도다. 공원 트랙에 표시된 숫자를 보면 한 바퀴 거리는 대략 1,150m쯤 될 것 같다. 오늘 아침 공원에 나가니 평소엔 못 들었던 까치 소리가 요란했다. 한 주의 첫날 아침에 듣는 까치 소리에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예부터 아침에 까치 소리 들으면 반가운 손님이나 소식이 온다고 했으니까.
▲필자 임후남 작가. 가만히 있으라. 이 말은 상당히 폭력적이다.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하는 말에는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차단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무시와 억압과 소외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른 결과는 상처와 비극을 초래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꽃 같은 아이들이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폭력을 우리는 목도하지 않았나. 올해 시부모님은 구순이 됐다. 큰 병이 없으니 건강하다고 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어 몇 달 만에 만나면 확연히 그 모습이 다르다. 두 분 모두 저 나이가 되기 훨씬 전에는 우리 집에 오시면 살림을 도맡았다. 매월 마감을 하느라 며칠씩 야근을 하는 며느리를 대신해 함께 아이를 돌보며 어머니는 주방을 책임졌고, 아버님은 청소 등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았다. 아침에 나가 밤에 들어오니 주방에 들어갈 일도 없었지만, 어머니가 오시면 나는 거의 주방에 가지 않았다. 아이가 학교 간 사이 두 분은 가까운 백화점도 가고, 남대문시장도 가곤 했다. 지방에 사는 두 분의 정기적인 서울 나들이는 근 10년 남짓 이어졌다. 아이가 크고, 내가 더는 마감 없는 인생을 살게 되자 두 분의 정기적인 서울 나들이도 끝났다. 대신 명절이나 그 외 나의 출
같은 꽃과 풀도 볼 때마다 달라 코로나19 대유행에도 내게는 남다른 즐거움이 하나 있다. 더군다나 그 즐거움엔 건강도 뒤따른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 아닌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물론 큰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쓰는 말이라 이 비유가 적당하지 않음은 안다. 그래도 나는 코로나가 몰고 온 크나큰 어려움을 탈출하는 심정으로 나만의 그 즐거움을 좇는다. 한동안 따스하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옷깃을 세우고 아침 운동을 나섰다. 햇살이 채 퍼지지 않은 이른 시각이라 차갑게 보이는 새파란 하늘엔 흰 구름 한 조각이 외롭게 떠 있다. 그야말로 찬바람에 밀려 곧 흔적 없이 사라질 뜬구름이다. 12월 중순 아침의 뜬구름을 보니 공연히 마음이 허전해진다. 올 한해는 물론이고 지나 온 날들에도 뜬구름처럼 살아 온 내 삶에 대한 회환 때문이리라. 앞으로 올 날들도 또 그렇게 흘려보낼까 걱정이 앞선다. 그런 생각에 잠겨 걷는 동산 길에 뜻밖의 예쁜 임들이 추위를 잊은 채 나를 반겨준다. 서리까지 내린 쌀쌀한 초겨울 추위를 아랑곳 하지 않고 무리 지어 피어난 꽃들이다. 우리 동네에는 야트막한 동산들이 연이어 있다. 그중
필자 안훈. 존재감. 무릇 사람은 누구나 존재감으로 살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무얼 하는 사람인가. 인간의 역사는 엄밀히 말하면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역사를 만들어온 수 없는 걸출한 인물들도 밝히고 보면 결국 그 자신의 존재감으로부터 그 모든 것들을 이루어냈고 그것이 하나의 실록으로 인류의 대역사를 만들어 온 것 아닌가. 아들에게는 딸이 둘이 있다. 올해 9세, 6세 된 어여쁜 아이들이다. 늦게 결혼하여 3년 터울 딸을 둘 두었으니 아들의 기꺼움이야 하늘 높은 줄 모른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큰손녀에 대한 사랑이 막강하다 보니 둘째가 태어났을 때 큰손녀 아이가 혹여라도 사랑이 나뉘는 것 때문에 상처를 받을까 걱정돼 그 애 앞에서 작은애를 예뻐라 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다. 그런데 그 작은애가 두 살 되면서부터 설 때만 잠깐씩 와서 보는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무시로 자신의 존재감을 똑 부러지게 인식시키는 것 아닌가. '나도 있다', 혹은 '나 있다'라는 식의 무언의 행동들을 보면서 우리 내외는 열심히 그 아이의 존재감을 은밀하게 인정해주곤 했다. 결혼하면서부터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30년이다. 그 30년의 가족 관계가 아무리
어느 날 해가 저물 무렵 귀로(歸路)에서 우연히 문득 손을 펴 보니 손안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눈에 띄는 보석도, 대단한 재물도, 화려한 명예도... 아니 소박한 꽃 한 송이, 보잘것없는 나막신 하나도 제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마냥 허탈한 빈손, 허허로운 가슴, 시린 적막감이 묻어 있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것도 부끄러웠지만 하나하나 떠오르는 지난 시간들, 지난 일들이 나를 더욱더 부끄럽게 했습니다. 나름으로는 열심히 애를 쓰며 최선을 다한다 했지만 이룬 것은 진실로 미미했습니다. 고작 나 한 몸, 내 가족 건사하기에도 헉헉거린 시간들... 그러노라고 아주 가까운 나의 친구의 아픔도 제대로 껴안아 주지 못했고, 이혼의 상처를 안고 신음하는 내 아우의 슬픔도 달래주지 못했습니다. 삶이 너무 고달파 손 내밀던 가까운 이웃에도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과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후배의 깊은 고민에도 마음만큼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노년을 혼자 보내신 친정어머니, 시어머님의 고적함에 아무런 위로를 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의례적인 일상이 아닌, 진심에서 나누는 따듯한 대화,
예컨대 나는 모든 이름의 바람을 사랑한다. 한겨울 머리 위에서 잉잉 울어대는 바람, 어두운 들녘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바림, 바람 떼―. 늦가을 제주에서 만난 호곡(號哭) 같은 바람, 겨울의 문턱에서 마른 갈대숲을 울리던 을숙도의 바람, 바람은 어쩌면 나의 고향인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나의 고향, 잃어버린 나의 언어, 잃어버린 나의 시간. 나는 봄 몸살 같은 3월의 바람을 사랑한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지각(地殼)이 미처 눈을 비비며 깨어나기도 전에 보리밭 이랑에서 성급하게 피어나는 바람, 그 바람은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오한처럼 떨게 한다. 어느 때는 수줍고 어느 때는 미소 같고 어느 때는 마냥 속살을 간질이는 봄 몸살 같은 바람. 그래, 봄 몸살이다. 바위처럼 꿈적 않는 미욱한 사내를 어여쁜 교태로 흔들어 깨우는 몸살 같은 바람, 열여섯 살 소녀의 새빠진 웃음처럼 캬들캬들한 바람, 마디마디 움츠러든 겨울나무 가지에 새움을 눈 티우는 신비의 바람, 늪처럼 가라앉은 어둡고 긴 우리들의 침묵을 일으켜 세우는 바람. 그것은 3월의 바람이다. 여울물처럼 맑은 3월의 바람이다. 눈을 들어 사위를 둘러보라. 마침내 봄은 당도하느니 지난겨울의 시린 애환을 어찌 털
필자 석인호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1974년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TBC 방송기자, 중앙일보 싱가포르 특파원,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장 등을 거쳤다. 국정홍보처 국정브리핑팀 위원과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2014년 '좋은수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하얀 소금꽃 대신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물결 하얀 소금으로 뒤덮였을 염전이었지만 지금은 꽃밭이다. 눈이 모자랄 만큼 넓게 펼쳐진 벌판이 온통 분홍과 노랑, 붉은 색깔의 물결이 치고 있었다. 서해 바다가 가까운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시흥갯골생태공원의 초가을 풍경이다. 쾌청한 가을날 따갑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 갯벌엔 꽃들과 각종 이름 모를 풀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코스모스의 분홍 물결, 해를 향한 해바라기들의 노랑 군무, 군락을 이룬 채 동그스름한 자태를 뽐내는 댑싸리들의 분홍빛 머금은 연두색 대열이 장관이었다. 늦가을엔 붉은색으로 물드는 댑싸리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대열을 이루어 광장에서 집단체조 하듯 펼쳐져 있다. 먼 남쪽에서 북상 중인 태풍 영향인지 바람은 시원했고 하늘은 쾌청했던 9월 15일 이 공원을 찾았다. 안내표지판은 이곳이 1934년부터 2년에 걸쳐 조성된 염전이었다
나는 책방을 차리고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책방을 차리길 백만 번 잘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책방 주인들이 아마 나와 같을 것이다. 이유는 큰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책방 하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은 바로 ‘책’과 ‘사람’에서 나오는데, 그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아주 은밀한 것이다. 이 즐거움을 책방을 찾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오래 누릴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텅 빈 책방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대뜸 책방 사용에 대해 문의했다. 그 질문은 책방을 최소한 한 곳 이상 다녀온 사람이나 가능한 것. “큰 책장에 꽂힌 책은 그냥 보셔도 되고, 그 외 진열된 책들은 새 책이므로 구입해서 보시면 됩니다. 책이 낡아지면 판매를 할 수 없어서요.” 우리는 카페를 겸하고 있어 음료도 판매한다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그는 혹시나 몰라 먹을 걸 싸 왔다고 했다. 아마도 시골책방이라 하니 먹을 것이 마땅찮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차 한 잔을 시키고 책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가끔 책 사진을 한 장씩 찍었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럴 수 있지 싶어 가만있다 찰칵찰칵 소리가 계속 나서 망설이다 결국 다가가 말했다. “저, 죄송하지만 책방 분위기
필자 석인호. 그때였다. 조금 안쪽에 타고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나는 바쁘지 않으니 내렸다가 다음번에 타야겠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할머니에게 쏠렸다. 키는 작았지만 단정한 차림새에다 가볍게 웨이브 진 흰 머리카락이 뭔가 모를 기품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문 쪽의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비집고 내리셨다. 그 사이 그 아가씨와 문 쪽에 섰던 청년 둘이 잠깐 내렸다가 냉큼 다시 올라탔다. 나는 속으로 ‘뭐 이런 맹랑한 애들이 다 있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승강기는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며칠 전 지하철 5호선 신금호역에서 정말 예의를 모르는 젊은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의 얼굴 가죽 두께는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경우 없음에 놀랐다. 아무리 급하게 열차를 타야 할 상황이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그 여자를 보니 6년 전 10월 어느 날 똑같은 일을 겪고 다른 매체에 기고한 글이 생각났다. 그 때에 썼던 글을 전재해 며칠 전의 심정을 밝히고 싶다. 다음 글의 상황과 며칠 전의 상황이 똑같이 닮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지하철을 탈 때 나는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