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라는 말

임후남 작가는 2018년 도시 생활을 접고 경기도 용인으로 이주, 시골책방을 차렸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시집 <전화번호를 세탁소에 맡기다>, <내 몸에 길 하나 생긴 후>, 산문집 <나는 이제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시골책방입니다>, <아들과 클래식을 듣다>, <아이와 여행하다 놀다 공부하다> 등 다수가 있다. 현재 출판사 생각을담는집과 함께하는 시골책방 생각을담는집을 운영하고 있다.

▲필자 임후남 작가.

 

 

가만히 있으라. 이 말은 상당히 폭력적이다.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하는 말에는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차단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무시와 억압과 소외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른 결과는 상처와 비극을 초래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꽃 같은 아이들이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폭력을 우리는 목도하지 않았나.

 

올해 시부모님은 구순이 됐다. 큰 병이 없으니 건강하다고 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어 몇 달 만에 만나면 확연히 그 모습이 다르다.

 

두 분 모두 저 나이가 되기 훨씬 전에는 우리 집에 오시면 살림을 도맡았다. 매월 마감을 하느라 며칠씩 야근을 하는 며느리를 대신해 함께 아이를 돌보며 어머니는 주방을 책임졌고, 아버님은 청소 등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았다.

 

아침에 나가 밤에 들어오니 주방에 들어갈 일도 없었지만, 어머니가 오시면 나는 거의 주방에 가지 않았다. 아이가 학교 간 사이 두 분은 가까운 백화점도 가고, 남대문시장도 가곤 했다. 지방에 사는 두 분의 정기적인 서울 나들이는 근 10년 남짓 이어졌다.

 

아이가 크고, 내가 더는 마감 없는 인생을 살게 되자 두 분의 정기적인 서울 나들이도 끝났다. 대신 명절이나 그 외 나의 출장 등이 있을 때 올라오셔서 짧게는 사나흘, 길게는 일주일 정도 묵으셨다. 그때도 나는 어머니에게 주방을, 아버님에게는 집안의 소소한 일들을 맡겼다.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은 언제나 밥 한 그릇 뚝딱하게 했고, 아버님은 꼼꼼하게 이런저런 집안일을 챙겨주셨다. 사실 나는 어머님보다 아버님께 더 많은 일을 '시켰다'. 그런 나를 보고 친정엄마는 시아버지를 종그래기 부리듯 한다며 나무랐지만, 아버님은 단 한 번도 내가 요청한 일에 대해 '노'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나는 두 분께 일을 배웠다.

 

어쩌다 지금의 시골로 들어와 살게 된 후 두 분은 일 년에 두세 번 오신다. 더 돌볼 손주도 없고, 어느새 퇴직한 남편은 이제 아버님보다 더 많은 집 안팎의 일을 하지만, 여전히 두 분이 오시면 나는 이런저런 일을 또 ‘시킨다’. 화분에 물을 좀 주시라, 마늘 좀 까달라, 풀 좀 뽑아달라 한없다.

 

 

점점 더 연로해진 두 분의 일은 더디기 짝이 없다. 사실 나나 남편이 하면 후딱 해치울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일거리를 드린다. 주체적으로 하실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당신네 집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그분들에겐 가만히 계시라는 말보다 소일거리가, 그래서 자식을 돕는 일이 더 즐겁다는 것을 나는 안다.

 

가만히 있으라. 이 말은 상당히 폭력적이다.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하는 말에는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차단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무시와 억압과 소외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른 결과는 상처와 비극을 초래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꽃 같은 아이들이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폭력을 우리는 목도하지 않았나.

 

지난 설 때 저녁을 먹고 나서 두 분께 일거리를 드렸다. 손맛 좋던 어머니 기억도 되살릴 겸 어머니 지휘 아래 남편이 통삼겹살을 썰고 어머니가 파를 썰면, 아버님이 꼬치를 꿰는 일이었다. 구순 부모와 머리 허연 아들이 고기가 두껍다, 파를 옆으로 누워서 꿰라, 이렇게 해야 모양이 더 좋다 야단법석이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며 가끔 훈수만 뒀다. 그러느라 밤이 훌쩍 깊어졌다. 텔레비전 앞에서 꾸벅꾸벅 졸다 깨다 했을 두 분의 시간이 간만에 가득 찼다.

 

뛰는 아이에게 가만있으라고 하면 울음보를 터뜨린다. 평생 몸을 쓰며 살아온 노인에게 편하게 지내라며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아마 그분들은 속으로 그렇게 말할 것이다. 너도 늙어봐라. 사지 멀쩡한데 손 놓고 가만있고 싶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