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에 대하여

언론인 안훈은 TBC PD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뎠다. 동아일보 기자, DBS 라디오 방송작가, MBC 라디오 방송작가를 거쳤고, 1983년 이후에는 여성지 프리랜서 기자로 좋은 글을 많이 썼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시그나 사회공헌재단에서 취재위원으로 봉사했다.

 

어느 날 해가 저물 무렵 귀로(歸路)에서 우연히 문득 손을 펴 보니 손안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눈에 띄는 보석도, 대단한 재물도, 화려한 명예도... 아니 소박한 꽃 한 송이, 보잘것없는 나막신 하나도 제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마냥 허탈한 빈손, 허허로운 가슴, 시린 적막감이 묻어 있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것도 부끄러웠지만 하나하나 떠오르는 지난 시간들, 지난 일들이 나를 더욱더 부끄럽게 했습니다. 나름으로는 열심히 애를 쓰며 최선을 다한다 했지만 이룬 것은 진실로 미미했습니다. 고작 나 한 몸, 내 가족 건사하기에도 헉헉거린 시간들...

 

그러노라고 아주 가까운 나의 친구의 아픔도 제대로 껴안아 주지 못했고, 이혼의 상처를 안고 신음하는 내 아우의 슬픔도 달래주지 못했습니다. 삶이 너무 고달파 손 내밀던 가까운 이웃에도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과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후배의 깊은 고민에도 마음만큼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노년을 혼자 보내신 친정어머니, 시어머님의 고적함에 아무런 위로를 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의례적인 일상이 아닌, 진심에서 나누는 따듯한 대화, 다정한 눈빛, 속 깊은 애정의 표현, 그리고 껴안음(hug)...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련만 살갑지 못한 성격 때문에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지난 일들이 뒤늦게 눈물겹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이렇게 미망(迷妄)에 가득 차 있고 때늦은 회오, 안타까운 회한으로 가슴 저린 것은 아닐는지요. 하노라고 했다 해도 부족한 듯싶고 늘 미련은 남는가 싶습니다.

이런 것들이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너무 젊었던 탓인가, 별스럽지 않은 작은 일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워 친구를 곤혹스럽게 했던 일이며, 지나친 자만심으로 나도 모르게 상대편에 상처를 주었던 일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또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차 없는 독설(毒舌)로 주위를 긴장시키고, 고집스러운 독선으로 가족들을 불편하게 했던 일들도 가슴에 걸리어 있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서도 서툴고, 우정을 기리는 일에서도 미숙하며, 가사를 돌보는 일에서도 매양 부족하여 안타까웠습니다. 나라에 큰일이 벌어져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괴롭고, 이 나라에서 일어난 수많은 시위(demonstration)에 한번도  동참하지 못했던 것도 부끄럽습니다.

 

 

나는 부끄럽습니다.

내가 지난 시간 속에서 잘못했던 것만큼 그만한 질량의 무게로 나는 부끄럽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순(耳順)의 나이도 넘기었습니다. 지난 시간들 가운데 있었던 부끄러움을 남은 시간 안에서는 깨끗이 불식(拂拭)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