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목동까지 걸었을 때는 사직터널을 지나 영천시장을 지나고, 연남동과 서교동을 거쳐 양화대교, 선유도공원, 한강 둔치 등으로 길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런 길을 걸을 때는 대로를 따라 걷지 않았다. 골목을 따라 고불고불, 길을 이어나갔으며 어슬렁댔다. 그저 걸으며 어슬렁대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었다. “만약 코로나가 끝나고 아이와 여행을 가신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제주올레요.” 얼마 전, 비대면 강의를 했을 때 나온 질문과 답이었다. 이미 시골에 정착한 나와 청년이 된 아들이 제주올레를 다시 걸을 일이 있을까 싶지만, 툭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그러나 만약 아이가 어리고 여행을 떠난다면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제주올레를 택할 것이다. 그날의 강의 내용은 내가 쓴 책 <아이와 여행하다 놀다 공부하다>였다. 이 책은 한 신문에 ‘교과서여행’이란 칼럼으로 2년 넘도록 연재한 것을 추려서 낸 책이다. 책 제목과 칼럼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듯, 이 책은 아이와 함께 여행할 때 교과와 관계된 곳을 한 번쯤 가보라고 권하는 일종의 여행 정보서다. 주로 초등 사회와 국어 교과와 연계된 곳들이 대부분이다. 책을 낸 입장에서 이 책을 적극적으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맘때면 어김없이 그 첫 종소리를 울리는 구세군 자선냄비(Christams Kettles)는 1891년 성탄이 가까워져 올 무렵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래한다. 굶주림에 허덕여 슬픈 성탄을 맞이해야만 했던 도시 빈민들을 돕기 위해 구세군(Salvation Army) 사관 한 분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이 국솥을 계속 끓게 합시다(Let's keep this soup pot boiling)" 그는 사람들이 붐비는 부두로 나아가 주방에서 사용하는 큰 쇠솥을 내 걸고 그 위에 이렇게 써 붙였다. 옛날 영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누군가가 사용했던 방법이란다. 솥에는 동전과 지폐가 가득 차 얼마 지나지 않아 성탄절에 불우한 이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할 만큼 충분한 기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웃을 돕기 위해 고민하며 기도하던 한 사관의 따뜻한 마음이 오늘날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매년 성탄이 가까워질 때면 내 거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정신은 모든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타고 우리 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더불어 잘 사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28년 12월 15
미국의 글로벌 패션 브랜드 ‘갭(Gap)’은 맨 처음 ‘팬츠 앤 디스코(The Pants and Discos)’라는 이름이 붙을 뻔했다. 창립자 도널드 피셔(Donald Fisher)가 1969년 샌프란시스코에 청바지 전문매장 '더 갭(The Gap)'을 열 때 '4톤의 리바이스(4 tons of Levi’s)'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색상과 치수의 리바이스 제품을 쌓아놓고 갭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창업 초기부터 청바지의 주 구매층인 12세에서 25세까지를 타깃으로 삼았다. 그래서 결국 ‘세대 차이(The Generation Gap)’라는 의미를 담아 ‘갭’으로 이름을 정했다. 갭은 흰 바탕에 상호명인 ‘The Gap’이라고 쓴 로고를 썼다. 그러다가 1988년엔 파란색 정사각형에 'GAP'이라는 브랜드명이 흰색으로 쓰인 로고가 탄생했고, 현재까지 이 로고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각자 몸에 딱 맞는 치수의 청바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양한 치수를 갖춘 갭을 찾게 되어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로 자리 잡은 비결이 아닐까. 갭(Gap)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과 사람, 일반적인 현상과 현상 사이에 존재하는 의견 등의 차이를 일
비로소 내가 이곳에서 좋다, 좋다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람과 꽃에 환호하고,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와서 좋아하고, 날이 흐린 날은 흐려서 좋아하는 이유는 내 안이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며칠간 나는 이 자유의 세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2년 전쯤, 한 친구가 아들 명의로 아파트를 샀다고 말했다. 그 아들은 그때 스물한 살이었다. 그러면서 더 늦기 전에 내게도 아들 명의로 아파트를 사두라고 했다. 전세를 끼고 사면 돈이 얼마 없어도 된다고 했다. 1년 전쯤, 친구가 아파트를 한 채 사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이혼을 꿈꾸던 친구라서 혹시, 했다. “아냐, 그냥 한 채 사둘까 하고.” 돈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가 말했다. “전세 끼고 사면 돼.” 1가구 2주택이 되는데 괜찮냐고 나는 물었고, 그 친구는 금세 다시 팔면 된다고 했다. 2년 전쯤이면 나는 이곳 시골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때였다. 1년 전쯤이면 나는 시골책방에서 작가와의 만남이며 음악회 등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그 말들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전국의 아파트가 연일 뉴스가 되고 부동산 정책이 계속 발표되고 있는 요즘, 책방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강남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최근 보도에 따르면 주부의 절반 이상이 “올해는 직접 김장할 계획이 없다”는 식품업체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56.2%는 '김장 안 한다'고 답했고, '김장한다'는 응답자는 43.8%였다. 김장 안 한다는 응답이 지난해보다 1.3%포인트 높아진 것이다. 김장이 번거롭다거나 아예 할 줄을 몰라 두 배쯤 비싼 값을 지불하고 절인 배추를 배달시켜 버무려 먹는 집도 늘고 있다. “김장하셨나요?” 해마다 이맘때면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인사다. 꼭 김장하고 안 하고를 묻는다기보다 일종의 계절 덕담이라고나 할까. 김장하고 연탄 들여놓으면 ‘월동준비 끝’이었던 게 우리네 겨우살이였다. 김장의 기본 메뉴인 김치는 무, 배추, 갓, 열무 등 다양한 채소를 소금에 절인 후 고추와 파, 마늘, 생강, 젓갈 등의 양념을 섞어 저온에서 발효시켜 먹는 음식이다. 채소는 예로부터 보존이 어려운 식품 중 하나였다. 말리면 영양가가 줄어들고 맛도 없어져 먹기에 불편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채소를 소금에 절여 놓으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게다가 소금 외에도 취향에 따라 갖가지 향신료를 함께 섞어 새로운 맛과 향을 내기도 한다. 소금물에 절이고 발
"그래, 그대들이 아직 있어 주는 것이 나는 고맙고 고맙다". 이 생각이 가슴 벅차게 차오르면서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지인에게 고맙고 고맙다는 생각을 잠깐 사이 뜨겁게 하고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 어때? 점심이나 같이할까?” 오늘 아침 댓바람에 친구 두 명에게 전화해서 느닷없는 콜을 했다. 아니 댓바람도 아니다. 전화를 한 것은 느닷없지만 점심을 같이하고 싶다는 생각이야 꽤 되었고 이차저차 시간을 비집어 한 것일 뿐이다. 동창이다. 특별히 가깝다기보다 비슷한 취향, 비슷한 식성이 공통한데 내가 얼마 전 선배로부터 대접받았던 음식(일식)이 맘에 들어 그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문득 전화를 끊고 나니 왠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 그지없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대들이 아직 있어 주는 것이 나는 고맙고 고맙다". 이 생각이 가슴 벅차게 차오르면서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지인에게 고맙고 고맙다는 생각을 잠깐 사이 뜨겁게 하고 있었다. 60년대 중반쯤의 얘기인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유학 간다는 것은 웬만큼 해선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그 친구는 미국으로 유학을
그런 아름다운 오해를 받을 일이 이제는 다시 안 생길 것 같아 서글퍼진다. 그래서 그런지 대전 시절의 그 일이 더욱 새롭게 떠오른다. 그 시절 함께 손잡고 걸었던 그 동갑내기 누나도 이젠 며느리를 둘이나 맞은 70살 할머니가 됐으니. 혈기 방자했던 20대 후반 어느 날의 기억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아무런 동기도 없었는데 갑자기 그 일이 왜 생각이 나는지는 모르겠다. 이럴 땐 그저 ‘사노라면 가끔 그런 생각도 날 수 있다’는 말에 책임을 돌릴 수밖에. 그날은 일요일 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젊고 아름다웠던 날의 이야기 같아 혼자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내게 그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 시절 나는 선배 세 분과 함께 대전에서 근무 중이었다. 당시 총각이었던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며 일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잘 놀았다. 지방 근무는 층층시하인 본사와 달라 유형무형의 각종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그곳이 고향인 사무실의 선배들과 달리 나는 객지여서 하숙을 했다. 나는 객지 생활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본사와 달리 비교적 일거리가 적어 퇴근 후 선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중략>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겠습니다. 시인 나태주 님의 <11월>에 유난히도 짧았던 10월 한 달을 보내고 11월을 맞는 감회가 진하게 묻어난다. 가뜩이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가슴 졸이며 살아온 한해도 이제 기억의 뒤안길로 멀어져간다. 11월은 기다리기도 전에 벌써 코앞에 다가와 버린 것이다. 달력을 뜻하는 영어 캘린더(Calender)는 라틴어 칼렌다리움(Calendarium)에서 따온 것으로 ‘회계 장부’라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네 달력에도 오만가지 메모를 채워가며 1년 열두 달을 보낸다. 달력에 나오는 11월(November)은 원래 아홉 번째 달이고, 섣달인 12월(December)은 열 번째 달이었다. 11월(November)은 라틴어 ‘노벰(Novem)’에서 유래한 것. 9라는 숫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9월이 아닌가? 구태양력에 따르면 지금의 9월(September)은 일곱 번째 달이었고, 10월(October)은 여덟 번째 달이어서 1년은 10개월이었다. 그러던 것이 훗날 7월에 태어난
전 친구가 없어요. 그녀는 혼자 왔다. 얼굴은 오십 안팎으로 보였지만, 요즘은 나이를 맞추기가 힘들다. 그녀는 커피 한 잔을 시켜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일어나 책들 앞에서 서성댔다. 그러다 이제 그만 돌아가는가 싶었던 찰나, 문득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친구가 없어요, 라고. “친구가 없어요. ……. 물론 친구야 있지요.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어요.” 친구가 없다, 는 말에 나는 그만 그녀의 눈에 내 눈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도 친구가 없어요.” 그녀가 돌아간 지 하루가 지나도록 나는 그 말에 맴돌고 있었다. 나의 친구들은 어디에 있나. 나는 누구의 친구인가. 나라고 왜 친구가 없을까. 얼굴들이 떠올랐다. 가장 오랫동안 만났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주 어릴 때 만난 친구부터 사회에서 만난 친구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했다. 그들을 만났을 때 나의 눈빛과 그들의 눈빛을 생각했다. 모두 좋은 사람들. 그러나 오래 만났다고 과연 ‘친한 사이’일까. 은희경의 소설 <빛의 과거>는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무려
코로나와 함께 온 ‘언택트 시대’의 당면 문제는 고령층의 소외감과 일자리이다. 첨단 기술이 보편화하면서 여기에 익숙한 젊은 세대와 달리 고령층은 어쩔 수 없이 밀려난다. 부분적으로 기술이 인력을 대체하는 건 바람직하다. 그러나 기업은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는 반면, 일자리가 하나둘 사라지면 근로자들은 먹고살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70년대 중반, 필자가 신문제작시스템 전산화과정(CTS · 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연수를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가장 첨단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던 닛케이(日本經濟) 신문의 편집국과 제작국에 상주하다시피 했는데, 그때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매우 번거롭고 비능률적임에도 낡은 구식시설(HTS · 활판)의 일부는 옛날 그대로 운영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첨단시설로 바꿀 수 있는 기술과 시스템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30% 정도의 나이 든 직원은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컴퓨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그냥 납(鉛) 활자 위주의 시설을 그대로 쓴다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에겐 고용의 문제가 최우선이었다. 코로나와 함께 온 ‘언택트 시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