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내 곁을 떠났다. 그때부터 내 안에 든 생각이 있다. 모름지기 나와 인연이 된 모든 이들이 적어도 떠난다는 기미(幾微)만이라도 느낄 수 있는 시간, 이별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은. 나는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을 가지 않는다. 개인 병원이든 종합병원이든 병원에 들어서면, 언제나 온갖 만감이 교차하여 몸과 마음을 어지럽혀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져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친구들 가운데는 유난히 병원 출입이 잦은 친구가 있는데, 나의 이런 병원 기피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빈축을 하는 일이 만만찮게 있다. 10년 전쯤인가, 내가 매우 위태로운 상태(심장 압박)였는데도 병원을 가지 않는 것에 혀를 차던 나의 친구가 그가 다니던 병원에 예약(심혈관 내과)해놓고 갑자기 나를 불러 진료를 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의 의사가 나를 보고 너무 위험하여 당장에 심혈관 시술을 해야 한다 했는데, 그날이 금요일 오후 병원이 끝날 무렵이어서 월요일 오전 입원해 시술 일정을 잡아 스텐트 시술을 한 일이 있다. 그때 한꺼번에 3개를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X-ray 사진을
현대 의학의 많은 의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고혈압이라는 증세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혈압이란 병이 아니고 생체의 자기치료법이다. 피가 맑고 혈관이 깨끗하여 탄력성이 있으면 혈압을 높일 필요가 없을 텐데, 피가 탁해지고 혈관 통로가 좁아지면 어쩔 수 없이 심장과 혈관은 피를 전신에 흐르게 하기 위해 혈압을 높이는 자기치료법을 써야만 한다 현대 서양의학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증세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사나 열, 통증 같은 증세들을 병이라고 생각하니까 이 증세를 없애는 것을 치료라고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설사에는 지사제를, 열이 나면 해열제를, 통증에는 진통제를 쓰는 것과 같은 처치를 당연한 치료법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지만 증세라는 것이 참으로 무엇인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부패한 음식을 먹게 되면 복통이나 구역질, 설사 같은 증세가 나타난다. 설사란 부패한 음식이 위장관으로 들어오면 세균이나 독성으로 우리 몸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그런 부패한 음식물을 빨리 몸 밖으로 배출시켜 우리 몸을 보호하려고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치료법인 것이다. 대부분의 증세란 스스로를 치료하고 있는 과정이므로 그것을 바로 알고 그 증
추위를 견디지 못해 서로 몸을 기대 온기를 나누려 한 고슴도치는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그렇다고 떨어져 있으면 추워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떨어질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을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고 이름 붙였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달라붙어 한 덩어리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의 가시가 동료들을 서로 찌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너무나 아파 곧 흩어지지만,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다시 모여든다. 가시가 서로를 찌르면 금방 흩어졌다가 또 모이고 흩어지고를 반복하다 마침내 그들은 상대방의 가시에 찔리지 않을 적당한 거리를 알아낸 것이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서로 몸을 기대 온기를 나누려 한 고슴도치는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그렇다고 떨어져 있으면 추워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떨어질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을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고 이름 붙였다. 고슴도치들은 결국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최적의 거리(Optimum distance)’를 찾아낸 것이다. 이 과정에
5년 전 내 딸의 결혼식 때 나는 친구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그는 그날 식장에서 반갑게 인사하며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그후 두어 차례 안부 전화가 오갔고, 다른 사람의 길흉사 자리에서 만나곤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의 길흉사엔 성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일일이 부고를 하기가 어려운 흉사와는 달리 결혼식은 꼭 청첩장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청첩장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 그날이 언제인데?” “다음 주일이니 열흘 남았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일종의 서운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에게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중요한 일에 초대할 대상도 안 되는 ‘그저 그렇고 그럴 뿐인 사람’이었단 말인가? 갑자기 오래전 젊었던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그 스쳐 가는 일들 속에 나는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 그때의 나와 오늘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은근히 화가 치민다. 며칠 전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남자들끼리의 모임이었으니 당연히 술잔들이 오갔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날 정말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아
아버지의 서거(逝去)로 내가 받은 충격은 무슨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때의 일기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막힌다. 어찌해서 그다음 날도 해가 뜨는지, 어찌해서 세상이 그대로 존재하는지, 납득할 수 없기에 내 가슴은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아버지의 급서(急逝) 비보를 접한 것은 대학 2학년을 막 올라와서였다. 3교시 수업을 하던 중 학생과로 연락이 왔는데 급히 달려가 전화를 받았더니, 사환 학생(아버지가 고교 공부를 시키던)이 울먹이면서 아버지의 부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아서 벌컥 장난하지 말라고 화를 냈더니 그 아이가 엉엉 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아침에, 나의 등교와 거의 같은 시간에 아버지는 병원(당시는 아버지 병원이 종로5가에 있었음)으로 가셨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병원에는 간호사도 있었고 급할 때 쓰는 구급약도 있었는데 이것이 말이 되는가. 내가 알기로는 아드레날린(당시 일반 병원에는 주어지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의사협회 총무였기 때문에 우리 병원에는 이 약이 구
하늘이 파랗다. 너무 맑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40일이 넘는 긴 장마가 끝나니 태풍이 연이어 왔다. 장마 때 폭우로 부서진 집을 수리하는 중인데 자꾸 멈춘다. 바로 어제도 폭우가 쏟아졌다. 집 공사는 그래서 자꾸 멈춘다. 코로나19와 긴 장마, 폭우, 태풍.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수도권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되자 그나마 뜸하던 책방의 발길은 뚝 끊겼다. 코로나19 감염 걱정으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된다. 오늘 오전에는 갑자기 성인 남성 4명이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저, 어떻게 오셨어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들 역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더니 말했다. “지금 커피 되나요?” 이런! 한동안 손님이 없다 보니 그만 내가 책방과 카페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것이다. 근처에 볼일을 보러 왔다는 그들은 책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책은 읽기 싫은데 책 있는 데 오니까 좋네.” 이 책 저 책 열심히 살펴보길래 나는 기대에 차서 그들 중 하나라도 책 한 권을 집어 계산대로 갖고 오기만을 기다렸다. “저희 밖에서 커피 마시고 갈게요.” 흠! 결국
유럽엔 왜 태풍이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유럽은 태풍이 생기지 않는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태풍은 열대성 저기압 중 풍속이 강한 폭풍우이므로 태풍이 만들어 지는 곳은 대부분 서태평양이나 남중국해이다. 유럽이 태풍과 같은 피해가 없는 것은 내륙지역이어서 큰 바다가 근접해 있지 않고 위도도 높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태풍(Tempest Op. 31-2)> 3악장은 요즘처럼 태풍이 줄이어 몰아칠 때면 한 번쯤 들어볼 만한 걸작이다. 피아노 건반 위에 금방이라도 광풍이 불어올 듯 장엄한 선율이 울려 퍼져 일순 무아의 경지에 말려든다. 전 악장이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 곡을 이해하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를 먼저 읽어보라”고 베토벤이 귀띔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1770년 12월 그가 태어난 나라 독일은 물론 유럽 전체에도 태풍(The Tempest)이라곤 없었고 지금도 없다. 태풍은 7~10월 사이에 주로 북태평양 남서부와 아시아 쪽 해상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의 하나인데, 한자 이름 태풍(颱風)의 영어식 발음인 ‘타이푼(Typhoon)’으로도 통한다. 베토벤이 출생한 독일의 라인(Rhine)강 상류에
참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싶다. 나를 생각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세상에는 현명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지혜롭고 영명(英明)하여 우러르게 되는 많은 이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으니 모두의 나의 발언은 자칫 어폐가 있는 얘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그 말을 바꾸고 싶지 않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갑자기 암이나 회복 불능의 치명적 병에 걸린 이들이 “왜 나냐”고 비탄의 원망을 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그 말이 다소는 공소하게 느껴졌다. “왜 나”라니, 그런 상황에 처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그 ‘누구도…’ 일 수 있으니 그 말처럼 싱거운 표현이 어디 있는가. (물론 그 정황이 극단의 심사를 드러내려 함인 것을 모르진 않지만) 얼마 전 나는 왼쪽 다리가 갑자기 아파서 보행이 어려웠다. 정말 갑자기여서 그 어느 것도 인정할 수 없었다. 가까운 친구 몇 사람이 퇴행성관절염 같다고 했지만 내 스스로는 퇴행성관절염은 뭘…? 그냥 이러다 낫겠지…, 하면서 두 달 가까이를 흘려보냈다. 그런데 웬걸? 별스럽지 않게 소염진통제를 먹으면서 두 달을 버티어도 좀체 나을 기미가 안보여 병원을 찾고 치료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물리적 무게나 부피가 없다고 하지만 스마트 폰의 사이버 공간에 저장할 수 있는 디지털 데이터 양은 한계가 있다. 마구 찍어 둔 사진들이 쌓이다 보니 그 한계에 육박하고 말았다. 뒷날 좋은 추억거리가 되리라 여기며 지우지 않고 남겨둔 탓이다. 차곡차곡 쌓으며 지내왔다. 뒷날 언젠가 아주 귀하게 쓰일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아니 멋진 추억까지도 고스란히 상기시켜주리란 믿음 때문이라 해야겠다. 또 어느 때는 필요한 것을 끄집어내 멋지게 사용하리라 생각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하나하나 모우고 저장한 지 어언 5년이 가까워졌다. 열심히 노력한 덕에 좁은 공간에 참 많이도 쌓아두었다. 그렇게 많이 쌓였을 줄 정말 몰랐다. 그런데 그 분량을 알고 나니 이를 어쩌지 하는 부담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버리지 못하는 것도 마음의 병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건 아니다. 오래된 것들은 버리면서 살아야 된다는 선험자(先驗者)의 충고를 들어서도 아니다. 비우지 않으면 새것을 들여놓을 수가 없겠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처음엔 귀하게 생각됐던 것들도 차츰 뒷 구석에다 쌓아두게 되고 새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오래된 것들을
인신매매와 포르노 금지법 위반 혐의로 벌금 50만 엔(円)의 약식 명령을 받은 한 남성의 이름과 주소가 3년 동안이나 인터넷에 계속 떴다. 이 40대 일본인 남성은 법원에 개인정보 삭제를 요청했다. 일본 사이타마(埼玉) 지방법원은 자신에게 불리한 기사의 삭제를 요구한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특정인에게 불리한 개인정보의 삭제 요구에 대해 '잊힐 권리'를 명시하고 삭제를 인정한 것은 일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법원은 “범죄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과거의 범죄사실이 사회에서 잊힐 권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성의 가처분 신청에 대해 사이타마 지방법원이 "갱생에 방해받지 않을 이익을 침해받고 있다"며 삭제를 명령했고, 검색사이트 ‘구글(Google)’ 측은 ‘알 권리’를 내세워 법원에 결정 취소를 요구한 상태다. 구글의 가처분 신청과는 상관없이 현재 남성의 체포 기록은 검색에서 더 이상 나오지는 않고 있다. 유럽사법재판소의 경우 '온라인상에서의 잊힐 권리'를 인정하고 피해가 우려되는 개인정보의 삭제를 명령했으나 구글 측은 58%의 삭제 요청을 거부했다. 아동 성폭행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프랑스 사제(司祭)도 자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