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어르신 칠월의 여름은 핑크빛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어주는 사랑스러운 사계절의 연인이다. 활력은 콸콸 차오르고 매력은 철철 넘친다. 이 계절 휴일이 되면 외출이 기대되고 설렌다. 날씨에 상관없이 카메라 들고 길 나섬이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예외 없이 설렘이 시작되고, 비 오는데 어디로 갈까로 시작해 걱정과 함께 길을 나선다. 비를 핑계로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울미 연꽃마을로 가자.” 말 떨어지기 무섭게 카메라 가방을 둘러맨다. 차로 달려서 30분 남짓 소요, 도착한 곳은 포천 군내면의 울미 연꽃마을이다. 연꽃 무리가 햇살을 받고 선 듯 눈이 부시다. 비를 맞고 선 청초한 아름다움도 어디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마른장마에 목말랐다가 지난밤 내린 비로 갈증을 풀어서일까.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바람에 우리를 온몸으로 반긴다. 연꽃은 물결처럼 일렁이며 얼쑤 장단 맞추니 참으로 장관이다. 지금쯤 꽃은 피었는지 지금 가면 볼 수 있을지 걱정을 안고 나섰는데, 우려는 어느새 바람같이 사라졌다. 펼쳐진 연밭 풍경은 설렘이나 기대감 그 이상으로 대만족이다. 남편은 평소 감정을 공중 부양시키는 리액션 부자도 아닌데 오늘은 후하게 칭찬을 한다. 장
그날 늙은 어미 소처럼 울먹울먹 금방이라도 눈물 쏟을 것 같은 들판 멀리 바라보는 저 새 가벼운 날개로는 무거운 공기 사이 비집기 어렵겠다 대숲을 빼박은 맞은편 서슬 걸어 들기 어려운 묵직한 허공 사이로 바닥을 쓸며 기어 오는 바람 춥다 연분홍 마시멜로는 영영 떠났을까 손가락 끝에서 노닐던 산꼭대기 구름 오늘은 멀기만 멀다 팔랑팔랑 날고 싶은데 가볍게 바라보고만 싶은데 홍수 지난 들판 검불 거둬내듯 개운하게 치우고 밝게 웃고 싶은데 어렵다 언덕에서 한가로이 볕 쬐는 오두막이나 되었으면 전구 색 웃음 흘러나오는 집을 데리고 바다 마을로 이사하고 싶은 날 기차는 기적소리를 다시 데려왔으면 어머니 자장가도 살아왔으면 눈앞 선명하게 밝아 왔으면 좋겠다 정다운 이와 무릎 맞대고 싶어 생각나는 이름 적어보는 날. 내 안의 그믐 아직 진하디진해 그림이 무겁다 안개에 몸을 헹궈보지만 근거리 나무처럼 선명하기만 하다 평생의 염원은 은회색 풍경 한 자락 되는 일 저만큼 물러선 그대로 있는 듯 없는 듯 하늘 떠받드는 여린 나를 만나고 싶다 생의 어둠 조금 덜고 달빛을 입으면 희붐하려나 어느 세월에 말갛게 물 머금은 수묵화 한 점이 될 거나. 산정호수 울적할 때 주변을 둘러봐 야
반려 청소기 어느 날 우리 집에 이사 온 친구, 낯선 집에 처음 와서 이리저리 한 바퀴 돌더니 어느새 집 설계도를 완성했지. 그 후로 네가 원하는 방을 누비며 깨끗이 청소해 주더라. AI 기술로 무장한 네 모습, 똑똑하고 섬세한 손길에 감탄하며 장애물도 알아서 피해 가는 네가 참 기특해. 때로는 나를 위해 말을 건네기도 하지. "물걸레를 세척하고 올게요", "먼지를 버리고 올게요." 그럴 때마다 나는 웃음 짓네. 고마워, 반려 청소기야. 너는 이제 내 삶의 동반자야. 커피 한 잔의 여유 바쁜 일상 속, 작은 쉼표처럼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긴다. 진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면 어느새 마음이 고요해지고, 머그잔 속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오늘 하루를 천천히 돌아본다. 좋았던 순간도, 힘겨웠던 순간도 한 잔의 커피 속에 녹여내고 조용히 내려놓는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 감사의 마음을 음미하며 나를 위한 시간을 천천히 누린다. 커피 한 잔의 여유, 그것은 내게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반려식물의 기다림 햇살 아래 빛나던 잎새들 바람에 실려 온 슬픔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네 주인의 아픈 마음을 닮아 물방울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리움에 젖어가는 하루 병원의 차가운 바람 속
강아지풀 시창작법 풀은 각자의 서술방식으로 시를 쓴다 자기 이름이 무언지 모르는 풀들 풀은 이데올로기를 모른다 풀은 오직 푸르러야 하는 사명뿐 풀은 명예를 모른다 그래서 풀은 낮을 꿈꾸며 밤에 시를 쓴다 그래서 풀은 여름을 꿈꾸며 겨울에 시를 쓴다 그래서 풀은 줄기를 꿈꾸며 뿌리로 시를 쓴다 풀의 주된 서술방식은 생략 풀은 향기로운 열매를 생략한다 겨울 동토의 시련을 생략한다 그래서 내년의 꿈마저 생략하고 오로지 푸르다 풀은 열매보다 달콤한 새벽이슬을 형용사로 매단다 풀은 온갖 미사여구를 퇴고하여 휴지통에 구겨 녛고 풀은 주변과 동화하는 푸르름의 시를 쓴다 풀의 마디마디와 긴 꼬리수염에 난 수많은 시어들 풀은 제자리를 맴돌며 우주적인 시를 쓴다 숲에서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대화란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님을 그들은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듣기만 하면서도 시시때때로 웃으며 서로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들은 진리는 푸른 것이라고 몸으로 말한다 말하지 않고 듣는 자는 우리며 말해야 듣는 자는 타자인데 말하고 있을 때 지나치는 것이 세월이고 들고만 있을 때 세월도 동안거에 든다고 숲은 겨울의 의미를 가르쳐주었다 눈[雪]의 화법 눈이 온다 하얀 눈송이가 마구 흩날린다 펑펑
회 날로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숙성되어 여무는 것을 알지 못한다 펄펄 뛰고 눈까지 껌벅이는 것을 마주보며 숨조차 쉬기 어려워 뻐끔거리는 아가미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은 신선하고 새로운 것에 집착하고 서서히 익어가는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바람꽃 시간의 강을 건너 너에게로 닿을 수 만 있다면 배롱나무 붉은 그림자에 미래로 가는 배를 띄우고 과거의 수원지에서 흘러 흘러 시간의 강기슭에 피어난 너의 체취를 닮은 꽃잎이 바람처럼 날리는 하늘아래 이슬처럼 머물다 가버린 청춘과 사랑과 인연의 골짜기에 별의 꼬리를 잘라 샘을 만들고 반짝이는 물결이 흐르는 붉게 타오르는 인생 부두에 배는 사라지고 노만 남아 내일을 그리다 지쳐 스러진 너의 발자국만 남은 강나루에 그림자 없이 피어난 꽃 연어 꽃잎이 바람처럼 쏟아지고 추억이 꽃잎처럼 겹겹이 쌓인 호반위의 오솔길을 따라 은빛으로 빛나는 물결위에 피어서 아련하게 손짓하는 무지갯빛 기억의 조각들이 흩어졌다가 모이고 다시 흩어지는 여름밤의 반딧불이처럼 가슴속에서 잠든 꿈결에 속삭이고 그리움이 산처럼 쌓여서 평생을 올라도 건너지 못할 봄날의 그 개여울에 가고 싶다 서영석(徐榮錫) - 시인 - 아호 : 녹정(鹿井) -
굿판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새들이 방문까지 날아와 지지배배 하며, 시끄럽게 목청 높여 지저귀는 소리에 단잠을 깨운다. 창문 앞뜰에는 꽃들이 화사하게 얼굴 내미는 계절의 발걸음을 잊은 듯 어린 시절 기억들이 엊그제 일처럼 되살아난다. 뒷동산에 진달래꽃, 할미꽃, 벚꽃, 목련이 온산을 뒤덮어 흰 물결에 붉은 점 수놓고, 아지랑이 춤추는 어느 날 오후였다. 내가 살던 마을에서 바라보면 서쪽에는 야트막한 산이 시내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다. 봉수골에서 바라본 발아래 펼쳐진 마을은 만개한 꽃으로 덮여 있어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한다. 서쪽 야산에 시내로 가는 지름길을 따라 우리는 학교를 오가곤 하였다. 어느 날인가 여느 때처럼 동네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름길을 따라 가쁜 숨을 몰아쉬면 봉수골 언덕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징. 장구. 꽹과리 소리가 요란스럽게 요동쳐 우리의 귀를 자극했다. 온 동네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오영(가명)이네 집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마당에서 굿판이 한바탕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시절은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라 동네 사람들은 아프거나 집안의 길흉화복이 있을 때면 용한 무속인을 수소문하여
비빌 언덕이 단풍밖에 없네 그려 천 원짜리 물파스 하나로, 허리 꼬부라진 물파스 하나로 수십 년 통증을 지우고 살아 허리 구부러진 달동네 영석이 할배 텅 빈 연탄 광문을 여닫는 구순의 손길이 으슬으슬해진다 댕강댕강 잘려 나가는 늦가을 볕만큼씩 늘어나는 한숨 소리에 섞여 나온 허연 입김을 소처럼 내뿜으며 물 바랜 곤색 추리닝 지퍼를 턱까지 올리고 길 건너편 벌겋게 타고 있는 가을 산으로 들어간다 장끼가 뿌드득 날아오른다 그래, 단풍아, 장끼의 꽁지깃에 불 댕기듯 흥청흥청 갑질하는 꼴사나운 세상도 모두 불살라 버리거라 가을 산이 달궈지고, 달궈지면 바위까지 달궈지면 바위 한 조각 등짝에 떼어 붙이고 황소바람 밤새 불던 동짓날 한밤중도 짧았었다고 얘기하리니 체면을 벗어던지면 저 산이 해를 삼키고 구름이 달을 재우는 시간 까마귀는 자유를 얻는다 귀 쫑긋 세운 고양이 발톱이 우습고 눈 부라리는 올빼미 눈동자도 무섭지 않다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으로부터 내가 놓지 못하는 것들로부터 멀어져 보면 알게 되지 낙엽 지는 소리가 얼마나 평온한지 날갯짓이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알게 되지, 알게 되지 깜깜한 밤에 까마귀로 날아 보자 멀리, 더 멀리 보이는 것으로부터 지우지 못하는
몇 년 전 늦가을 너른 고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에 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본성은 보수가 잘되어 있었다. 그러나 발길이 뜸한 동문 밖 한봉 외성은 보수가 되지 않았다. 한봉 외성은 흙과 큰 돌로 쌓고 다져서 성벽인 둔덕을 만들고 그 위에 담장형식의 성가퀴를 둘렀다. 한 때는 오랑캐와 맞서는 옹골찬 방호 보루로 좌익문(동문)의 옹그린 요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연하고 조악한 시절을 악다구니 하듯 버티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누가 나서서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가. 성벽 둔덕은 허투루 뭉그러지고 까무러진 곳에는 등산객이 다녀서 벼랑길이 생겨났다. 겨우 흔적만 남아있는 허물어진 성가퀴 언저리에는 고라니가 하르르한 고샅길을 내었다 나도 모르게 성가퀴와 나는 같은 운명임을 느끼었다. 순간 깊은 시름에 잠기었다. 나도 옹골차던 때가 있었다. 악다구니 하듯 버티며 힘차게 살아왔다. 성가퀴가 그러하듯 나이가 들어 결코 원하지 않았던 헐수할 수 없는 백수의 처지가 된 것이다. 갑자기 괜스레 심각하게 슬퍼지고 온 몸이 나른하게 기운이 쭉 까라진다. 멜랑콜리에 빠져버렸다. 석양에 수어장대(서장대)에 가까워질 때, 켜켜이 쌓인 낙엽 길을 허든허든 걸었다. 와삭이는 길
가을을 먹다 삶을 뚜벅 뚜벅 걷다보면 가볍게 걸을 때도, 달릴 때도 세월을 못 이겨 힘에 버거워 질질 끌고 갈 때가 있다 그 속에서도 삶을 즐기고 싶을 때 힘들어 삶이 귀찮아 질 때라도 가끔은 하늘도 보고 추억도 소환하고 그 속에 빠져보는 것도 참 좋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다 귀하고 귀한 보배로운 삶이다 내 인생 니 인생 할 것 없이 모두 다 소중한 삶이건만 세월 속에 파묻힌 병들어 버린 내 인생 걷지 못해도 지팡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아니 어깨동무하고 함께 가는 동반자라도 있으면 좋겠다 난 그렇게 지키고 싶다 하나하나 다 소중한 것들을 부정보다는 긍정을 불평보다는 칭찬을 해 주는 그런 인생을 먹고 싶다 깊어가는 가을을 먹으며 오늘도 또 다른 날을 기대해 본다 선물 같은 하루 여름의 막바지인 어느 날 출근 준비 하느라 정신없는 나에게 카톡 하나 딩동 “와 맛있겠다.” 먹음직스런 감자탕과 곰탕 사진에 감동 메세지 보내고 나니 보따리 사진이 올라 온다 “어르신들께 가져 가나보다“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어머 원장님 웬일이세요?" 하면서 반기니 지금 어디에요? 하며 물으신다 출근준비중인데요 왜 그러시는 데요? 지금 출발합니다! 라는 말씀에 갑자기
우중단상 계속된 열대야에 한낮 빗줄기 내리는 날 단지 아파트에 사다리차가 장롱이며 냉장고며 방수 포장으로 무장하고 빗줄기 사이로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분주하다. 오래된 20층짜리 고층아파트에 뷰는 기대도 못 하고 엘리베이터도 안 타는 2층으로 내 집 장만 설렘을 안고 아침부터 잔뜩 흐린 날씨가 한 방울씩 내린 비로 장롱만 비 맞지 말아야 한다고 비닐로 덮었던 생각이 난다. 이삿날 비가 오면 잘 산다고 하더니. 창문까지 나뭇가지로 가로막혀 그나마 눈앞에 있는 주차장도 가려져 화분마다 햇볕이 부족해 시들시들하다 죽고 마는 저층이다. 그래도 비 오는 날이면 이층의 진가가 발휘된다. 창을 넘어 들어오는 나무 이파리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모든 불만을 털어준다. 비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까지도 잎사귀에 터지는 빗소리에는 반응을 보인다. 가끔 여름이면 나뭇가지에 빗줄기 타고 들어오는 청개구리로 아이들이 소란한 날도 있었지만 ‘토도독토도독’ 잎사귀에서 창문으로 튀어 부딪치는 빗소리가 나면 귀보다 먼저 발이 앞선다. 아홉 식구 우리 집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은 두 개뿐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하나는 딸 셋 낳고 나온 장남 몫이고 하나는 중학생 언니 몫이다. 언니의 우산은
가냘픈 몸매 때문에 바람이 불어올라치면 하늘하늘 춤추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 풋풋한 향기조차 코에 익숙한 풀 내음이라 정신이 맑아진다. 마냥 티 없이 맑고 순수한 구절초꽃은 내 마음에 영 순위 사랑이다. '가을은 두 번째 봄'이라는 멋진 글귀가 아니어도 우리는 봄처럼 설레며 가을 한복판에 서 있다. 구월은 꽃 천지다. 소녀처럼 맑고 순수한 눈빛으로 꽃을 따라 걷고 또 걸어도 지치지 않는 가을은 그렇게 우리를 설레게 하며 달려오니, 분명 '두 번째 봄‘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가을이면 꽃을 따라 바삐 움직이는 나에게 구절초꽃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그리움이다. 지금처럼 전국적으로 꽃 명소가 없었던 시절, 교외로 나가니 예쁜 카페 입구에 새하얀 꽃들이 반갑게 맞이하길래 망설임 하나 없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 풀꽃 하나에 힘들었던 일상은 금세 잊고 마음속엔 별처럼 빛나는 순수의 꽃 생각으로 가득 찼다. 더구나 뒤꼍엔 하늘의 별들을 다 모아놓은 듯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으니, 카메라를 따로 준비해 가지 못한 것이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이름도 모르고 만난 구절초였지만, 이미 흐드러지게 핀 그 꽃이 이삼일 안에 다 지지는 않을까 밤새 노심초사하
고토(古土) 작게 매우 가늘게 젖은 꽃잎 스물 그 중 하나 또 하나 떨어져 가늘고 긴 줄기에 위태롭게 올라 앉아 바람에 휘둘리다 운악산 바라보는 분홍빛 구절초 여린 시선 별처럼 하얗게 모여 소곤소곤 젖어 생을 짓는 방울 꽃 비처럼 깊게 자라는 게 보이지 않았는데 비처럼 깊게 나무처럼 굵게 자랐습니다 고양이 겨울을 창문 너머로 즐길 때 헤아비 흙은 밤에도 빛을 발하고 농부는 고단에 고단을 더해 흙을 뒤집는다 발걸음으로 땅에 선을 만들고 씨앗을 넣어 숨은그림 만들기를 준비한다 달도 없는 밤 화가의 붓칠처럼 섬세하게 내일에 내일을 그려낸다 비바람 천둥 농부의 뜻을 헤아려 쨍한 햇볕 시간으로 대지에 채색을 시작한다 초록초록 똑같이 생겼다고 하지만 각자 다른 사투의 시간 이슬을 기다린다 생의 끝에서 말없이 잎을 틔우며 햇살에 햇살을 살아 낸다 송동현 본명 송계원, 1975년 포천 출생. 2001년 시집 『꿈을 펼쳐!』로 작품활동 시작, 포천문인협회 전 사무국장, 맥놀이창작동인회 부회장, 사랑방시낭송회 회원 도담도담한옥도서관 시창작교실 강사, 도서출판 담장너머 대표. 시집 『꿈을 펼쳐!』, 『사랑水』 jinu514@hanmail.net
인연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것 같다. 불행해진 첫사랑이었던 일본인 여성을 만나고 나서 작가가 한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인연들을 만난다. 피천득의 인연처럼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인연도 있고 만나서 좋은 인연도 있다. 만남과 무관한 인연도 있고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불행한 인연도 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이듯 인연 또한 그렇다. 어느덧 고희(古稀)에 접어든 지금에야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어떤 인연들이 좋은 인연이었고 어떤 인연들이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이었던가. 지난 시절들이 오래된 흑백영화와 같다. 그것들은 이제 날것처럼 펄떡이며 생생하지도 않다. “인생이란 그리 행복하지도 그리 불행하지도 않다.” '여자의 일생'의 주인공 잔느가 죽은 외동아들 폴이 남긴 손주를 안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읊조린 말이다. 바람둥이 남편은 잔느의 하녀까지 성폭행하여 임신시킨다. 남편은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다 결국 그 남편에게 살해된다. 임신한 잔느는 하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들을 낳는다. 잔느는 외동아들 폴을
빛으로 만난 님이시여 가을이 오면 설렘으로 시작한다 달콤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하려나 한동안 잊고 있던 그 옛날 그분이 오려나 아침이슬 먹고 영롱한 숨을 쉬며 콩닥콩닥 가슴 두드리는 들국화 여인의 허리춤을 휘감아 주려고 하는가 억새풀 넘실넘실 은빛 파도를 가르고 산자락 바위에 올라앉아 긴 한숨 내 쉴 때면 억새풀 꺾어 집시치마 엮어 입히고 노오란 소국 한 송이 머리 위에 꽂아 주던 분이시여 광명으로 가슴에 새겨준 흔적 없는 이름 앞에 청계수 계곡물 졸졸 흐르는 곳에 하얀 옷고름에 님의 이름 새겨서 흘려보내면 내 옷고름 건져서 님의 대님 삼아 찾아오실 거라고 그리 믿소이다 길을 가다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나를 맡겼다 바람과 구름이 있었기에 나는 그곳으로 따라갔다 흐르는 물이 있었기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눈보라 거센 바람 몰아쳐도 설상에 매화 본 듯 그 길을 가리다 녹 슬은 페달 보이지 않는 끝을 보이는 듯 초고속으로 페달을 밟고 달려간다 정거장 없는 활주로를 질주하며 날개 달은 구름에 어느 순간 몽롱함을 느끼며 꿈속으로 빠진다 바람에 할퀴고 너덜해진 천사의 날개가 드높은 솟대위에 걸쳐진 채로 바람에 춤을 춘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녹슨 페달은
오월의 장미 월담을 한 활짝 핀 얼굴에서 미소가 가득 퍼집니다. 피어난 검붉은 잎술에서는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는 오월의 아침입니다. 한 번에 품에 안기는 조금은 설레게 하는 당신 당신은 오월의 신부입니다. 소녀의 사랑 안갯속 희미한 곳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잠시 얼굴 내민 외딴섬 그곳은 내 고향이자 내가 사랑하는 배롱나무 한그루가 푸른 언덕 끝자리에 자리한다. 가끔은 그림을 그리고 친구와 소꿉놀이도 했던 장소 빠알간 꽃잎을 터트릴 즈음은 내 가슴은 콩닥였다. 바람이 스산이 불어대면 백일동안 꽃을 피워내던 바닥엔 분홍 양탄자가 깔린다. 잠시 들여다본 외딴섬도 지나는 통통배의 기적소리에 바람 따라 사라진다. 아직 나는 거기에 있는데. 봄은 봄은 수줍게 내미는 꽃잎처럼 당신의 미소를 닮았네요. 파르르 봄바람에 떨리는 꽃잎은 그대의 연분홍 입술 같아요. 산자락 바위틈에서 햇빛 사랑을 한껏 받고 있는 꽃속에 나는 빠져버렸네요. 그 꽃술이 아마도 당신 마음 같아서 그 마음 행여나 비구름에 다칠까봐 나는 우산 되려나 봅니다. 늘 그대생각-2 흐르는 물소리는 그대의 몸짓인걸! 스치는 바람은 그대의 손길이고 지저귀는 새 소리는 그대의 속삭임으로 나를 품는다. 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