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글로벌 패션 브랜드 ‘갭(Gap)’은 맨 처음 ‘팬츠 앤 디스코(The Pants and Discos)’라는 이름이 붙을 뻔했다. 창립자 도널드 피셔(Donald Fisher)가 1969년 샌프란시스코에 청바지 전문매장 '더 갭(The Gap)'을 열 때 '4톤의 리바이스(4 tons of Levi’s)'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색상과 치수의 리바이스 제품을 쌓아놓고 갭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창업 초기부터 청바지의 주 구매층인 12세에서 25세까지를 타깃으로 삼았다. 그래서 결국 ‘세대 차이(The Generation Gap)’라는 의미를 담아 ‘갭’으로 이름을 정했다. 갭은 흰 바탕에 상호명인 ‘The Gap’이라고 쓴 로고를 썼다. 그러다가 1988년엔 파란색 정사각형에 'GAP'이라는 브랜드명이 흰색으로 쓰인 로고가 탄생했고, 현재까지 이 로고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각자 몸에 딱 맞는 치수의 청바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양한 치수를 갖춘 갭을 찾게 되어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로 자리 잡은 비결이 아닐까. 갭(Gap)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과 사람, 일반적인 현상과 현상 사이에 존재하는 의견 등의 차이를 일
비로소 내가 이곳에서 좋다, 좋다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람과 꽃에 환호하고,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와서 좋아하고, 날이 흐린 날은 흐려서 좋아하는 이유는 내 안이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며칠간 나는 이 자유의 세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2년 전쯤, 한 친구가 아들 명의로 아파트를 샀다고 말했다. 그 아들은 그때 스물한 살이었다. 그러면서 더 늦기 전에 내게도 아들 명의로 아파트를 사두라고 했다. 전세를 끼고 사면 돈이 얼마 없어도 된다고 했다. 1년 전쯤, 친구가 아파트를 한 채 사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이혼을 꿈꾸던 친구라서 혹시, 했다. “아냐, 그냥 한 채 사둘까 하고.” 돈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가 말했다. “전세 끼고 사면 돼.” 1가구 2주택이 되는데 괜찮냐고 나는 물었고, 그 친구는 금세 다시 팔면 된다고 했다. 2년 전쯤이면 나는 이곳 시골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때였다. 1년 전쯤이면 나는 시골책방에서 작가와의 만남이며 음악회 등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그 말들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전국의 아파트가 연일 뉴스가 되고 부동산 정책이 계속 발표되고 있는 요즘, 책방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강남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최근 보도에 따르면 주부의 절반 이상이 “올해는 직접 김장할 계획이 없다”는 식품업체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56.2%는 '김장 안 한다'고 답했고, '김장한다'는 응답자는 43.8%였다. 김장 안 한다는 응답이 지난해보다 1.3%포인트 높아진 것이다. 김장이 번거롭다거나 아예 할 줄을 몰라 두 배쯤 비싼 값을 지불하고 절인 배추를 배달시켜 버무려 먹는 집도 늘고 있다. “김장하셨나요?” 해마다 이맘때면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인사다. 꼭 김장하고 안 하고를 묻는다기보다 일종의 계절 덕담이라고나 할까. 김장하고 연탄 들여놓으면 ‘월동준비 끝’이었던 게 우리네 겨우살이였다. 김장의 기본 메뉴인 김치는 무, 배추, 갓, 열무 등 다양한 채소를 소금에 절인 후 고추와 파, 마늘, 생강, 젓갈 등의 양념을 섞어 저온에서 발효시켜 먹는 음식이다. 채소는 예로부터 보존이 어려운 식품 중 하나였다. 말리면 영양가가 줄어들고 맛도 없어져 먹기에 불편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채소를 소금에 절여 놓으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게다가 소금 외에도 취향에 따라 갖가지 향신료를 함께 섞어 새로운 맛과 향을 내기도 한다. 소금물에 절이고 발
"그래, 그대들이 아직 있어 주는 것이 나는 고맙고 고맙다". 이 생각이 가슴 벅차게 차오르면서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지인에게 고맙고 고맙다는 생각을 잠깐 사이 뜨겁게 하고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 어때? 점심이나 같이할까?” 오늘 아침 댓바람에 친구 두 명에게 전화해서 느닷없는 콜을 했다. 아니 댓바람도 아니다. 전화를 한 것은 느닷없지만 점심을 같이하고 싶다는 생각이야 꽤 되었고 이차저차 시간을 비집어 한 것일 뿐이다. 동창이다. 특별히 가깝다기보다 비슷한 취향, 비슷한 식성이 공통한데 내가 얼마 전 선배로부터 대접받았던 음식(일식)이 맘에 들어 그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문득 전화를 끊고 나니 왠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 그지없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대들이 아직 있어 주는 것이 나는 고맙고 고맙다". 이 생각이 가슴 벅차게 차오르면서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지인에게 고맙고 고맙다는 생각을 잠깐 사이 뜨겁게 하고 있었다. 60년대 중반쯤의 얘기인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유학 간다는 것은 웬만큼 해선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그 친구는 미국으로 유학을
그런 아름다운 오해를 받을 일이 이제는 다시 안 생길 것 같아 서글퍼진다. 그래서 그런지 대전 시절의 그 일이 더욱 새롭게 떠오른다. 그 시절 함께 손잡고 걸었던 그 동갑내기 누나도 이젠 며느리를 둘이나 맞은 70살 할머니가 됐으니. 혈기 방자했던 20대 후반 어느 날의 기억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아무런 동기도 없었는데 갑자기 그 일이 왜 생각이 나는지는 모르겠다. 이럴 땐 그저 ‘사노라면 가끔 그런 생각도 날 수 있다’는 말에 책임을 돌릴 수밖에. 그날은 일요일 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젊고 아름다웠던 날의 이야기 같아 혼자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내게 그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 시절 나는 선배 세 분과 함께 대전에서 근무 중이었다. 당시 총각이었던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며 일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잘 놀았다. 지방 근무는 층층시하인 본사와 달라 유형무형의 각종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그곳이 고향인 사무실의 선배들과 달리 나는 객지여서 하숙을 했다. 나는 객지 생활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본사와 달리 비교적 일거리가 적어 퇴근 후 선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중략>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겠습니다. 시인 나태주 님의 <11월>에 유난히도 짧았던 10월 한 달을 보내고 11월을 맞는 감회가 진하게 묻어난다. 가뜩이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가슴 졸이며 살아온 한해도 이제 기억의 뒤안길로 멀어져간다. 11월은 기다리기도 전에 벌써 코앞에 다가와 버린 것이다. 달력을 뜻하는 영어 캘린더(Calender)는 라틴어 칼렌다리움(Calendarium)에서 따온 것으로 ‘회계 장부’라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네 달력에도 오만가지 메모를 채워가며 1년 열두 달을 보낸다. 달력에 나오는 11월(November)은 원래 아홉 번째 달이고, 섣달인 12월(December)은 열 번째 달이었다. 11월(November)은 라틴어 ‘노벰(Novem)’에서 유래한 것. 9라는 숫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9월이 아닌가? 구태양력에 따르면 지금의 9월(September)은 일곱 번째 달이었고, 10월(October)은 여덟 번째 달이어서 1년은 10개월이었다. 그러던 것이 훗날 7월에 태어난
분필에도 명품이 있다. 멀리서도 또렷이 보이는 선명한 색감, 힘주어 판서해도 잘 부러지지 않는 단단함, 그리고 부드러운 필기감과 타제품보다 현저히 적은 가루 날림. 바로, ‘하고로모 분필’이다. 일본제품이었던 하고로모 분필이 몇 년 전 ‘귀화’해 ‘메이드 인 코리아’가 되어 화제다. 화제의 중심에 ㈜세종몰의 신형석 대표(50)가 있다. 글 홍보전산과 추영화 주무관 포천에서 생산되는 세계적 명성의 분필 포천 영북면에 위치한 ㈜세종몰에서는 하루 7만 개의 명품분필이 생산되고 있다. 가격이 다소 높지만, 일반 분필과 비교되는 월등한 품질로 날개 돋친 듯 판매되고 있다. 구매자들은 ‘분필 한 자루로 온종일 쓸 수 있어 한 시간에도 여러 차례 부러지는 여타 분필보다 오히려 경제적’이라는 평이다. 수출도 활발하다. 생산된 분필의 약 40%는 해외로 수출된다. 2019년 기준 연 매출 16억 원. 올해는 20억 원을 이미 훌쩍 넘어섰다. 신형석 대표가 처음 인수해서 제조, 판매하기 시작한 2016년의 3억 원보다 거의 7배 증가한 수치다. 하고로모 분필은 강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쓰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팬덤이 형
대부분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누려보고 싶어서 노력하며 산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질이 확보되면 그 후엔 성취와 행복의 상관관계가 그다지 비례하지 않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계속 증명되어 왔지만, 자족하는 선을 긋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다 보면 쉽게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잃을 수도 있다. 성공이나 성취란 개념에 속하는 것 중엔 명예도 있겠고 권력이나 부의 축적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어느 것도 이루기 쉽지 않고, 주어진 것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더 어렵다고 생각된다. 사회지도층은 아무래도 세간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으니 하자가 들통나면, 더 준엄하게 대중의 비판을 받게 되는 것도 “유지비”가 비싸기 떄문이다. 그러나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라는 속담은 있어도, 만 가지 걱정이 싫어서 만석을 포기할 사람은 흔치 않을 거다. 미국의 부자들 중엔 자신들이 살던 고대광실을 박물관으로 남기고 간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굳이 찾아서 가진 않더라도 자동차 여행을 하다가 근처로 지나가면 들려볼 기회가 많다. 한적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동네에 숨어있는, 유럽에서 본듯한 캐슬 같은 저택들도 구경해볼
전 친구가 없어요. 그녀는 혼자 왔다. 얼굴은 오십 안팎으로 보였지만, 요즘은 나이를 맞추기가 힘들다. 그녀는 커피 한 잔을 시켜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일어나 책들 앞에서 서성댔다. 그러다 이제 그만 돌아가는가 싶었던 찰나, 문득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친구가 없어요, 라고. “친구가 없어요. ……. 물론 친구야 있지요.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어요.” 친구가 없다, 는 말에 나는 그만 그녀의 눈에 내 눈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도 친구가 없어요.” 그녀가 돌아간 지 하루가 지나도록 나는 그 말에 맴돌고 있었다. 나의 친구들은 어디에 있나. 나는 누구의 친구인가. 나라고 왜 친구가 없을까. 얼굴들이 떠올랐다. 가장 오랫동안 만났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주 어릴 때 만난 친구부터 사회에서 만난 친구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했다. 그들을 만났을 때 나의 눈빛과 그들의 눈빛을 생각했다. 모두 좋은 사람들. 그러나 오래 만났다고 과연 ‘친한 사이’일까. 은희경의 소설 <빛의 과거>는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무려
코로나와 함께 온 ‘언택트 시대’의 당면 문제는 고령층의 소외감과 일자리이다. 첨단 기술이 보편화하면서 여기에 익숙한 젊은 세대와 달리 고령층은 어쩔 수 없이 밀려난다. 부분적으로 기술이 인력을 대체하는 건 바람직하다. 그러나 기업은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는 반면, 일자리가 하나둘 사라지면 근로자들은 먹고살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70년대 중반, 필자가 신문제작시스템 전산화과정(CTS · 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연수를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가장 첨단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던 닛케이(日本經濟) 신문의 편집국과 제작국에 상주하다시피 했는데, 그때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매우 번거롭고 비능률적임에도 낡은 구식시설(HTS · 활판)의 일부는 옛날 그대로 운영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첨단시설로 바꿀 수 있는 기술과 시스템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30% 정도의 나이 든 직원은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컴퓨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그냥 납(鉛) 활자 위주의 시설을 그대로 쓴다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에겐 고용의 문제가 최우선이었다. 코로나와 함께 온 ‘언택트 시대’의
미국에 와서 산 지 40년이 되었고 투표권을 행사해온 지도 30여 년이 지났으나, 올해처럼 전국적인 관심과 열기를 체감한 대선은 처음이다. 완벽한 시력을 뜻하는 영어 표현으로 20/20 vision이라고 하는데, 2020년은 팬데믹과 함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전쟁 같은 대선으로도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최근 미국의 대통령 중, 재임 동안에도 막강한 지지를 받고, 그를 기억하는 국민들이 아직도 제일 그리워하는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이다. 특히 경쟁자인 먼데일의 고향이던 미네소타와 꿋꿋한 민주당 텃밭인 워싱턴DC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승리한 그의 재선 성적표는 역대급 완승으로 기록된다. 믿고 따르고 존경하는 자랑스러운 지도자를 갖는 것은 모든 국민들의 바램일 것이다. 2016년, 정치판의 인지도가 굳건한 힐러리의 상대로 텔레비전 예능 프로에서나 보던 장사치 트럼프가, 레이건 대통령 이후부터 더욱 전통적인 가치관을 상징하게 된 공화당의 대선주자로 나왔을 때 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아연실색했다. 대부분의 여론은 힐러리의 승리를 예견했고, 트럼프처럼 점잖은 척도 안 하는 인물이 미국 대통령이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이 입 밖에 내보고 싶어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오늘날 환자들의 열 중 여덟아홉은 식생활과 같은 생활 습관과 라이프스타일만 바꾸면 더 약을 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꼭 필요한 환자들에게는 약을 잘 써야 하겠지만, 대부분 환자에게는 건강을 돕기 위해서 참으로 해야 할 일은 약을 끊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업, 축산업, 수산업의 기본 구조는 반 생태적이고 반 자연적이다. 농업을 예로 들면 일부에서 친환경농업, 유기농업, 자연농업을 하고 있으나 아직도 주류는 화학농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화학농법이란 화학비료와 제초제, 농약에 의존하는 농사법이다. 토양을 살리는 퇴비 대신에 화학비료를 쓰면 땅이 굳어지며 산성화되고 미생물들이 죽어 지력이 떨어지게 된다. 지력이 떨어지면 농작물에 병충해가 많아지는데, 그러면 곧바로 농약을 쓰게 된다. 농약을 써서 병충해가 잘 해결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곡식이나 채소, 과일 등을 수확할 때까지 수십 번씩이나 농약을 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패류와 축산물 생산과정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몇 년 전 구제역 바이러스 감염으로 짐승 수백만 마리를 폐사한 일이 있었다. 왜 야생동물들에는 구제역 감염이 거의 없
참 이상도 하다. 생각하면 20년을 거스르는 아득한 시간인데 또한 그렇지도 않다. 어쩌면 나는 시간을 할인하는 천재인지도 모른다. 가능만 하다면 20년의 시간을 통째로 할인한들 그건 또 어떠랴. 그때 그 결별(訣別)의 시간에는 손 한번 흔들어주지 못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은 늘 그 모습으로 그렇게 있었다. 아득한 꿈의 정류장. 그곳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조그맣고 허술한 간이역이다. 다만 그 한 사람, 떠나고 보내야 하는 설움마저 삼켜야 했던, 그 사람이 거기 서성이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아니 20년의 시간이었지. 20년의 강물이었지. 창백한 얼굴의 그 모습으로 그렇게 거기에 그 사람이 있었지. 침묵하면서. 그 사람의 옷자락엔 아직도 시린 시월(十月)의 그 바람이 묻어있다. 그래, 지금은 아무것도 말하지 말자. 이대로가 좋다. 우편배달부가 던지고 간 봉함 편지엔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빈자리에 무덤처럼 치쌓인 침묵의 언어, 나는 지금 그것을 듣는다. 내 머릿속에 울려오는 무궁한 그 음성을 듣는다. 이 세상의 끝과 시작의 언어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의 침묵 그것이 동질의 것임을 나는 안다. 실존주의 책갈피에 구겨 넣었던 스무 살의 침묵은 마흔
▲150cm보다 작은 키의 프랑스 출신의 미국작가 루이스 브루즈아.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예술은 스페인 독감과 관계가 있다. 루이즈 브루즈아(Louise Brougeois)는 프랑스 파리에서 1911년에 태어나, 1938년 미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뉴욕으로 이주해서 2010년 98세로 사망할 때까지, 주로 초현실주의로 분류되는 설치미술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한 아티스트다. 2018년 늦여름 우연히 내가 사는 동네에 신흥 부자가 새로 지은 미술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자들이 사후에 자신이 살던 저택을 박물관으로 기부하여 소장품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미술관은 많이 가봤다. 한적한 주택가에 거의 숨어있듯 위치한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규모일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글렌스톤(Glenstone)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현대미술관은 그 규모와 건축의 아름다움과 소장품들이 세계적으로 손꼽힐 수준이다. 명실공히 워싱턴 DC 근교의 숨은 보석이다. 부자들의 여우 사냥터로 남겨져 있던 230에이커(1에이커는 1200평 정도)의 넓은 땅을 구입하여 아름답게 조경하고, 건물 자체로도 예술품인 현대식 건축물의 미술관을 지었다. 설립자는 1956년생으로 우리 동네 출신의 사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