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어린 시절 돈암동 달동네의 그 좁은 비탈길에서 얼음을 지치던 모습이 떠오르고, 골롬반 수도원의 예쁜 성모님 얼굴이 생각났다. 갑자기 두 눈에서는 그동안 참았던 응어리 같은 슬픔이 복받쳐 오르며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하느님....... 고등학교 2학년 때인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난 골롬반 수도회의 그 커다랗고 파란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이제는 더 이상 까치발을 떼지 않아도 인터폰을 누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수도원을 들어선 순간, 왠지 섬뜩하고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난 브라이언 신부님의 방으로 들어가는 층계를 몇 계단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갔다. 층계 위까지 다 올라선 후 신부님 방에 들어가려는데, 전부터 낯이 익었던 신부님 한 분이 나를 불렀다. 크리스(Chris)라는 이름의 뉴질랜드에서 오신 젊은 신부님이었다. 나중에 크리스 신부님은 내 결혼식의 귀한 손님으로 초대되어 참석하기도 했다. “타이, 놀라지 마세요. 브라이언 신부님이 어젯밤에 돌아가셨어요.” 그는 한국말을 전혀 못 하시는 브라이언 신부님과는 달리, 어설프지만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시다니…, 난 처음에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신부님은 나에게 성당에 나가라던가, 성경책을 읽으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헤어질 때 나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면서 이 한마디는 언제나 빼놓지 않으셨다. "Tai, be good!" 쉬운 영어인 듯 보였지만 내가 이 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는 한참이 지난 뒤였다. 맨 처음에는 '내가 좋다는 뜻인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 말이 '승태야, 착하게 자라라'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을 지난 뒤였다. 신부님은 예쁜 포장지에 싸인 사탕이나 쿠키를 상자에서 꺼내주며 이렇게 설명하셨다. "타이(내 이름의 끝 자 '태'를 이렇게 부르셨다), 이 쿠키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님이 추수감사절 기념으로 각국에서 선교 사업을 하는 신부님들에게 보내준 선물이란다. 자, 한번 먹어봐라." 사탕과 과자는 입에 들어가자마자 스르르 녹아버렸다. 나는 그 과자의 맛보다는 그 과자를 싸고 있는 예쁜 포장지가 너무 마음에 들어 슬그머니 빈 포장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브라이언 신부님은 내가 과자를 더 먹고 싶어서 그런 줄 알고 헤어질 때면 언제나 내 주머니에 과자를 한 움큼씩 집어넣어 주셨다. 브라이언 신부님의 책상에는 낡고 오래된 지구본이 있었다. 신부님은 지구본을
지금도 50여 년 전과 다름없이 돈암동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골롬반 수도원. 가난한 달동네 소년은 그 수도원의 커다란 파란 대문을 들어서면 마치 레테의 강을 건넌 듯 이상스러울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마당에 들어선 순간,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소년에게는 그곳이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던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서울 성북구 미아리고개가 있는 돈암동 달동네에서 살았다. 지금은 재개발 바람을 타고 콘크리트 덩어리인 아파트 숲으로 모습이 변해서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를 지경이지만, 당시 돈암초등학교 주변은 내 손바닥 눈금을 들여다보듯이 훤한 곳이었다. 겨울날 눈이라도 내리면 그 좁은 달동네 비탈길은 미끄러운 눈썰매장이 되곤 했다. 동네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은 그러잖아도 미끄러운 길을 걸어다니지도 못 하게 한다고 얼음지치기를 못 하게 했다. 연탄 부지깽이까지 들고나와 말리고는 했지만, 별다른 놀잇거리가 없었던 내 또래 아이들은 동네 어른들의 눈치를 보면서 비탈길이 반들반들해질 때까지 썰매 타기 놀이를 즐겼다. 그것도 지치면 하얀 연탄재를 가루처럼 깨서 눈 위에 뿌려놓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어느 인심 좋은 할머니라도 만나면 고쟁
약자 중에 약자(略字)는 ‘레미콘(Remicon)'이 아닐까. 콘크리트 제조설비를 갖춘 공장에서 제조한 생 콘크리트(Fresh Concrete)를 섞으면서 지정된 장소까지 운반하여 공급하는 굳지 않은 콘크리트, 즉 ‘레디 믹스 콘크리트(Ready-Mixed Concrete)’다. 일본에서 만든 약자라는 설이 유력하다. 현금자동인출기를 뜻하는 ATM이 무슨 약자냐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말이 학생이지, 모두 4년제 대학을 나와 직장생활을 하다가 신문-잡지 쪽으로 진로를 바꾸기 위해 재취업학원에 들어온 젊은이들이다. 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많다. 그들은 물론 현대인은 누구나 거의 매일 ATM기의 신세를 진다. 그런데도 그 약자를 제대로 아는 학생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참 배우는 학생들의 지적(知的) 호기심이 이 정도라면, 거의 무관심 수준이다. 적어도 2개의 영어 단어를 새로 익힐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우선 ‘자동화하다’라는 동사를 형용사적 용법으로 쓴 ‘Automated’가 ‘A’의 약자다. ‘Automation’이 아니다. ‘T’는 ‘Teller’. 은행 창구직원이나 출납계원을 뜻한다. 은행에서 고객들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직원은 출납계다. 호텔이나 레스
포천으로 이사온 지 어느덧 4년 이번에는 또 어떤 즐거움과 행복이 기다릴까. 포천으로 이사 온 지 어느덧 4년이다. 평생을 서울에서 살다가 예순셋(최근에 바뀐 우리 나이로) 늦은 나이에 우연히 이곳 포천에서 직장을 구했다. 첫 출근은 2019년 7월 3일이었다. 매일 서울에서 출퇴근했는데 당시 버스로 왕복 너덧 시간이나 걸려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저녁에 술이라도 한잔 하고 택시를 타면 포천에서 서울 집까지 요금이 6~7만 원이나 나왔다. 출퇴근이 힘들어 거주할 집을 구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포천에서 살 집을 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석 달 뒤인 2019년 10월 1일 우여곡절 끝에 이동교리의 한 아파트를 전세로 얻어 이사를 했고, 바로 그날 소흘읍에 전입 신고를 했다. 전입 신고를 하고 읍사무소 문을 나서는데 핸드폰에 "포천시민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라는 문자가 하나 떴다. 평생을 서울에서만 살던 사람이 포천시민이 됐다. 포천에서 처음 살게 된 아파트는 1층이었다. 서울에서도 평생 아파트에서만 살아왔지만 이번처럼 1층에서 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막상 1층에 살아보니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좋은 점도 많았다. 거실의 통창을 통해 바라보는 확 트인
며칠 후면 포천시민축제가 열린다. 작년에도 시에서 큰 비용을 들여 치른 시민축제는 세 군데 단체에서 각각 주관해 여기저기에 무대를 세 개나 만들며 비용 낭비는 물론이고 오가는 시민들을 불편하게 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주관사 세 곳이 날짜까지 모두 서로 다르게 잡아 진행한다고 한다. 가뜩이나 행사를 통합하고 줄여야 한다는 시민 목소리에 반하는 것 같아서 유감이다.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이다. 축제는 영어로 페스티벌(festival)이다. 카니발(carnival)이라고 부르는 나라도 있다. 한문으로는 祝祭로 쓴다. 한문으로는 축하할 축(祝) 자에 제사 제(祭)라를 쓴다. 축하가 동반된 큰 제사라는 의미다. 오늘날에는 굳이 축하나 제사와 관련이 없더라도 큰 잔치면 축제라 부른다. 본래 축제의 기원은 대체로 고대 사회에서 절기별로 변하는 자연이나 농경과 추수를 기념하는 내용이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만 해도 연등회나 팔관회 등 국가적으로 여는 큰 규모의 불교 행사가 주를 이루는 축제가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서서는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 성리학을 중요시한 탓에 불교 행사가 주를 이루었던 축제가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축제
포천 화현면 출신인 광암 이벽은 1785년에 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는 광암 이벽의 시복을 추진 중인데, 그가 시복되는 그날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의 새날이 되고, 새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광암 이벽은 현재 우리 포천이 가지고 있는 무형자산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 파워이며 소중한 자산이다. 한국 천주교 춘천 교구에서 발간한 8월 27일자 주보에 보면, 2021년 9월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한국 교회 첫 순교자 유해를 230년 만에 찾았다고 보도했다. 그 며칠 뒤 '19세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조범현 한국중앙연구원이 "천주교회를 위해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와 이벽 요한 세례자는 순교자로 부를 수 없는 것인가"라는 의미심장한 글을 예수회 인권연대 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소개했다. 천주교회 언론에 광암 이벽이 한국의 첫 순교자 반열에 등장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면 그 이전까지 한국 천주교 춘천교구(포천은 춘천교구에 포함된다)에서는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져 있을까. 1992년 발간한 '포천 본당 36년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첫 순교자로 김범우 토마스로 기록하고 있다. 2017년 발간한 '철원 성당
'포천좋은신문'은 지금부터 3년 전인 2020년 9월 1일 인터넷 지역 신문으로 창간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9월 1일로 창간 3주년을 맞습니다. 3년 전 코로나가 창궐하던 무더운 여름 내내 혼자서 창간 준비를 했고, 9월 첫날에 독자 여러분 앞에 첫선을 보였던 기억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사이에 벌써 3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포천좋은신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탈하게 창간 3주년을 맞을 수 있도록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많은 분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그중에서도 '포천좋은신문' 애독자들께 특별한 감사를 전합니다. 저는 첫 창간사에 '독자 없는 신문은 있을 수 없고, 독자가 외면한 신문은 존재할 수 없다'고 썼습니다. '포천좋은신문'은 지난 3년간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창간 첫해에는 저 혼자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사이트를 꾸미고, 영업하러 다니느라 어떻게 한 해가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창간 첫 달 매일 300명 정도 접속하던 독자가 매달 100여 명씩 늘어가는 재미로 힘든 줄 모르고 달려왔습니다. 200명에서 300명으로, 400명에서 500명으로, 그리고 800명에서 900명
며칠 전 포천시 모 과장과 취재 중에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과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더욱 정확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서 담당 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걸던 그 과장의 얼굴이 점차 흙빛으로 일그러졌다. 전화를 걸었던 담당 팀장으로부터 "누구시죠?"라는 황당한(?)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과장은 분명히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그런 대답이 나왔다는 것은 담당 팀장이 자기 과장의 전화번호를 아예 입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담당 과장의 전화번호 정도는 입력해 놓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과장 곁에서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보던 기자가 오히려 민망해졌다. 팀장이 이 정도인데 그 밑에 부서원들은 과연 어떨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담당 과장의 전화번호도 모르는 팀장. 같은 부서에서 함께 일을 하면서 담당 과장의 전화번호에 아예 관심이 없는 팀장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만일 긴급한 일이 생겨 담당 과장에게 보고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 팀장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궁금했다. 옆에 있는 다른 동료에게 과장의 전화번호를 물어서 통화를 할까, 혹은 카톡으로 보고할까
포천좋은신문은 2020년 9월 1일 인터넷 신문으로 창간했습니다. 이제는 창간 3주년을 불과 한 달여 남짓 남겨두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던 그 무렵 뜨거웠던 폭염 속에 창간 준비를 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새삼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저는 첫 창간사에 '독자 없는 신문은 있을 수 없고 독자가 외면한 신문은 존재할 수 없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포천좋은신문'에 '좋은 기사'를 많이 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좋은 기사’의 기준을 포천에 도움이 되는 기사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포천시와 포천시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불필요한 기사는 ‘나쁜 기사'라고 단언합니다. '포천좋은신문'이라는 제호는 '포천'이라는 지역 이름과 '좋은'이란 형용사와 '신문'이란 명사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좋은 기사'를 쓰려는 제 뜻과 맞아떨어졌습니다. 이제 기사로는 쓰지 않았던 저의 신문 자랑 좀 하려고 합니다. 지난 7월 11일 포천좋은신문은 하루 동안 5,722명의 독자들이 사이트를 방문한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기록은 2020년 9월 1일 창간 이후 일일 방문객 숫자에 있어서 가장 많은 독자 방문 기록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최대 기록은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