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문학산책

이병찬 교수의 수필 '인연'

대진대 명예교수 · 문학박사

 

 

인연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것 같다. 불행해진 첫사랑이었던 일본인 여성을 만나고 나서 작가가 한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인연들을 만난다. 피천득의 인연처럼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인연도 있고 만나서 좋은 인연도 있다. 만남과 무관한 인연도 있고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불행한 인연도 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이듯 인연 또한 그렇다.

 

어느덧 고희(古稀)에 접어든 지금에야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어떤 인연들이 좋은 인연이었고 어떤 인연들이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이었던가. 지난 시절들이 오래된 흑백영화와 같다. 그것들은 이제 날것처럼 펄떡이며 생생하지도 않다.

 

“인생이란 그리 행복하지도 그리 불행하지도 않다.”

 

'여자의 일생'의 주인공 잔느가 죽은 외동아들 폴이 남긴 손주를 안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읊조린 말이다. 바람둥이 남편은 잔느의 하녀까지 성폭행하여 임신시킨다. 남편은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다 결국 그 남편에게 살해된다. 임신한 잔느는 하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들을 낳는다. 잔느는 외동아들 폴을 성심껏 키우며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남편을 닮은 바람기가 있는 폴은 집을 떠나 세계를 떠돌다 죽는다.

 

폴과 달리 하녀가 낳은 아들은 집안일을 거들며 잔느를 보살핀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우리의 삶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없다. 죽은 폴이 남긴 건 핏덩이 손주다. 폴을 키우며 행복을 느꼈듯 손주를 키우며 잔느는 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리라. 삶이란 그런 거니까.

 

모파상이 본 인생관이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무관하지 않은 말이다.

 

모파상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대들의 삶에 어떤 것이 그리 행복한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이 그리 불행한 것도 아닌가?”

 

뒤돌아보면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다. 삶은 씨줄과 날줄처럼 행복과 불행이 교차한다. 행복하다고 느낀 일이 어느 순간 불행으로 끝을 맺고 불행한 일들이 행복으로 바뀌기도 한다.

 

내 삶에서 어떤 것들이 불행이고 어떤 것들이 행복이었을까. 아들 폴의 죽음은 어머니인 잔느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다. 하지만 아들이 남긴 손주는 폴의 죽음으로 인한 불행을 견디게 만들고 잔느에게 다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준다.

 

가장 가혹한 불행은 아끼던 물건이나 존재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목격하고 느끼는 게 아니라, 불행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착각이고 시간이다. 불행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기간이 길수록 불행은 점점 배가 된다. 마치 사랑이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천천히 살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그런 불행은 불행으로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천천히 자라 자신의 전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장 잔인한 불행이다.

 

“지금 알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산다. 역사에 만약이 없듯 인간사에도 만약은 없고 재방송이나 후편은 더구나 없다. 인생의 정답은 없고 실수 없는 삶도 없다. 사람은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을 지고 산다. 고희에 이른 내가 느끼는 건 살아가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수학 문제보다 더 어려운 게 삶이란 생각이 든다. 크든 작든 불행이 없는 삶이 없듯 행복이 없는 삶 또한 없다.

 

나이 들어 좋은 건 없다고 한다. 생로병사와 더불어 사는 우리에겐 당연한 얘기다. 안정감이나 여유도 건강할 때 얘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을 꼽으라면 삶의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의 축적이라고나 할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간이 가진 삶의 경험이나 지혜가 닥쳐오는 불행이나 실수를 최소한 작게 만드는 데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내가 가진 판단력이나 지혜가 앞으로 남은 내 삶의 실수를 최소화하고 내 행동의 결과가 불행을 최소으로 작게 만들길 바랄 뿐이다.

 

이래저래 쉽게 잠들지 못하는 한여름 열대야의 밤이다.

 

 

 

위천(爲川) 이병찬(李秉讚)

문학박사

대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포천문화원 포천학연구소장

동농이해조선생기념사업회장

종자와시인박물관 운영위원

포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