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가 지금 어떤 치료를 받고 있든지 다음과 같은 생활요법이 꼭 필요하다. 절식과 생채식을 통한 해독, 그 후 곡식과 채식 위주의 소식, 낮에는 햇볕을 쪼이면서 걷기, 밤에 일찍 자고 충분히 휴식하기, 더운물 목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온열요법, 심호흡이나 나체요법과 같은 산소요법, 그리고 병을 보지 말고 이미 다 나았다고 믿고 상상하기, 나아가서 삶의 더 높은 목표를 향하여 도전하기 등이다. 이와 같은 생활요법들은 우리 피를 맑게 해 주고, 그 맑은 피를 전신에 잘 돌게 하여 결과적으로 전신의 세포에 산소를 충분히 공급하게 해 준다 오래전 내가 외과 전문의 시험을 보았을 때 “암에 대한 3대 치료법을 쓰시오”라는 문제가 출제된 일이 있었다. 그 정답은 수술, 항암 요법, 방사선치료였다. 나는 이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과거에 만난 암 환자들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3대 요법만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3대 요법이란 암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암의 결과, 곧 눈에 보이는 암의 증세만을 제거할 뿐 암의 근본 치료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6년 어느 날 중증 간암 환자가 우리 클리닉에 찾아왔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
이 글귀를 반지에 넣으시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승리에 도취한 순간에도 이 글을 보게 되면 전하께서는 자만심을 가라앉히실 수 있을 것이요, 또한 절망 중에도 이 글을 본다면 큰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사울(Saul)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다. 그때가 대략 BC 11세기 초.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막강한 힘을 과시한 사울 왕은 후계자로 다윗(David)을 지목한다.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 이새(Jesse)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새는 교회나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이새의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 나뭇가지에 여호와가 강림한 것이 ‘예수(Jesus)’라고 믿는다. 이새가 아들 덕분에 더 유명해진 일화가 있다. 어린 양치기 다윗이 앙숙인 이웃 나라 필리스티아(Philistia,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의 장수 골리앗을 물리친 이야기다. 대충 불곰 크기의 거인 골리앗의 이마에 돌멩이를 던져 쓰러뜨린 뒤 칼로 목을 베었다고 전한다. 아들 다윗은 이스라엘을 재통일하여 왕이 되고, 다윗의 골리앗 제압은 그리스도의 이스라엘 입성을 예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 그러나 가을은 무엇보다 고독해지는 계절이다. 고독이 병처럼 깊어가는 계절이다. 그리해서 다만 혼자이며 자아를 만나는 계절, 신을 생각하며 하나의 생명에 대해 진실로 겸허하고, 하나의 섭리에 대해 숙연하며, 하나의 죽음에 대해 무상(無常)을 깨닫는 계절이다. 문득 열어젖힌 창밖에 가을이 내린다. 하늘이 투명하다. 우수스이 낙엽이 진다. 한 줄기 바람, 바람이 불어온다. 언뜻 불어오는 바람결에 묻어 있는 가을 냄새. 가을은 이제 우리의 창밖에 와 있다. 햇빛은 깊고 푸르며 한 점 티도 없이 맑다. 한여름 계곡물이 맑다 한들 이만이야 하랴. 차라리 가을 햇빛은 이리 맑아 못내 슬프다. 나는 이런 가을 햇빛 속에서 현기증이 난다. 내 초라한 육신을 가릴 옷 한 자락 남김없이 속속들이 비춰내는 저 깊고 투명한 햇빛-. 가을은 이제 깊을 대로 깊고 익을 대로 익어 있다. 가을은 우리 일상의 번요한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하는 계절이다. 아침, 복잡한 소음으로 빠듯이 짜인 하루가 시작되고 은행으로, 백화점으로, 어두운 사무실 구석으로, 크레졸 냄새가 풍기는 병원으로,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 속으로 부산히 찾아가는 우리들 머리 위로, 눈앞으로 편편이 병든 나뭇잎이 흩날
낱개로 갈라진 마른 마늘쪽들은 새로운 삶을 꿈꾸는 생명체들이다. 여름부터 잠을 잔 마늘은 가을이 지나가도 깨지 않는다. 겨울이 시작되는 늦가을에 농부들은 마늘을 땅속에 심는다. 마늘은 추운 겨울에 땅속에서 얼어 죽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 껍질로 단단히 몸을 싸고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갈 때쯤이면 이번에는 속히 마른 껍질을 벗고 물을 빨아올려 싹틔울 채비를 시작한다. “마늘을 까보셨습니까? 그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한쪽의 마늘에서 나는 자연의 순리를 깨우친다. 삶의 지혜도 함께 배운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생각이 이에 이르면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물론 말 못 하는 마늘이 직접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그건 단지 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마늘을 통해 자연의 순리를 깨달으며 ‘삼라만상이 모두 스승’이라던 선현들의 가르침을 새삼 되새기곤 한다.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이런저런 집안일로 바쁜 집사람이 바싹 마른 마늘 30여 통을 까달라고 갖다 놓았다. 아주 심하게 말라 마늘통들이 부딪히며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다. 내가 집사람을 위해 마늘을 한꺼번에 많이 까거나 빻아 주는 일은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이다. 그것도 마늘이 많
▲존 덴버의 컨츄리 음악 'Take me home country road' 가사 첫 부분에 나오는 가사 '...블루리즈 마운틴 셰난도아 리버..."에도 셰난도아 국립공원의 이름이 등장한다. 미국엔 수백 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사진 한 장만으로도 동공이 확 열릴만한 진기한 풍광으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들이 많지만, 장거리를 불사하고 가볼 만하다기보다는, 자연환경 보존의 목적으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하는 곳들도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자동차로 두세 시간 떨어진 버지니아주, 애팔래치아 산맥 가운데 블루리지 마운트에 위치한 셰난도아는, 사진 한 장으로 먼곳의 방문객을 불러들일 풍광은 없는 국립공원이다. 미국의 자연이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엄한 대자연의 그랜드캐니언, 옐로스토운, 브라이스캐니언 등을, 예전에 서부에서부터 동부로 자동차 타고 이사 오면서 이미 섭렵한 우리에게도, 셰난도아는 경관이 대단할 것은 없는 수준이다. 가볼 만한 곳이 너무 많던, 신묘막측한 풍광이 펼쳐진 칼리포니아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해온 이후엔, 타지에서 손님이 오셔도 마땅히 구경시켜 드릴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10여 년 전 쯤, 한국에서 오신 손님
▲코로나 덕분에 가장 좋았던 것은 야외 콘서트를 진행한 것이다. 야외 콘서트를 몇 번 진행하려다 형편상 진행하지 못했는데, 코로나는 덕분에 실행하기로 했다. 실내보다 실외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아주 짧게 해주세요.” 미장원에 갈 때마다 내가 했던 말이다. 나는 오래도록 짧은 커트 머리였다. 그 이전에는 단발머리였다. 파마를 한 것은 20대 초반에 한 번, 30대 후반에 한 번뿐이었다. 30대 후반에 파마를 하고 그대로 머리를 길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긴 머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때의 사진을 보면 지금도 생소하다. 지금 나는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미장원에 간 것이 꽤 오래됐다. 코로나19 이후, 나는 미장원을 딱 한 번 갔다. 커트 머리가 길어져 더 견딜 수 없을 때 달려갔다. 이렇게 질끈 묶고 얼마를 지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런 상태로 잠시 더 있어 볼 예정이다. 옷도 한 번 사러 가지 않았다. 있는 옷도 많다. 시골에 살면서 옷 욕심은 더욱 없어졌다. 차리고 나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두 벌로 한 계절을 난다. 생필품은 대형마트에 가서 남편이 사 온다. 책방을 하고 있다는 핑계로 나는 통 나가지 않는다. 봄여름 계
조합장은 우리 사회를 옳은 길로 이끄는 지도자급 인사들이 오르는 자리다. 특히 포천에서는 그렇다. 산림조합장이나 농협조합장들, 그리고 축협조합장은 포천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는 훌륭한 분들이다. 그들이 폐기물을 불법으로 처리해 포천 시민의 지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개성인삼조합은 그리고 조합장은 자신의 행동에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창피하고 부끄럽다. 국회의원이라고 뽑아놨더니 국회는 벌써 몇 달째 누구 아들의 군대 휴가 이야기로 날이 새는지 모르고 있다. 해명은 오해가 되고, 또 그 오해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이제는 서로 무엇을 주장하는지도 모르게 됐다. 누구 아들의 군대 휴가 문제가 이렇게 세상을 뒤엎을 일이라도 되는가. 상식으로 판단해도 될 일을 죽기 살기로 물어뜯고 난리를 쳐대니 이제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국민이 오히려 민망하다. 공무원이 월북하다가 북한군에게 총살당해 화형에 처해 졌다는 뉴스로 나라가 또 시끄럽다. 대한민국 군대는 무엇을 하는 군대인가. 그런데도 북한 통치자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이례적 반응’이라며 감읍이라도 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
하버드대학의 심장병 전문의 허버트 벤슨 교수의 《약 없이 고혈압 이겨내기》와, 워싱턴대학의 당뇨병 전문의 닐 버나드 교수의 《약 없이 당뇨병 이겨내기》 등을 통해서 고혈압, 당뇨, 심장병 등이 평생 약을 써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절식, 운동과 휴식, 스트레스 조절과 같은 단순한 생활요법만으로도 완치될 수 있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지낸 유태우 박사의 저서 《질병 완치》의 표지에는 “평생 약을 먹겠는가? 질병을 완치하겠는가?” 라는 부제목이 쓰여 있다. 일평생 약을 먹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많은 환자, 그리고 평생 약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의사들은 이 물음을 놓고 한 번쯤 잘 생각해 보면 좋겠다. 유 박사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몇십 년 동안 많은 환자에게 약을 쓰는 치료를 해 오면서 병이 낫지 않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 왔다. 왜 낫지 않는지 살펴보았더니, 약물치료가 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결과(증상)만 치료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 박사는 “건강진단을 믿지 말라. 병원을 믿지 말라. 병의 원인을 치료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대구의료원 신경외과장을 지낸 황성수 박사의 저서 《고혈
Tara, Home! I’ll go back home!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내 고향, 타라로 가자 결국,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 남북전쟁 이야기를 듣고 자란 미국의 여류작가 마거릿 미첼(Margaret Mitchell)은 1936년 불후의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펴낸다. 그녀의 나이 36살 나던 해이다. 25세의 무명작가가 10여 년에 걸쳐 쓴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미국에서만 150만 부가 팔린 당시 초 베스트셀러다. 역사소설로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한때 이 소설은 미국인에게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영화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타라(Tara)’역을 멋지게 해낸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Scarlett O’Hara)의 덕도 많이 봤다. 이 작품은 1939년 영화로 제작되어 작품, 감독, 여우주연상 등 아카데미 9개 부문의 상을 휩쓸면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 당시에도 한국어 번역판이 나오긴 했지만, 소
참 곱기도 했다. 그 어떤 홍보석보다도 더 굵고 아름다웠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고 여러 개가 무리 지어 뽐내고 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 말고도 몇 사람이 더 그 홍보석들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것은 주택가 담장 밖까지 나와 익어가는 새빨간 석류였다. 가지가 휘어져 늘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이 마치 붉은 꽃다발처럼 느껴졌다. 그 중의 몇 개는 알밤처럼 껍질이 벌어져 속에 있는 석류알들이 루비처럼 보였다.삭막한 서울 도심의 주택가에서 그처럼 귀한 보석들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며칠 전 남산자락의 후암동 주택가를 지나다 그 석류들을 보았다. 그곳은 아직도 일본식 목조가옥들이 많이 남아있다. 남산으로 이어지는 상당히 경사진 주택가의 골목은 매우 좁아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다. 그 경사진 골목길을 지나다 빨간 석류들이 주렁주렁 달린 집을 본 것이다. 넓지 않은 마당에서 자란 석류나무는 수령이 매우 오래된 것 같았다. 밑 둥이 굵은 데다 무성한 가지가 높이 자라 지붕 위까지 뻗어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담장 너머 밖에까지 나와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꽃나무처럼 보였다. 우리나라 기온이 높아지면서 추위에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내 곁을 떠났다. 그때부터 내 안에 든 생각이 있다. 모름지기 나와 인연이 된 모든 이들이 적어도 떠난다는 기미(幾微)만이라도 느낄 수 있는 시간, 이별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은. 나는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을 가지 않는다. 개인 병원이든 종합병원이든 병원에 들어서면, 언제나 온갖 만감이 교차하여 몸과 마음을 어지럽혀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져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친구들 가운데는 유난히 병원 출입이 잦은 친구가 있는데, 나의 이런 병원 기피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빈축을 하는 일이 만만찮게 있다. 10년 전쯤인가, 내가 매우 위태로운 상태(심장 압박)였는데도 병원을 가지 않는 것에 혀를 차던 나의 친구가 그가 다니던 병원에 예약(심혈관 내과)해놓고 갑자기 나를 불러 진료를 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의 의사가 나를 보고 너무 위험하여 당장에 심혈관 시술을 해야 한다 했는데, 그날이 금요일 오후 병원이 끝날 무렵이어서 월요일 오전 입원해 시술 일정을 잡아 스텐트 시술을 한 일이 있다. 그때 한꺼번에 3개를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X-ray 사진을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동농문학’ 제5집을 보기 전까지 이해조 선생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동농이 무엇을 했던 분인지, 또 어느 시대에 살았던 사람인지조차 몰랐으니까. 그러다가 지난 8월쯤인가 대진대 이병찬 교수를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책상 위에 수북이 쌓아놓은 출판을 앞둔 원고 더미를 들춰보다가 동농 이해조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만났다. 동농 이해조 선생-. 지금부터 150여 년 전, 고종 때인 1869년 포천에서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난 이해조 선생은 그 시절에는 드물게 언론인으로 활약했다는 점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소년한반도',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과 ‘매일신보’의 기자로 근무했다. 그는 또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의 첫번째 기자이기도 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손기정의 일장기 말살 사건'을 주도한 현진건이었다. 이해조 선생은 또 1906년 소설 '잠상태'를 발표했고,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 발표한 작품 ‘자유종’을 비롯해 '옥중화', '강상련', '연의 각', '토의 간' 등 40여 편의 신소설을 발표한 작가였다. 이와 함께 포천 최초의 학교라는 청성제일학교를 설립했던 교육자이기도 했던
현대 의학의 많은 의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고혈압이라는 증세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혈압이란 병이 아니고 생체의 자기치료법이다. 피가 맑고 혈관이 깨끗하여 탄력성이 있으면 혈압을 높일 필요가 없을 텐데, 피가 탁해지고 혈관 통로가 좁아지면 어쩔 수 없이 심장과 혈관은 피를 전신에 흐르게 하기 위해 혈압을 높이는 자기치료법을 써야만 한다 현대 서양의학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증세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사나 열, 통증 같은 증세들을 병이라고 생각하니까 이 증세를 없애는 것을 치료라고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설사에는 지사제를, 열이 나면 해열제를, 통증에는 진통제를 쓰는 것과 같은 처치를 당연한 치료법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지만 증세라는 것이 참으로 무엇인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부패한 음식을 먹게 되면 복통이나 구역질, 설사 같은 증세가 나타난다. 설사란 부패한 음식이 위장관으로 들어오면 세균이나 독성으로 우리 몸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그런 부패한 음식물을 빨리 몸 밖으로 배출시켜 우리 몸을 보호하려고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치료법인 것이다. 대부분의 증세란 스스로를 치료하고 있는 과정이므로 그것을 바로 알고 그 증
추위를 견디지 못해 서로 몸을 기대 온기를 나누려 한 고슴도치는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그렇다고 떨어져 있으면 추워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떨어질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을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고 이름 붙였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달라붙어 한 덩어리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의 가시가 동료들을 서로 찌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너무나 아파 곧 흩어지지만,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다시 모여든다. 가시가 서로를 찌르면 금방 흩어졌다가 또 모이고 흩어지고를 반복하다 마침내 그들은 상대방의 가시에 찔리지 않을 적당한 거리를 알아낸 것이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서로 몸을 기대 온기를 나누려 한 고슴도치는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그렇다고 떨어져 있으면 추워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떨어질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을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고 이름 붙였다. 고슴도치들은 결국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최적의 거리(Optimum distance)’를 찾아낸 것이다. 이 과정에
5년 전 내 딸의 결혼식 때 나는 친구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그는 그날 식장에서 반갑게 인사하며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그후 두어 차례 안부 전화가 오갔고, 다른 사람의 길흉사 자리에서 만나곤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의 길흉사엔 성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일일이 부고를 하기가 어려운 흉사와는 달리 결혼식은 꼭 청첩장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청첩장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 그날이 언제인데?” “다음 주일이니 열흘 남았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일종의 서운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에게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중요한 일에 초대할 대상도 안 되는 ‘그저 그렇고 그럴 뿐인 사람’이었단 말인가? 갑자기 오래전 젊었던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그 스쳐 가는 일들 속에 나는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 그때의 나와 오늘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은근히 화가 치민다. 며칠 전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남자들끼리의 모임이었으니 당연히 술잔들이 오갔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날 정말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