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원 칼럼] 살며 생각하며

시간이 주는 가르침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KBS 프로듀서/아나운서

 

시간의 흐름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 같이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유치원에서 생일잔치한다. 난 다섯 살, 그런데 할아버진 몇 살이야?”

오랜만에 만나는 손자의 당돌한 깜짝 질문이다. 얼버무리며 대꾸는 했지만, 나이 예순을 넘겨 마음에 따라 행하면 자연스레 법도에 따르게 된다는 공자님 말씀의 ‘종심 나이’가 되었건만.... 아하, 아직도 벌컥벌컥 화를 내고, 내 감정, 내 것을 주장하니, 제대로 나잇값을 못 하는 것 같다. 순진무구한 손자 아이는 다섯 살 나이답게 티끌 없이 맑다.

 

국어에는 연령대를 이르는 어휘(약관이니 불혹이니 이순이니 하는)가 다양하다. 그 말에는 생각, 행위를 제대로 하며 살아야 한다는 선현의 가르침과 지혜가 담겨 있다. 생각, 언행이나 얼굴 모습 속에는 살아온 세월, 지나온 시간, 삶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모두는 그 사람이 나잇값을 제대로 하는지를 대변한다.

 

일생이란, 삶이란 생명의 고향, 영혼과 정신의 심연에서 발원하여 지구라는 이승의 공간에서 시내처럼 흐르는 시간과 함께 인연에 따라 행위를 하고 사고를 하다 다시 심연의 바다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탄생의 순간부터 주어진 시간에 따라 삶을 살아갑니다. 흐르는 절대적 시간 속에서 시시때때로 주요한 사고를 하여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위를 하며.

 

내게 주어지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유럽의 조각, 벽화 등에 한 손에는 낫을, 다른 한 손에는 모래시계를 들고 어깨에 날개가 나 있는 노인을 볼 수 있다. 그가 바로 절대적인 시간의 신 형상이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모든 생명체를 파괴하는 상징을 낫과 모래시계로 형상한 것이란다. 영원을 사는 신에게는 시간이 의미가 없겠으나,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는 시간에 따라 생명이 피어나고 사라지기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반면에 절대적으로 흐르는 그와 같은 시간 속에서 그와 수직선으로 만나는 점, 예를 들면 한 시점, 기간으로서 시간이 있다. 소위 기회, 찬스, 때 등으로 표현되는 특수한 시간, 시각이다. 이 같은 시간의 개념은 절대적 시간 속에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는 주관적 시간이다.

 

사랑에 빠지는 시간, 열정과 몰입의 순간, 인생에 있어 반전의 기회 등으로 표현되는, 선택과 느낌이 있는 시간이다. 이를 주재하는 신의 조각상이나 그림은 온몸이 벌거벗은 모습이다. 무성한 앞머리, 대머리의 뒷머리, 어깨와 발목에는 날개가 달린 기괴한 형상으로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독일의 시인 실러는 시간의 신 형상에 착안하여 말한다. 시간의 흐름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 같이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고.

 

물리적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는 한 인간에게 시시각각 다가오는 기회, 찬스, 좋은 때 등이 있습니다. 모두 그것을 어떻게 선택하고 붙잡아야 하나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바로 이 사람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요?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고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지금의 시간은 다신 돌아오지 않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천 길 낭떠러지 험한 벼랑을 돌아 계속 올라야 하는 위험천만의 잔도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다른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오로지 잔도를 따라 오르는 앞사람의 발과 등에 집중하며 오르는 바로 지금의 행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절대 되돌아갈 수는 없다.

 

삶은 잔도 등반과 유사합니다. 그러니 인간은 지금 현재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과거에 대하여 과하게 후회하거나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하여 과하게 기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매일, 아침이면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밤새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힘차게 기운을 솟구쳐 오늘을 계획하고, 구상하며 정신을 가다듬어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존하고 살아가야 하고 그것이 제일 중요하기에 그렇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후회가 없겠지요.

 

과거, 현재, 미래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한자 고사성어가 있다. 옛것을 연구하여 새로운 것을 안다는 뜻이다. 정지한 과거라도 의미가 있다. 지금이 아무리 제일 중요하더라도 미래를 지향하며 지금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누가 말했는지에 관해서는 설이 많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하는 세계적 명언이 생각난다.

 

그러나 과거와 지금, 미래와 지금에 관해서 경계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박노해 시인의 ‘경계’하는 시구를 소개한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지 말 것. 미래를 말하며 과거를 묻어버리거나 미래를 내세워 오늘 할 일을 미루지 말 것.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시구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그러한 행위를 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이 있듯 일은 하지 않고 좋은 결과만 바라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과 내 앞의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게으른데 탐욕이 큰 것이 문제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재물, 자리, 명예를 탐하는 것이 그렇다.

 

사람에 있어 게으름과 탐욕은 쇠에 있어서 녹이 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행동과 마음을 바르고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게으름과 탐욕은 마음과 육신을 망치는 원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쇠붙이가 변화하여 생긴 녹은 점점 더 심하게 슬어 쇠붙이 전체를 부식시킬 수 있다. 사람의 마음에서 생기는 게으름과 탐욕은 사람 전부를 망가뜨리고 타락시킨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듯이 부지런한 사람은 마음과 육신이 녹슬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주장하는 세력이 항상 다툽니다. 부지런한 마음은 성실을 주장하나 게으른 마음은 불성실과 탐욕, 쾌락을 주장합니다. 나는 지금 그 중 어느 주장의 편을 드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불가실(時不可失)을 아십니까?

어떤 일을 해야 할 좋은 때, 소위 기회는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신화에서 나온 교육학 효과 이론‘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라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있다. 긍정적인 기대나 관심이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효과를 말한다. 일이 잘 풀릴 것으로 기대하면 잘 풀리고, 안 풀릴 것으로 기대하면 안 풀리는 경우를 모두 포괄하는 자기충족적 예언과 같은 말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우리 속담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렇게 신과 하늘이 도와 이루어질 좋은 기회를 한순간의 잘못으로 시불가실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꼭 소원하고 성취해야 하는 바가 있다면 높은 집중력과 결단력을 발휘하고 노력하여 ‘좋은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할 것입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회와 준비가 함께 해야 성취하는 행운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빨리 걸어야 할 때는 걷는 일이 제일 중요합니다. 불면증 환자는 자야 할 때는 자야 건강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꼭 어떤 일을 해야 함에도, 그와 관계없는 일을 하다, 정작 중요한 그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 자신에 이롭지 않은 행위를 멈추지 못하는 행위 역시 시불가실이 아닌지요?

 

 

서재원 교수

. 창수초등학교, 포천중, 포천일고, 서울대 졸업

. 한국방송 KBS 편성국장, 편성센터장(편성책임자)

. 차의과학대학교 교양교육원장, 부총장

. 포천중.일고 총동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