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이나물이 새순을 티웠다

시인 임후남은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사, 웅진씽크빅 등에서 글을 쓰고 책을 만들었다. 2018년부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서 시골책방 '생각을담는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시골책방입니다', '아들과 클래식을 듣다', '아이와 여행하다 놀다 공부하다', '아이와 길을 걷다 제주올레'가 있고, 시집 '내 몸에 길 하나 생긴 후'가 있다.

 

지난해 심은 명이나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이것들이 불쑥불쑥 사방에서 튀어나와 있는 걸 발견했다. 가까이 있어 매일 들여다보면서 싹을 기다리는 것들은 쉽게 모습을 안 드러내는데, 오히려 잊고 있던 이것들은 쑥 자라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신통방통한 명이나물 새순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이렇게 불쑥 새순을 내민 명이나물을 보고 문득 어젯밤 아들과 했던 대화가 생각났다. 몇 마디 재촉하는 말을 했더니 아들은 믿고 기다리세요, 그래야 제가 스스로 성장하지요, 라고 말했다. 자식과의 관계야말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 쉽지 않다. 눈에 빤히 보이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집 자식들과 비교를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보지 않는 게 상책이다. 보지 않고 있다 보면 명이나물이 이렇게 쑥 새순을 내밀듯 달라진, 그래서 성장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듯 몇 마디 재촉하게 된 배경에는 사실 이유가 있다. 가까운 이가 아들 앞에서 아들 걱정을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황당해하는 아들 앞에서 처음에는 너를 생각해서 그런 거야, 라고 말했다. 계속 봐야 할 사람이라 안 좋은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음악 한 곡을 들어도, 산책 해도,

옷 한 벌을 사도, 그리고 책을 한 권 읽어도 모두 다르다.

누구도 나와 같을 수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나의 아들도 그렇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더욱이 다른 이들에게는 더더욱.

나는 내 삶을 살아야지. 그게 최선이다.

 

 

그러나 아들이 서운해하고, 사리 분별을 못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해서 나중에는 맞장구치며 그의 오지랖에 관해 이야기하고 웃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화가 났다. 아니, 왜 남의 아들을 걱정하고 난리야. 결국 그 화는 잔소리로 이어지고 말았다.

 

부모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한 아이의 엄마이기 전에 나는 한 사람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한 사람이다. 내 삶을 잘 살아내야 할 의무가 있고, 나만의 삶을 살아낼 권리가 있다. 내 삶이 뿌리를 내리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쉽지 않다. 정답이 없다. 사는 일이므로.

 

엄마 역할 역시 어렵고 정답이 없다. 특히 아이가 어렸을 때는 주변 '엄마들' 이야기는 너무나 정답 같은 게 많다. 왜 그렇게 '엄마들'은 아는 것이 많을까. 한 개인인 '엄마'는 '엄마들' 속으로 들어가 권력이 되기도 한다. 소위 '강남 엄마들'뿐만 아니다. 어디든 아이들이 있으면 '엄마들'이 있고, '엄마들' 집단은 만들어진다.

 

'엄마들' 속에서 떠나와 한 사람으로 오롯이 섰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가끔 궁금한 경우도 있었다. 돌아가신 엄마는 나를 믿고 살았다. 술에 취해 간신히 새벽에 귀가했던 날, 엄마는 말했다.

"새벽기도 갔다 오는데 젊은 여자애가 취해서 길거리에서 토하고 있더만."

 

물론 엄마가 본 그 젊은 여자애는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나의 모습이었다. 엄마한테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술을 끊지는 않았다. 그 후로도 나는 오래 취했고, 지금도 간간히 술을 마신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당신 생각에 조금 잘난 자식은 앞세워 자랑도 하고, 조금 허물이 있는 자식은 탓도 했지만, 그 자식들이 나이 든 지금은 다 각자의 몫으로 살아가고 있다.

 

자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는 말은 정답이다. '뜻'을 생각하면 더더욱 정답이다. 모든 부모의 '뜻'은 모두 같을 것이고, 그렇다면 세상은 모두 공부 잘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하고, 행복해야 할 테니까. 이 밝고 바른 사회는 마치 AI 영화 속 같기만 하다.

 

자식은 성장하고, 떠난다. 결국 다시 나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떤 삶을 지향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음악 한 곡을 들어도, 산책 해도, 옷 한 벌을 사도, 그리고 책을 한 권 읽어도 모두 다르다. 누구도 나와 같을 수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나의 아들도 그렇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더욱이 다른 이들에게는 더더욱. 나는 내 삶을 살아야지. 그게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