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행복이 있는 곳

필자 석인호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1974년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TBC 방송기자, 중앙일보 싱가포르 특파원,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장 등을 거쳤다. 국정홍보처 국정브리핑팀 위원과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2014년 '좋은수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아침해는 희망을 줍니다.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솟는 해는 아름답습니다. 도시의 건물 사이로 치솟는 해님이 내뿜는 찬란한 광채가 뜨겁게 느껴집니다. 유리알처럼 파란 하늘로 뻗은 가느다란 가지에 조롱조롱 달린 앙증맞은 새빨간 열매들이 귀엽습니다.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꽃이 아침 햇살을 머금고 목화송이처럼 다시 하얗게 피었습니다. 시시각각 색깔을 달리하는 하늘의 변화는 경이롭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힘들고 사람들의 각종 추태가 보기 싫지만, 자연은 변함없이 아름답습니다. 날마다 바라보는 똑같은 자연이지만 느낌은 항상 다르게 다가옵니다. 때로는 붉게, 다른 때는 푸르게, 또 다른 날엔 희거나 검게 변하는 하늘도 신비롭습니다. 앙상한 모습으로 추위에 떨며 겨울을 나고 있는 나무들도 예쁩니다. 다가올 여름의 무성한 푸름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아침햇살을 받아 목화꽃처럼 핀 억새와 이름모를 빨간 열매가 겨울추위를 녹여줍니다.

 

정말 오랜만에 겨울다운 추위가 찾아온 새해 벽두입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가 잠시 잊고 있었던 동장군의 건재를 알리는 아침입니다.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솟는 해가 장엄합니다. 그 해가 솟기 전부터 솟은 후까지 붉은빛을 감싼 채 온 하늘을 장식하던 구름은 따사롭게 보입니다. 외벽을 모두 유리창으로 장식한 고층 건물들이 불기둥처럼 붉은 햇살로 온몸을 태우며 추운 겨울 아침을 데우고 있습니다.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들 사이를 비집고 붉은 아침햇살이 퍼집니다. 그 햇살 중 일부가 연못의 얼음을 붉게 가르며 즐거움을 줍니다. 솟는 해를 등지고 서면 명경보다 더 파란 서쪽 하늘엔 보름 지난 지 며칠 된 하현달이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잎을 다 떠나보낸 나무의 가지들이 추위에 떠는 달과 아침 인사를 나누는가 봅니다.

 

▲추위에 떨며 밤을 새운 하늘의 달님에게 나무가지가 아침인사를 합니다.

 

거의 매일 아침 만나는 이 풍경들이 저에게는 가장 정겹고 친한 벗들입니다. 얼핏 보면 그냥 자연물이고 감정 표현 없는 무심한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시간이 가고 계절이 바뀌면 형상과 색깔이 변합니다. 비록 말 못 하는 무심한 물체들이지만 저는 이들에게서 감정을 느끼고 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나만의 교감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이름과 늦음도 탓하지 않습니다. 그저 만나면 반갑다는 아우성이 느껴집니다. 어떤 날엔 푸르거나 시원하게, 또 다른 날엔 노랗거나 따뜻한 느낌으로 맞아 줍니다. 저도 그들을 향해 손짓발짓에다 몸짓까지 더해 화답합니다. 맑았거나 흐렸거나 비바람 치는 날이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와 그들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 걷고, 달리고, 생각을 나눕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가 잠시 잊고 있었던 동장군의 건재를 알리는 아침입니다.


눈이 내리면 하얀 눈을 소복이 안은 그들이 나를 어서 오라고 부릅니다. 와서 같이 놀고 예쁜 모습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 같습니다. 장맛비 거세게 퍼부을 땐 서로 끌어안은 채 빗줄기를 가려주며 들어오라고 합니다. 뙤약볕 쏟아지면 시원한 그늘로 안내하고 설한풍 몰아치는 겨울날엔 믿음직한 굵은 둥치와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한 가지들로 막아줍니다. 그들에게 나는 마음의 정 가득 담은 눈빛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말 없는 이 친구들이 좋아 나는 틈나는 대로 찾아가서 걷고, 달리고, 이야기 나눕니다. 그 순간엔 살을 에는 추위도 따뜻하게 됩니다. 못된 인간들이 연출하는 온갖 증오나 추악함도 거기엔 범접하지 못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과 이야기하기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장엄하게 세상을 물들이며 솟는 아침 해도 맞이해야 합니다.

 

 

▲한겨울의 추위를 녹여주는 겨울안개가 포근히 내려앉은 아침입니다.

 

온 세상을 화사하게 물들일 각종 꽃이나 잘 차려입은 여자들처럼 무성한 잎들의 반짝이는 향연도 지켜봐야 합니다. 티 하나 없이 맑은 하늘도 빼놓을 수 없는 친구이지요. 그 파란 하늘이 수시로 그려내는 변화무쌍한 그림들도 예쁘답니다.

 

영하17도의 맹추위가 몰아치는 아침이지만 저는 오늘도 달려 나갑니다. 맹추위를 못 느끼게 하는 그들이 좋아서 새벽을 달립니다. 내 친구들이 지르는 즐거운 함성이 가득한 곳, 거기엔 나의 행복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