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재(1940~2020)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경기 포천시 한 농촌의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주부셨습니다. 그러나 아들딸의 도회지 유학비와 생활비 송금을 위해 아버지가 농협에 다니시던 중 과로사하시면서 험난한 가시밭길이 시작됐습니다.
아버지 생전에는 시조모, 시어머니, 1남 4녀 등 9명의 대식구였습니다. 밥상도 두 개나 차려야 했고 세탁기가 없던 시절이라 거의 매일 빨래를 한 광주리 머리에 이고 집 뒤편 개울에서 세탁하느라 손은 항상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어쩌다가 돼지 불고기나 도루묵구이라도 하는 날은 연탄 아궁이에서 나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고도 막상 어머니는 몇 점 드시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요리 솜씨는 온 동네에 자자했습니다. 잡채, 두부 같은 명절 음식의 추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침이 고입니다. 농사 뒷바라지와 돼지, 닭을 키우며 밭일까지 도맡아 하시다가 농한기에는 자식들 스웨터, 바지 등을 모두 뜨개질로 떠서 입히셨습니다.
갓 마흔에 아버지가 떠나시자 그야말로 초인적인 모성애로 자식들을 키우셨습니다. 양계장을 하실 때는 수십 번 넘어지면서 오토바이를 배우시느라 밤새 끙끙 앓기도 하셨고, 서울서 식당을 하실 때는 식재료값을 절약하기 위해 운전면허증까지 따 승용차를 몰고 다니셔서 자식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신 어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창경궁 등 서울 구경을 처음 시켜주셨는데, 정작 당신은 서른여덟 살이 돼서야 바다를 처음 보셨다고 해서 제 가슴을 아리게 했습니다.
근면, 끈기, 자존심과 당당함을 생활철학으로 갖고 계신 어머니는 딸들에게는 대학 입학금만 내주고 나머지는 아르바이트로 해결하도록 해 자립심을 키워주셨고 손주들에게는 생일 때마다 용돈도 보내주시고 축하 메시지도 꼭 챙기는 정 많은 할머니였습니다.
한번은 어느 손주가 ‘ice cream(아이스크림)’을 어떻게 읽느냐고 묻자 그때부터 영어 공부도 하셨습니다. 그런 가르침의 영향인지 미국 MIT와 와튼스쿨을 졸업한 외손주는 코로나 와중에 급히 미국에서 달려와 할머니 영정을 모시는 효심을 발휘했습니다.
컴퓨터를 배워서 인터넷뱅킹도 하시고 매일 신문을 통독해 정치적 식견과 세상 변화에 대한 통찰력도 뛰어나셨던 어머니. 어느 정도 노후자금을 마련하신 후에는 집에서 꽃도 많이 키우면서 낭만 소녀로 살고 싶어 하셨는데 젊은 시절 고생의 후유증과 만성 통증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
제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자 아픈 다리를 끌고 지역구 곳곳을 다니셔서 결국 저를 당선 시켜 주셨는데 제게는 힘든 정치 빨리 그만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이별은 슬프지만 견디기 힘든 통증으로 고통받던 어머니를 먼저 보내드린 것은 축복인 것 같습니다. 고통 없는 하늘나라에서 영면하세요! 사랑합니다!
아들 박종희(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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