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문학산책

김순희 시인의 수필 '나의 사랑, 구절초꽃'

포천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정회원

 

가냘픈 몸매 때문에 바람이 불어올라치면 하늘하늘 춤추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 풋풋한 향기조차 코에 익숙한 풀 내음이라 정신이 맑아진다. 마냥 티 없이 맑고 순수한 구절초꽃은 내 마음에 영 순위 사랑이다.

 

'가을은 두 번째 봄'이라는 멋진 글귀가 아니어도 우리는 봄처럼 설레며 가을 한복판에 서 있다. 구월은 꽃 천지다. 소녀처럼 맑고 순수한 눈빛으로 꽃을 따라 걷고 또 걸어도 지치지 않는 가을은 그렇게 우리를 설레게 하며 달려오니, 분명 '두 번째 봄‘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가을이면 꽃을 따라 바삐 움직이는 나에게 구절초꽃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그리움이다. 지금처럼 전국적으로 꽃 명소가 없었던 시절, 교외로 나가니 예쁜 카페 입구에 새하얀 꽃들이 반갑게 맞이하길래 망설임 하나 없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 풀꽃 하나에 힘들었던 일상은 금세 잊고 마음속엔 별처럼 빛나는 순수의 꽃 생각으로 가득 찼다.

 

더구나 뒤꼍엔 하늘의 별들을 다 모아놓은 듯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으니, 카메라를 따로 준비해 가지 못한 것이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이름도 모르고 만난 구절초였지만, 이미 흐드러지게 핀 그 꽃이 이삼일 안에 다 지지는 않을까 밤새 노심초사하다가 다음 날 다시 구절초를 찾아갔다. 그렇게라도 카메라에 담아두면 두고두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노선버스를 타고 가는 수고로움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찍은 구절초 사진은 볼 때마다 행복한, 내가 나에게 보내는 칭찬 1호가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컴퓨터 바탕 화면에서 환하게 웃는 이십 년 전의 구절초꽃은 사계절을 내내 그렇게 나의 사랑이 되었다. 언제나 그 시간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가는 나만의 오붓한 추억의 꽃이니 어느덧 이십년지기 든든한 마음의 벗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나에게도 은퇴의 시간이 다가왔다. 은퇴하면 무엇을 하겠냐고 묻는 지인들에게 음악, 미술, 체육을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오페라 곡과 가곡을 특히 좋아하고 간간이 연주할 수 있는 우쿨렐레와 오카리나 연주를 즐기는 것이 음악이요, 미술은 오랜 로망이었던 유화나 수채화를 그리는 것이었으니까 명화를 따라 색칠한 그림이 스무 점을 훌쩍 넘었다. 그런데 체육이 문제였다. 낡은 몸으로 무엇을 어찌할지 난감했으니까.... 하지만 가을엔 달랐다. 전국 각지의 꽃 명소를 찾아다니는 기쁨에 허리 어깨 무릎 발의 고통은 까마득히 잊게 되는 것이다.

 

구월이 열리면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꽃 축제에 다녀온다. 세상에 예쁘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한나절을 걷고 걸어도 눈 호강은 끝이 없는데 그중에서도 구절초는 언제 어디서나 보고 또 봐도 늘 청초한 것이 마음에 든다.

 

뜨겁던 열기가 하강하기 시작하는 가을 아침이면, 별 총총한 눈빛과 엉성한 듯 가지런한 하얀 꽃잎이 보자마자 순수한 웃음을 보낸다. 덩달아 환한 웃음을 짓는 나는 구절초 여인임이 확실하다. 꽃밭에서 그들은 흐드러지게 웃다가 더러는 쓰러져 하늘을 보며 웃는다. 어쩌다 비를 맞아도 얼굴 찌푸리는 법이 없으니 심성 하나는 탓할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가냘픈 몸매 때문에 바람이 불어올라치면 하늘하늘 춤추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녀, 풋풋한 향기조차 코에 익숙한 풀 내음이라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군락으로 피어있는 구절초는 서로 의지하고 함께 모여 은하수 군단이 되는 것이다. 멀리서도 하얗게 빛나는 견우와 직녀의 오작교가 생각나 내심 이루어질 사랑을 기대하며 혼자 피식 웃는다.

 

가끔 혼자이고 싶을 땐 포천 국립수목원 길에 피는 구절초꽃을 만나는 것이 좋았다. 나무와 풀들이 가을에 물들어 갈 때, 저만치 혼자서 웃는 한 포기 구절초는 초록 세계에서 유난히 더 빛이 난다. 빨주노초파남보 화려한 무지개는 아니지만, 햇빛이 시드는 저녁 무렵 어스름 그림자에 싸일 땐 더없이 청초하다. 흡사 고요한 강물처럼 흘러와 내 마음마저 하얗게 씻어주는 조용한 구절초꽃의 고운 품성이 정말 마음에 든다.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해바라기와 장미의 강렬한 빛깔과, 무지개 시루떡 같은 맨드라미꽃들이 아름다운 구월의 꽃 누리를 만끽하면서 하루 종일 찍은 사진을 넘기다 보면, 그래도 남는 별꽃에 눈길이 머문다.

 

정열적이고 화려한 감성은 순간에 지나가고 구절초처럼 담백한 마음을 오래 기억하게 되는 건 나이 탓일까? 구절초꽃은 나에게 꽃 중의 꽃이요, 별꽃 우상이며, 오랫동안 마음을 나눈 이십년지기 친구인 것이다.

 

마냥 티 없이 맑고 순수한 구절초꽃은 내 마음에 영 순위 사랑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수많은 꽃을 만날지라도 변함이 없을 테니까....

 

 

 

김순희 시인

∙아호 혜송(慧松)

∙포천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정회원

∙경기문인협회, 한국작가 정회원, 스토리문학 정회원

∙한국문인협회·순수문학 동인, 한국작가 동인, 문학공원 동인

∙한국작가 詩부문 신인상, 수필 부문 신인상

∙스토리문학 수필 신인상

∙성균관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 (석사)

∙초등교사 35년 재직, 옥조근정훈장(대한민국) 수훈

∙시의 사계(한국문협), 스토리 문학, 순수문학, 경기문학, 포천문학, 포천문예대학작품집, 포천신문, 포천소식지 등에 시, 수필 다수 발표

∙포천문인협회 시화전 참여

포천예총삼색어울림전/ 물골연등제/ 구절초거리 시화전

고모리호수 시화전

∙면암문화제 시낭송회 참여

시집 『클림트의 겨울 숲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