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문학산책

시인 하은의 詩 '보름밤' 외 2편

시인·수필가, 한국문인협회포천시지부 이사

 

 

보름밤

 

 

사는 건 늘 그래

조금 올라갔나 싶으면 다시

곱절로 내려가는 생

나만 그러하겠나 어디

가속 붙는 내리막길은 누구나

반기지 않아도 맞닥뜨리게 되어있지

사돈댁 바깥양반이

출가한 딸에게 예전 물려준 빚

돌고 돌아 내 발목 잡았어도 그만이네

며느리는 애당초 죄가 없던 것이다

신용이 불량이라고 남들이 애써 전해도

네 신용은 우리가 보증하면 그뿐

신용 찾아 살만해진 게 언제 적 얘기라고

그새 짐 다시 지게 되어 딱했는지

보름달 기운 빌어 품 넉넉하게 채우라

친구가 덕담을 건네주더라

순전하게 어제 아침처럼 웃다 보면

세상 굉음 견딜 수도 있지 않겠나

만취한 달 쉼 없이 굴러간다.

 

 

풀각시

 

 

어제 정답게 나누던 말이

오늘 비수가 되어 찔렀어도 그냥

그녀의 단 몇 마디에

한 줌 머릿속 첩첩 쟁여온

배움을 전부 비웠대도 다만 그냥

너를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으나

지금 네 사랑과 내 사랑은 무용지물

서로를 잃는 것은

춥고 떨리고 배고픈 일이지만

태양이 머리 위를 지나도 그만

비 내려도 이제는 그만이다

안개처럼 지우고 하얗게 덮고

나는 나로 너는 너로 살면 그뿐

꽃잎 밟고 서성이는 야속한 발자국에

봉숭아꽃잎처럼 으스러진 풀각시

빈 들에서 홀로

바람 따라 울다가 웃다가

시든 하루 끌어안고 엎드렸다.

 

 

말자씨

 

 

시들어 떨어진 잎은

가지에 다시 매달아도 소용없다

이별 그 후

만나자는 마뜩잖은 기별

시한 지난 인연은 식어버린 불이다

살 비비며 숨 쉬고 먹고 잠잘 때

죽도록 사랑했어야 하는 거다

이익 좇는 눈과 혀를 버렸어야지

먼지 털어 잘 사용할 듯

계산하는 심정이야 간절하겠지만

손안에 들면 다시 밀어낼 건 뻔한 수순

깨진 그릇은 붙여 사용하지 않는 법이다

꺾어진 골목 끝처럼 예측할 수 없는 사람

한밤중 닮은 자는 절대 피할 일이지

언덕배기 묵정밭 고달파도

첩첩산중 홀로 거두며 사는 게 답이다

햇살에도 속지 말자

호미 쥔 손에 힘주는 말자씨.

 

 

하 은 프로필

시인·수필가

계간 스토리문학 편집위원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포천시지부 이사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회원

시섬문인협회 이사

현대문학사조문인협회 회원

문학공원 동인

메일 : haeun5709@daum.net

 

시집

『달맞이꽃』

『다시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