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미대륙 횡단여행기-다섯 번째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Day-8, 티탄 국립공원의 하이라이트 'Inspiration point' 

 

티탄 국립공원의 하이라이트 중에서도 꼭짓점은 Inspiration point라고 불리는 조망지점이다. 캠프에서 만난 청년이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디즈니랜드처럼 바글거린다고 알려주어 일찍 출발했다.  제니 호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하여, 어제는 발품으로 간 길을 오늘은 배로 건너니 순식간이다. 오늘의 목적지까지는 호수 건너편 선착장에서 1.2마일(2km) 떨어진 곳이라고 하여 30분 정도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길이 가팔라서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오르는 길목 그늘마다 가다가 쉬고 있는 관광객들이 자리하고 있다. 

 

목적지에 가까워져 오는 지점에서 부모와 아들, 그리고 할아버지로 구성된듯한 한 가족을 만났다. 앞을 보지 못하는 10대 후반 정도의 손주가 할아버지 바로 뒤에서 할아버지의 한쪽 어깨에 자기 손을 얹고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할아버지는 손주에게 지형물을 설명하며 친절히 천천히 걷는다.

 

여기서 나는, inspiration point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충분히 inspire(감동) 되고 있다고 느낀다. 가족의 의미, 인내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포용(embracing)의 진정한 의미들을 생각하게 한다. 앞이 안 보이는 가족의 일원과 같이하는 불편함을 덮어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빚어내는, 사랑의 본질 중의 하나인 인내의 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감사하고 기쁠 수 있다는 소망과 약속을 본다.   

 

곧이어 나타난 목적지,  Inspiration point라 불리는 지점.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360도 파노라마 비경이 거기 있었다. 앞 못 보는 손주에게 할아버지가 도란거리며, 영어로 그 경치를 설명해 주던데, 나의 카메라 렌즈로도, 자판 찍는 손가락으로도 그 경치를 설명할 순 없을 것 같다. 감성을 넘어 영혼을 울린다는 뜻, Inspiration. '아, 멋있다...'는 감성이고, 이 경치는 바라보는 영혼까지 깊숙한 울림을 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영성은 자연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과의 연결점이 아닌가. 그림 같은 호수 건너 파인 숲 뒤로 광대하게 펼쳐진 야생화와 sage brush가 카펫처럼 펼쳐진 초원, 병풍처럼 그 뒤를 둘러싼 산. 높이 올라가서 보는 걸, bird eye view라고 하는데,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스케일과 놀라운 솜씨와 전능자의 경륜을 더듬어 보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Inspiration point. 경이로운 조망이 사진으로는 표현이 안 된다. 

 

고산 동물인 marmot도 만나고, 사냥에 성공한 여우가 먹이를 물고 유유자적 걸어가는 곳. 온종일 앉아 있고 싶지만, 청년의 말대로 디즈니랜드 같은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하여, 야생화들과 용맹하게 솟구쳐 있는 바위 봉우리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며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나온다. 

 

이 동네 침엽수림은 내가 크리스마스트리로 늘 선택하는, 바늘이 짧고 보드랍고 향기가 짙은 Douglas fir가 주를 이룬다. 매년 크리스마스트리를 애들과 같이 가서 심사숙고하며 골라서 차 위에 얹어서 실어 오던 순간들과, 작은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다양한 장식을 걸던 아이들의 모습이 스친다. 한 번밖에 없던 날들을, 힘들게만 보내버리고 말았다는 아쉬움. 그래도 inspiration point에서 내려오는데, 내 몸이 내 영혼이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선착장에서 가까운 곳에는 빙하가 녹아 흐르는 Hidden fall이라고 불리는 폭포가 있었다. 지구 온난화로 점차 줄고 있는 빙하가 콸콸 쏟아지며 아름다운 경치를 만든다. 

 

▲빙하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는 Hidden fall.

 

오늘은 오전 산행을 마친 후, 캠프에서 집에서부터 가져온 고기를 장작불에 구워서 보관하기로 한다. 여행 중에 호텔 조식을 먹고 외식을 많이 하다 보니 육식동물이 된 듯한데,  장작불에 구운 갈비 먹을 생각을 하니 지치지 않는 식욕이 너울댄다. 여유롭게 호수가 보이는 캠프를 즐기며 화창한 오후를 보내도 좋을듯하다.

 

▲호텔 로비에서 마음껏 즐겨도 되는 경관.

 

유명한 관광지만 콕콕 찍고 지나가는 여행이 아닌,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여행의 장점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이곳에서 푹 쉬는 날도 즐길 수 있다는 거다. 70도의 화창한 날씨에 호수가 보이는 우리 집에서 게으르게 뒹굴뒹굴해보기, 해먹에 누워 책을 읽기 딱 좋은 날씨지만 집에서부터 얼린 채 싣고 온 7파운드 갈비를 구워서 보관해야 할 거 같은 날씨이기도 하다. 시원한 맥주랑 금방 구워진 고기로 거나한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호수에서 부는 바람을 음미하며 휴식을 취한다.  

 

식곤증으로 인한 나른함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체력소모가 필요 없는 오후 활동으로 근처의 역사탐방을 하러 간다. 국립공원으로 흡수되기 전의, 사람 살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수많은 책을 쓴 John Grisham의 작품 중 내가 제일 짜릿하게 읽은 책, Painted house(하얀 집)를 연상케 하는 집이 보인다.  

 

심술쟁이 욕쟁이였다는 아저씨의 General store(잡화점, 구멍가게)였다고 한다. 1900년 초에 여기서 점방을 운영하면서 강을 건너는 ferry를 만들어서 수입 올린 아저씨, 형편이 좋았는지, 그 당시 부의 상징인, 페인트칠한 집/점포를 소유했다. 주상복합 점포에 달린 주거공간은 나름대로 감각 있게 어우러진 데코로 정돈되어 있다. Outhouse라고 불리는 재래식 화장실은, 나무로 된 좌식 변기 아래 강이 흘러서 나름 수세식이다. 

 

▲나루터 점방.

 

▲수세식 화장실, Outhouse.

 

크기로 봐서 부잣집으로 보이는 통나무집은 이 동네 유지들과 티탄을 국립공원화하는데 공을 세운 Albright가 만나,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도원결의 미팅을 한 장소로 기념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기부하고 뜻을 같이하여, 오늘의 티탄 국립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원결의로 국립공원이 가능하게 된 미팅 장소였던 통나무집.

 

1925년에 지어진 성공회 교회당도 탐방해본다. 통나무로 지은 예배당 뒤로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둘러싸여 있다. 강대상 뒤 채플의 정면엔 통나무 십자가를 세웠고, Grand Teton이 한눈에 보이는 창문이 아름다운 자연을 펼친다. 아직도 주일마다 예배가 있고, 교회 앞에서 아름다운 신랑 신부가 wedding 촬영도 하고 있다. 

 

예배당의 통나무 의자와 나무 창살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며, 우리에게 안락한 라운지와 와이파이 제공하는 호텔 포함 이 동네의 rustic interior의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이, wild Wyoming의 위용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매일 찬탄하고 있다.

 

▲통나무 십자가와 티탄이 보이는 예배당의 전면.

 

▲오래된 예배당의 통나무 의자.

 

Day-9, 경이로운 자연 

 

오늘은 Signal mountain의 일출을 보기로 한다. 언제부턴가 아침에 시간 맞춰서 기상할 일이 있으면 하찮은 일이라도 밤에 숙면을 못 한다. 일출 못 본다고 야단칠 사람 없건만 4시쯤부터 잠이 안 온다.

 

예보된 일출 시간 5시 55분에 맞춰서 산으로 운전해 가는 길, 도로 한가운데서 뒹굴뒹굴하며 놀고 있는 Grizzly bear(회색곰) 2년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애들 둘을 만났다. 헤드라이트 비췄으니 깜짝 놀라 숲으로 도망가야 맞는데 우리에게 신경도 안 쓰고 하던 일 다 하고 어슬렁대며 숲으로 들어가며 우릴 향해 몸을 세워 겁 한번 주고 사라졌다.

 

어미 곰은 못 봤다. 거리가 워낙 근접해서 거대한 어미까진 차 안에서라도 무서웠을 거 같다. 브래드 피트의 영화 '가을의 전설'에 나오는 그 회색곰은 차 타고 가다 만나면 사파리, 걷다가 만나면 공포인 맹수지만 경이롭고 아름답다.

 

구름 때문에 일출은 못 봤지만, 회색곰 거주 밀도가 훨씬 높은 캐나다 로키에서도 못 본 애들을 Teton 정도에서 코앞에서 만나다니  엄청난 행운의 새벽이다. 

 

▲회색곰 두 마리가 도로 가운데에서 놀다가 숲으로 들어가고 있다.

 

 캠프로 돌아와 오늘 미명의 자연이 준 선물을 음미하며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두 호수 사이에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하여 String lake(실 같은 호수)라고 불리는 호수 주변 3.7마일을 따라 가벼운 하이킹을 간다. 호수가 작아서 건너편 산이 손에 닿을듯한 경관을 제공한다.  파인 향 짙은 숲을 걷고,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이효석의 메밀꽃이 이렇게 이뻤는지에 감동하고, 캐나다 로키에 갔을 때 처음 만난 야생화,  Indian Paint brush도 여기서 실컷 보고 또 본다.

 

▲인디언 페인트 브러시라고 이름 붙은 야생화.

 

공들여 가꾼 English garden처럼 보이는 넓디넓은  야생화의  정원이 펼쳐져서 성대한 잔치집 같은 꽃밭에 넋을 잃으며 걷느라고 집에 두고 온 꽃들 그리워할 틈이 없다. 인디언의 paint brush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의 빨간 꽃은 남의 뿌리에 기생하며 자란다는데, 그 뛰어난 미모로 와이오밍주 꽃으로 선정되어 있다.

 

광대한 초원에 카펫처럼 깔린 Sagebrush는 라벤더와 파인 향을 섞은듯한 향기를 품었다. 이곳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관목으로 자라며 건조한 초장을 은빛 나는 green으로 덮은 이 허브도 와이오밍의 상징이라고 한다. 주변을 향기로 뒤덮는 라벤더처럼 곁에만 가도 향기를 퍼트리진 않지만 조금 따서 손으로 비벼 그 향기를 음미하며 걷는다.  

 

하룻밤에 숙식 포함 700불 받는 Jenny lake lodge 손님들을 태우고 가이드가 앞뒤로 붙은 소규모 승마 그룹이 호숫가를 지나간다. 우리가 셰넌도어에서 horse riding tour 할 땐, 미국의 전형적인 서민 복장의 소박한 가이드가 한 명만 앞에서 인도하고 고객들의 옷차림도 다 평범했다. 그런데  이 그룹은 서부 영화배우처럼 멋지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가이드 두 명과 화보라도 찍어야 할 듯한 감각 넘치는 의상을 갖춰 입고 말 타는 할머니 등, 부티가 좔좔 흐르는 행렬이다.

 

우리가 만나는 보통의 미국 사람들은 의사 변호사 교수 등 비교적 높은 연봉의 전문직이라도 우리 눈엔 허름, 남루, 소박, 평범의 입성으로 다녀서,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old money, deep pocket으로 표현되는 미국 상류층의 사람들은 주위에서 만나 볼일도 없지만,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철저히 가꾸어진 외모를 비롯하여 결단코 서민들은 흉내 낼 수 없을듯한 부티가 철철 넘친다고 느끼게 되곤 한다.  

 

▲2시간 이하의 가벼운 하이킹 후 호수가 보이는 우리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해먹에 누워 호사스러움을 누려본다.

 

계속 구름이 낀 날씨지만 예약해놓은 Snake river에서 물길 따라 슬슬 떠내려가는 보트를 타보려고 6시에 호텔에 모였다. 2시간 반 동안 10마일을 강에서 둥둥 떠내려오며 구불구불 흐르는 강을 따라 내려가는 산천 유람을 즐긴다. 티탄의 위용은 물론, 수상 가옥 건축의 달인 비버, 치타 다음으로 빨리 달린다는 하얀 궁뎅이의  귀여운 사슴과 동물 prong horn, 미국의 국조인 멋진 bald eagle(대머리독수리), 최고의 강태공이고 아름다운 목소리의 물수리(osprey) 등 수많은 야생 동물들과 강둑의 야생화들을 보며 고즈넉한 저녁을 즐기며 강물이 흐르는 속도로 떠내려온다.

 

앞에 앉은 5세와 8세의 어린 딸 둘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는 마이애미에서부터 운전해 왔다며 총 8주간의 캠핑 여행 중이라고 한다. 아이들에겐 단조롭고 지루할 수도 있는 유람 시간 동안, 얌전하게 앉아 있는 예쁜 아이들과 8주 동안이나 캠핑 여행하는 그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우린 그런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없었고, 우리 애들을 포함해 우리가 보는 한국 아이들은 이런 경우 징징댄다고 보면 맞는다는 생각도 든다. 배를 탈 때 애들이 타길래 이 고무보트 뒤집히게 진상부리는 거 아닌가 살짝 염려가 스친 것도 사실이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오랜 시간을 강에서 유람하고 오니 으슬으슬 춥다. 벽난로의 온기와 불빛이 너무나 아늑하고 따사로운 호텔의 라운지가 나를 반겨준다. 캠프로 돌아가기 전 잠시 오늘을 기록에 남기고 또 하루를 접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