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먹다 삶을 뚜벅 뚜벅 걷다보면 가볍게 걸을 때도, 달릴 때도 세월을 못 이겨 힘에 버거워 질질 끌고 갈 때가 있다 그 속에서도 삶을 즐기고 싶을 때 힘들어 삶이 귀찮아 질 때라도 가끔은 하늘도 보고 추억도 소환하고 그 속에 빠져보는 것도 참 좋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다 귀하고 귀한 보배로운 삶이다 내 인생 니 인생 할 것 없이 모두 다 소중한 삶이건만 세월 속에 파묻힌 병들어 버린 내 인생 걷지 못해도 지팡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아니 어깨동무하고 함께 가는 동반자라도 있으면 좋겠다 난 그렇게 지키고 싶다 하나하나 다 소중한 것들을 부정보다는 긍정을 불평보다는 칭찬을 해 주는 그런 인생을 먹고 싶다 깊어가는 가을을 먹으며 오늘도 또 다른 날을 기대해 본다 선물 같은 하루 여름의 막바지인 어느 날 출근 준비 하느라 정신없는 나에게 카톡 하나 딩동 “와 맛있겠다.” 먹음직스런 감자탕과 곰탕 사진에 감동 메세지 보내고 나니 보따리 사진이 올라 온다 “어르신들께 가져 가나보다“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어머 원장님 웬일이세요?" 하면서 반기니 지금 어디에요? 하며 물으신다 출근준비중인데요 왜 그러시는 데요? 지금 출발합니다! 라는 말씀에 갑자기
우중단상 계속된 열대야에 한낮 빗줄기 내리는 날 단지 아파트에 사다리차가 장롱이며 냉장고며 방수 포장으로 무장하고 빗줄기 사이로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분주하다. 오래된 20층짜리 고층아파트에 뷰는 기대도 못 하고 엘리베이터도 안 타는 2층으로 내 집 장만 설렘을 안고 아침부터 잔뜩 흐린 날씨가 한 방울씩 내린 비로 장롱만 비 맞지 말아야 한다고 비닐로 덮었던 생각이 난다. 이삿날 비가 오면 잘 산다고 하더니. 창문까지 나뭇가지로 가로막혀 그나마 눈앞에 있는 주차장도 가려져 화분마다 햇볕이 부족해 시들시들하다 죽고 마는 저층이다. 그래도 비 오는 날이면 이층의 진가가 발휘된다. 창을 넘어 들어오는 나무 이파리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모든 불만을 털어준다. 비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까지도 잎사귀에 터지는 빗소리에는 반응을 보인다. 가끔 여름이면 나뭇가지에 빗줄기 타고 들어오는 청개구리로 아이들이 소란한 날도 있었지만 ‘토도독토도독’ 잎사귀에서 창문으로 튀어 부딪치는 빗소리가 나면 귀보다 먼저 발이 앞선다. 아홉 식구 우리 집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은 두 개뿐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하나는 딸 셋 낳고 나온 장남 몫이고 하나는 중학생 언니 몫이다. 언니의 우산은
가냘픈 몸매 때문에 바람이 불어올라치면 하늘하늘 춤추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 풋풋한 향기조차 코에 익숙한 풀 내음이라 정신이 맑아진다. 마냥 티 없이 맑고 순수한 구절초꽃은 내 마음에 영 순위 사랑이다. '가을은 두 번째 봄'이라는 멋진 글귀가 아니어도 우리는 봄처럼 설레며 가을 한복판에 서 있다. 구월은 꽃 천지다. 소녀처럼 맑고 순수한 눈빛으로 꽃을 따라 걷고 또 걸어도 지치지 않는 가을은 그렇게 우리를 설레게 하며 달려오니, 분명 '두 번째 봄‘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가을이면 꽃을 따라 바삐 움직이는 나에게 구절초꽃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그리움이다. 지금처럼 전국적으로 꽃 명소가 없었던 시절, 교외로 나가니 예쁜 카페 입구에 새하얀 꽃들이 반갑게 맞이하길래 망설임 하나 없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 풀꽃 하나에 힘들었던 일상은 금세 잊고 마음속엔 별처럼 빛나는 순수의 꽃 생각으로 가득 찼다. 더구나 뒤꼍엔 하늘의 별들을 다 모아놓은 듯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으니, 카메라를 따로 준비해 가지 못한 것이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이름도 모르고 만난 구절초였지만, 이미 흐드러지게 핀 그 꽃이 이삼일 안에 다 지지는 않을까 밤새 노심초사하
고토(古土) 작게 매우 가늘게 젖은 꽃잎 스물 그 중 하나 또 하나 떨어져 가늘고 긴 줄기에 위태롭게 올라 앉아 바람에 휘둘리다 운악산 바라보는 분홍빛 구절초 여린 시선 별처럼 하얗게 모여 소곤소곤 젖어 생을 짓는 방울 꽃 비처럼 깊게 자라는 게 보이지 않았는데 비처럼 깊게 나무처럼 굵게 자랐습니다 고양이 겨울을 창문 너머로 즐길 때 헤아비 흙은 밤에도 빛을 발하고 농부는 고단에 고단을 더해 흙을 뒤집는다 발걸음으로 땅에 선을 만들고 씨앗을 넣어 숨은그림 만들기를 준비한다 달도 없는 밤 화가의 붓칠처럼 섬세하게 내일에 내일을 그려낸다 비바람 천둥 농부의 뜻을 헤아려 쨍한 햇볕 시간으로 대지에 채색을 시작한다 초록초록 똑같이 생겼다고 하지만 각자 다른 사투의 시간 이슬을 기다린다 생의 끝에서 말없이 잎을 틔우며 햇살에 햇살을 살아 낸다 송동현 본명 송계원, 1975년 포천 출생. 2001년 시집 『꿈을 펼쳐!』로 작품활동 시작, 포천문인협회 전 사무국장, 맥놀이창작동인회 부회장, 사랑방시낭송회 회원 도담도담한옥도서관 시창작교실 강사, 도서출판 담장너머 대표. 시집 『꿈을 펼쳐!』, 『사랑水』 jinu514@hanmail.net
인연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것 같다. 불행해진 첫사랑이었던 일본인 여성을 만나고 나서 작가가 한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인연들을 만난다. 피천득의 인연처럼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인연도 있고 만나서 좋은 인연도 있다. 만남과 무관한 인연도 있고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불행한 인연도 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이듯 인연 또한 그렇다. 어느덧 고희(古稀)에 접어든 지금에야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어떤 인연들이 좋은 인연이었고 어떤 인연들이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이었던가. 지난 시절들이 오래된 흑백영화와 같다. 그것들은 이제 날것처럼 펄떡이며 생생하지도 않다. “인생이란 그리 행복하지도 그리 불행하지도 않다.” '여자의 일생'의 주인공 잔느가 죽은 외동아들 폴이 남긴 손주를 안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읊조린 말이다. 바람둥이 남편은 잔느의 하녀까지 성폭행하여 임신시킨다. 남편은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다 결국 그 남편에게 살해된다. 임신한 잔느는 하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들을 낳는다. 잔느는 외동아들 폴을
빛으로 만난 님이시여 가을이 오면 설렘으로 시작한다 달콤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하려나 한동안 잊고 있던 그 옛날 그분이 오려나 아침이슬 먹고 영롱한 숨을 쉬며 콩닥콩닥 가슴 두드리는 들국화 여인의 허리춤을 휘감아 주려고 하는가 억새풀 넘실넘실 은빛 파도를 가르고 산자락 바위에 올라앉아 긴 한숨 내 쉴 때면 억새풀 꺾어 집시치마 엮어 입히고 노오란 소국 한 송이 머리 위에 꽂아 주던 분이시여 광명으로 가슴에 새겨준 흔적 없는 이름 앞에 청계수 계곡물 졸졸 흐르는 곳에 하얀 옷고름에 님의 이름 새겨서 흘려보내면 내 옷고름 건져서 님의 대님 삼아 찾아오실 거라고 그리 믿소이다 길을 가다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나를 맡겼다 바람과 구름이 있었기에 나는 그곳으로 따라갔다 흐르는 물이 있었기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눈보라 거센 바람 몰아쳐도 설상에 매화 본 듯 그 길을 가리다 녹 슬은 페달 보이지 않는 끝을 보이는 듯 초고속으로 페달을 밟고 달려간다 정거장 없는 활주로를 질주하며 날개 달은 구름에 어느 순간 몽롱함을 느끼며 꿈속으로 빠진다 바람에 할퀴고 너덜해진 천사의 날개가 드높은 솟대위에 걸쳐진 채로 바람에 춤을 춘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녹슨 페달은
오월의 장미 월담을 한 활짝 핀 얼굴에서 미소가 가득 퍼집니다. 피어난 검붉은 잎술에서는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는 오월의 아침입니다. 한 번에 품에 안기는 조금은 설레게 하는 당신 당신은 오월의 신부입니다. 소녀의 사랑 안갯속 희미한 곳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잠시 얼굴 내민 외딴섬 그곳은 내 고향이자 내가 사랑하는 배롱나무 한그루가 푸른 언덕 끝자리에 자리한다. 가끔은 그림을 그리고 친구와 소꿉놀이도 했던 장소 빠알간 꽃잎을 터트릴 즈음은 내 가슴은 콩닥였다. 바람이 스산이 불어대면 백일동안 꽃을 피워내던 바닥엔 분홍 양탄자가 깔린다. 잠시 들여다본 외딴섬도 지나는 통통배의 기적소리에 바람 따라 사라진다. 아직 나는 거기에 있는데. 봄은 봄은 수줍게 내미는 꽃잎처럼 당신의 미소를 닮았네요. 파르르 봄바람에 떨리는 꽃잎은 그대의 연분홍 입술 같아요. 산자락 바위틈에서 햇빛 사랑을 한껏 받고 있는 꽃속에 나는 빠져버렸네요. 그 꽃술이 아마도 당신 마음 같아서 그 마음 행여나 비구름에 다칠까봐 나는 우산 되려나 봅니다. 늘 그대생각-2 흐르는 물소리는 그대의 몸짓인걸! 스치는 바람은 그대의 손길이고 지저귀는 새 소리는 그대의 속삭임으로 나를 품는다. 물과
모든 생명은 신비하고 오묘한 느낌이 든다. 내 가족은 더 그런 것 같다. 우리 집 반려묘 유지가 새끼를 낳는 날이 돌아왔다. 병원에서 낳는 날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어 걱정되어, 어제 딸에게 다시 병원 가야 하나 이야기를 했는데 드디어 소식이 왔다. 야옹야옹 울면서 아파 끙끙거린다. 말 못 하는 너의 표정 속에 큰 눈이 오늘따라 더욱 커 보인다. 이런 날은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뭘까? 네가 좋아하는 등만 두드려 주면서 '잘한다'고 '잘한다'고 하면 될까. 고양이 새끼 낳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기에 어색하고 겁난다. 그 오랜 진통 후 드디어 조그마한 새끼 한 마리가 뚝 떨어진다. 초산이고 온몸 반을 피가 차지하니 덜컥 겁이 났다. 세상의 오는 모든 새끼는 위대하고 그 과정은 신비하다. 어미의 산고와 함께 새끼의 어마어마한 세상과의 만남에 세상을 먼저 산 사람들은 생명의 탄생에 무한한 축복과 위로를 동시에 보낸다. 벌써 몇십 년이 흘렀다. 젊은 날 첫딸을 낳고 난 뒤 그 아이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힘들게 살아가게 될까 봐 미안하고 절망스러워 펑펑 울기도 했다. 그런 감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인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
보름밤 사는 건 늘 그래 조금 올라갔나 싶으면 다시 곱절로 내려가는 생 나만 그러하겠나 어디 가속 붙는 내리막길은 누구나 반기지 않아도 맞닥뜨리게 되어있지 사돈댁 바깥양반이 출가한 딸에게 예전 물려준 빚 돌고 돌아 내 발목 잡았어도 그만이네 며느리는 애당초 죄가 없던 것이다 신용이 불량이라고 남들이 애써 전해도 네 신용은 우리가 보증하면 그뿐 신용 찾아 살만해진 게 언제 적 얘기라고 그새 짐 다시 지게 되어 딱했는지 보름달 기운 빌어 품 넉넉하게 채우라 친구가 덕담을 건네주더라 순전하게 어제 아침처럼 웃다 보면 세상 굉음 견딜 수도 있지 않겠나 만취한 달 쉼 없이 굴러간다. 풀각시 어제 정답게 나누던 말이 오늘 비수가 되어 찔렀어도 그냥 그녀의 단 몇 마디에 한 줌 머릿속 첩첩 쟁여온 배움을 전부 비웠대도 다만 그냥 너를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으나 지금 네 사랑과 내 사랑은 무용지물 서로를 잃는 것은 춥고 떨리고 배고픈 일이지만 태양이 머리 위를 지나도 그만 비 내려도 이제는 그만이다 안개처럼 지우고 하얗게 덮고 나는 나로 너는 너로 살면 그뿐 꽃잎 밟고 서성이는 야속한 발자국에 봉숭아꽃잎처럼 으스러진 풀각시 빈 들에서 홀로 바람 따라 울다가 웃다가 시든 하루
빈 둥지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팔월의 아침 풍경이다. 한눈에 밭작물을 다 알아볼 만큼 작은 밭이다. 뜨거운 기온을 피해 아침 작업을 하려고 농부는 분주하게 서두른다. 황새처럼 하늘로 뻗친 궁둥이만 보이니 남자 뒤태가 우습다. 좀 떨어진 곳에는 작물에 가려진 왜소한 몸으로 두 손은 연신 바쁜 시누님이다. 아, 오늘도 노구를 이끌고 큰 시누님이 밭에 나와 계시구나, 가슴이 아릿해진다. 동네 입구에 출근길 차들이 오가는 큰 도로가 옆, 흙먼지 날리는 작은 밭에서 연신 무언가를 골라 따내고 있다. 한낮 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 시간에 일일이 하나하나 따야 하는 까닭은 조금만 시기를 놓치면 봉선화 씨방처럼 단단한 씨앗이 사방으로 튀는 녹두가 분명하다. 까맣게 옷을 갈아입으면 잘 여문 것이니 농부의 손길을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다. 딱히 녹두밭인가 하면 또 심어 있는 작물이 여럿이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폭염을 견디지 못해 불쏘시개 해도 좋을 만큼 바싹 말라 추레한 옷을 입은 옥수수 대도 서 있다. 들쭉날쭉 도토리 키 재기를 하듯 불긋하고 꺼뭇한 키 작은 수수가 사춘기 얼굴로 서 있고, 과일도 아닌 것이 과일 상점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는 볼 빨간 토마토가 실로폰을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