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문학산책

민천식의 수필 '아련한 추억'

한국문인협회 포천시지부 자문위원, 전 포천부시장,

아련한 추억

 

 

 

 

맑은 공기를 품은 온화한 산들바람은 사람들의 얼굴을 삼킨다. 유난히도 매섭고 가슴 시리게 한 겨울은 소리 없이 길을 떠나고 아지랑이 넘실넘실 춤추는 봄은 어느새 우리 곁을 찾아왔다. 고향마을 옛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저 멀리 넘실되는 신북천 맑은 시냇물을 바라보며 봉명산 아래 진달래꽃 붉게 물들고 저녁놀과 지금쯤 함께 나들이를 하겠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났다. 오늘따라 진한 고향생각은 어릴 적 함께 뛰어 놀던 옆집 친구 오삼, 복길는 초로의 나이에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고향에 대한 향수를 맛본다.

 

내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산과 들을 놀이터 삼아 뛰어 놀던 곳은 주흘산 자락에 자리잡은 요성리 마을이었다. 고향마을은 뒤에는 주흘산이 포근히 감싸주고, 앞에는 요성 뜰과 신북천이 용트림하듯 강물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렸지만 지금도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운 풍경화로 내 머리 속에 남아있다.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요. 언제나 어머니의 품속같이 따스하게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것이 고향이 아니었던가? 고향마을에 들어서면 장승이 나를 제일 먼저 반갑게 맞이했다. 장승은 마을의 모든 액운을 막아주고, 언제나 변함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을사람들을 바라다본다. 장승은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이러한 장승을 뒤로하고 마을에 막 들어서면 마을의 또 다른 수호신인 수령이 오백년쯤 되는 당산나무가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서 있다.

 

당산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서서 마을사람들을 기다린다. 여름이면 마을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당산나무 아래 너럭바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끝이 없는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당산나무 아래 너럭바위에 모이는 날이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철따라 예쁜 얼굴 내밀고 나온 과일 등 먹을 것을 가지고 나와 즐거움을 함께하는 잔칫상을 벌리곤 했다. 우리들의 눈에는 먹을 것과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어 마냥 즐겁고 신나는 날이었다. 당산나무 아래 너럭바위는 정보공유의 장소로도 역할을 하였지만, 우리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 친구 오삼이 어머니의 이야기보따리로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마을사람들에게 주는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그는 재치 넘치는 입담으로 마을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언어의 마술사요. 그 시대의 마지막 전기수가 아닌가 한다.

 

고향의 봄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생동감이 넘치고 농부들의 손길은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는 계절이다. 집밖의 세상은 푸르름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여 색다른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 온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생명들이 봄이 오면 세상에 생명의 새싹을 앞세우고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주흘산에 고로쇠나무 물오르는 소리 요란하게 들리는 계절은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아오곤 했다. 산과 들에는 산수유, 목련, 매화, 진달래 등 예쁜 꽃은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사람들은 꽃의 아름다움에 눈멀고 진한 향기에 취해 가는 봄날의 발길을 잡으려고 애를 쓰곤 했다. 봄날이 오면 온가족이 함께 집밖에 나와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 활짝 열고 기지개를 편다. 마을 앞산의 가장자리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두릅, 방풍나물, 고사리, 더덕, 취나물 등 산나물을 채취하여 우리 집 밥상위에 올려놓는 것도 계절이 가져다주는 풍성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여름은 가난한 농부의 몸과 마음을 더욱 지치게 하는 계절이다. 한줄기 바람과 논 가장자리에 서있는 오동나무 그늘은 농사일에 지친 농부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둘도 없는 친구이다. 여름은 어린 우리들에게는 소중한 계절이었다. 여름이 우리 곁을 찾아오면 무더위를 식이고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마루에 팽개치고 친구들과 함께 신북천 시냇가로 곧장 달려가곤 했다. 우리 마을 앞에 펼쳐지는 눈앞의 전경은 아름다움을 더한 한 장의 그림으로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신북천 시냇물에 붕어, 잉어, 꺽지 등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민물고기는 저마다 수영 실력을 자랑하며 어디론지 급히 달려가고 있다. 친구들과 반두를 어깨에 메고 시냇가로 물고기를 잡으려 가는 천렵도 여름방학이 우리에게 주는 큰 기쁨이었다. 우리들은 삼복더위를 잊고자 신북천 가장자리에 천연수영장을 만들어 미역을 감는 것도 여름이 주는 일과 중 하나였다.

 

가을은 가난한 그 시절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 지천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풍요로움을 더하였다. 곡식이 탐스럽게 익어 수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기대에 부푼 계절은 가난 자, 가진 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수확의 계절이 찾아오면 농촌들은 어느 때보다 바쁜 계절이 된다. 일손이 부족하여 고사리 같은 손길도 적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친구들과 모여 탐스럽게 익어가는 남의 집 과일을 서리하는 것도 우리에겐 빼놓을 수 없는 일과 중 하나였다. 겨울은 봄부터 가을까지 일에 지친 농부들을 위한 휴식의 계절이었다. 농부들에겐 일 년 중 가장 한가한 계절이다. 겨울에도 가마니 짜는 일 등 겨울 나름대로의 일거리가 있다. 농부들은 일 년 열두 달 휴식이 없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시골 마을의 겨울은 겨울이 품고 있는 낭만과 운치가 살아 숨 쉬는 계절이다.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든 날이면 친구들과 뒷산에 올라 노루, 토끼 잡으려 온산을 헤매고 다니던 일은 지금도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그 옛날 우리 집 앞마당에 한가롭게 뛰어놀던 금복이는 유난히도 애교가 많았다. 금색과 흰색의 긴 털로 온 몸이 조화롭게 덮여있어 눈부시게 아름다움을 뽐내는 금복이가 가족들을 보자 웃음 띤 얼굴을 하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옆에 막 태어난 귀여운 노랑병아리 앙증맞게 종종 걸음을 한다. 지금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절의 일들이 나의 추억의 상자 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 지난날의 일들이 아련한 추억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그 시절의 일들이 오늘따라 아름답게만 보였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뀐 지금, 내가 살던 고향마을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궁금증만 더해간다.

 

 

 

민천식 약력

호 운암, 연세대학교 도시공학박사

(사)한국문인협회 포천시지부 자문위원

전) 포천부시장, 전) 포천시장 권한대행, 전) 포천시 체육회장

한국작가, 에세이문예. 소설. 시. 수필 등단

2017, 2018년 한국작가. 에세이문예 신인작가상 수상

홍조근정훈장(2018), 저서: 희망스토리『함께 꿈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