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원 칼럼] 살며 생각하며

가정의 달에 생각하는 ‘애달픈 어느 가족사(家族史)’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KBS프로듀서, 아나운서

 

소녀는 할머니와 이른 저녁을 먹는다. 저 멀리 공원 너머 야트막한 서쪽 산이 석양에 물들고 있다. 할머니 운동을 시켜드리고 근처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한다.

 

그녀의 가슴에는 모처럼 포근한 바람이 일고 있다. 오늘처럼 계속 마음이 편했으면 싶다. 낮에 엄마와 기분 좋은 통화를 했기 때문이다. 엄만 잘 있고 일이 잘되어 내년쯤이면 할머니, 사랑하는 딸과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엄마의 말씀.

 

신도시 조성으로 불행이 시작된 어느 일가(一家)

 

할머니, 엄마, 아빠 등 소녀 가족은 꽤 많은 전답을 가지고 벼농사, 비닐하우스 등을 하며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가족에게 광풍이 불어 닥친 건 그놈의 신도시 때문이었다. 정부는 인근 수십만 평을 신도시 지역으로 정하고 강제 토지 수용을 시작했다. 아빠는 평소 불만이던 농사를 유감없이(?)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비교적 넉넉한 보상가가 책정되어 조상 대대로 살던 삶의 터전을 별 불만 없이 떠나 새로 조성되기 시작한 신도시 외곽 빌라와 원룸이 들어서는 지역에 희망차게 자리를 잡았다.

 

한껏 들뜬 아빠는 분수에 맞지 않은 임대 사업과 장사를 시작하였다. 작은 빌딩을 지어 원룸 등의 임대업을 시작하고자 하였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 보상금과 임대 보증금으로 건축비를, 월세 임대료로 생활비를 하려 한 것이다. 입주가 여의치 않아 문제가 생겼다. 간신히 건축비를 충당하고, 남은 돈으로 일체 경험이 없던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몇 달 만에 장사는 실패하여 많은 돈을 날리고, 신도시 조성도 지지부진하여 임대 또한 원활하지 않았다. 모든 기반이 결국 무너지며 가족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병이 생겨 요양 병원에 가고, 소녀와 할머니는 이곳에 거주하고, 엄마는 인근 공장에서 기숙하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국가주의 경제 정책에 따른 토지 강제 수용과 분수에 맞지 않은 욕망과 과실이 불러온 일가의 불행은 새삼 새옹지마(塞翁之馬 :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말)라는 고사를 교훈으로 생각게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 꿈도 꾸어 보지 못한 채 어린 소녀는 가장이 되었다. 기구하고 마음 아픈 어느 가족사이다.

 

소녀는 이곳 방 한 칸, 주방 겸 거실 한 칸의 집에서 할머니와 살고 있다. 낮에는 마트에서 밤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일하며 당차게 할머니의 생계를 책임지고, 암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할머니 간병을 하고 있다. 기특한 소녀이다. 식사를 마친 후 공원에서 할머니와 산책을 하며 운동도 시켜드릴 예정이다. 할머니는 유모차를 밀고 소녀가 뒤를 따른다. 공원 옆 수만 평 드넓은 벌판에는 목화, 금잔화, 칸나, 설악초, 코스모스밭이 멋지게 펼쳐져 있다. 이미 흰색, 붉은색, 황금색 꽃이 만발이다. 마트, 편의점 일로 바쁜 소녀는 이 아름다운 꽃을 즐길 틈이 없었다. 소녀는 오늘은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의 책임인가?

 

정부의 성장과 개발 중심의 정책, 신도시 건설의 거센 바람, 물질만능주의 세태와 과도한 욕망, 분수를 넘어선 무모함 등이 가족의 불행을 가져왔고 어린 소녀와 연로한 노인을 어려움에 빠뜨리게 한 것이다.

 

5월 가정의 달에 즈음하여 소녀의 수원수구 대상이 누구인지 헤아려보고 싶다. 행정 주체는 일가와 국민의 삶을 세심하게 배려하지도 않았고,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신도시 조성정책을 수립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일가(一家)는 국가주의 경제 정책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개인이 과도한 욕망으로 엄혹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경쟁 속에 경험 없이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분수에 넘치는 행위를 할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야 했다. 안분지족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람은 분수를 지켜 행위를 해야 한다. 격에 맞지 않은 돈, 자리, 명예는 조선시대 여인들이 외출할 때 옷 위에 쓰던 너울과 같다. 멋있는 너울을 쓰고 많은 사람 앞에서 그것이 자신인 양 교만하거나 으쓱하며 헤프게 낭비하는 것은 철없고 분수를 모르는 행동이다. 너울은 잠시 걸치는 것이니 곧 벗어야 한다. 너울은 위험에 처했을 때는 그 위험에서 벗어나는 데에 훼방이 될 뿐이다. 옷은 입지 않을 수 없으나 너울은 안 써도 무방하다.

 

수도권 인구 집중으로 내집마련 부동산 정책이 아무리 다급하고 중요하다 하더라도 국가가 편리한 대로, 정권의 입맛대로 여기저기 시시때때로 신도시를 행정행위로 만들어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제 국가주의 가치가 우선하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졸속 행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인해 희생을 당하거나 불행을 겪는 민생과 가정이 없는지 세밀하게 따져보고 배려해야 한다. 해외 선진 복지국가 사례를 살펴보고, 민주주의 철학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개인 문제로 귀결되나, 개인이 위대한 우리 사회

 

편의점 교대 시간이 다가온다. 지나가는 남녀 고등학생들의 즐거운 농과 유희를 지켜볼 틈도 없이 가야 한다. 소녀는 학생들과 같은 신분으로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낸 때가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불과 2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편의점 앞에서 할머니와 헤어진다. 소녀가 꼼꼼하게 하는 말, 할머니 집에서 운동하고 주무세요.

 

할머니는 손녀가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후 어둑어둑해진 골목을 돌며 값나갈 만한 박스 등 폐지, 공병과 같은 재활용품을 늦도록 겨우겨우 주워 유모차에 담았다. 다음날 새벽이 되면 근처의 부지런한 젊은 부부가 오토바이 짐차로 재활용품을 싹쓸이하는 것을 안 할머니 선수 치기였다. 편의점에서 소녀로부터 물건을 산 뒤, 숙소로 돌아온 필자는 무거운 마음으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린다.

 

편의점 소녀

 

늦은 밤 소녀는 계산대에 있다

손님에 외치는 말 ‘오천 원 받았습니다’

표정 없는 얼굴 목소리는 명랑하다

 

단발머리에 벗겨진 분홍색 매니큐어

어린 나이에 그늘진 얼굴

아 눈 밑의 다크서클

삶의 무게를 이미 알아버린 소녀

 

밤안개 어둠 속에

희미하게 사라지는 편의점 조명

담장 너머 5월의 빨간 장미, 땅 그림자로 어른댄다

 

두고 오는 무거운 발길

 

가정의 달 5월이 되면 바야흐로 신록의 절기가 시작된다. 나무의 연록이 본격적으로 녹색으로 바뀌는 시기이다. 여름철 녹음의 계절을 맞기 전의 5월의 숲은 사람으로 말하면 방년, 약관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방년에 가장이 된 소녀가 지난 가족사에 슬퍼하지 말고, 비록 어려운 가정환경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꿋꿋한 청춘으로 꿈과 이상을 펼쳤으면 싶다. 이른 나이에 삶의 질곡, 세상의 그늘에 짓눌려 주접이나 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5월 가정의 달에 소녀 가장과 그 일가의 미래에 축복이 있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필자의 아래 시처럼 강한 의지를 갖고 씩씩하게 살 것을 확신하며......

 

극한에서

 

겨울 추위 동지섣달 치달으며

송곳으로 살 에이고 번뜩이는 칼날로

껍질이 잘리우는 아픔과 같아

숨조차 쉬지 않고 생명마저 버리고 싶을 때

나무는 실오라기 없는 나신이 된다

 

얼어버린 대지에

두 다리 우뚝, 하늘 향해 활짝 두 팔 벌려

엄동 추위 오감으로 실감하는 겨울나무

먼 훗날, 봄꽃 가을 열매 꿈꾸며 극한에서 다시 일어선다

 

 

 

서재원 

. 창수초등학교, 포천중, 포천일고, 서울대 졸업

. 한국방송 KBS 편성국장, 편성센터장(편성책임자)

. 차의과학대학교 교양교육원장, 부총장

. 포천중.일고등학교 총동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