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원 칼럼] 살며 생각하며

봉선사에서 인간의 욕망과 본성, 도리를 생각한다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KBS프로듀서/아나운서 

 

근거를 통계 수치로 제시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부문의 집단 간, 개인 간 갈등은 2000년 이후 점차 심화하는 경향을 보이다 최근에는 사회적인 혼란으로 비취일 정도로 심각해서 우려되는 바가 크다.

 

갈등의 외형적인 원인은 모두 그럴듯한 추상적 가치를 가진 ‘명분’또는  국가, 국민을 위해서라는‘당위성, 정당성’이다. 그러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내면의 진정한 원인을 파헤쳐보면 갈등의 한 편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지 않은 주관적 입장, 치우친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곡학아세(바른길에서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와 물리적 힘으로 그 집단, 개인의 속물적인 탐욕이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갈등의 그 충돌 과정에서 인간의 도리, 도덕, 인권을 저버리고 본성마저 저버리는 모습을 보게 되어 마음이 착잡해진다.  

 

포천시 국립수목원 옆에 봉선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다. 세조와 정희왕후가 잠들어 있는 광릉을 지나가다 보면 길옆에 있는 절이다. 1946년 봉선사 다경향실(지금은 새로운 건물), 가야마미쓰로라는 50대 중반의 남자가 기숙하며 조용히 참회록을 쓰고 있었다. 그는 2년 후에 수필집 ‘돌베개’와 ‘나의 고백’을 출간한다.

 가야마미쓰로, 우리 신문학의 선구자로 장편 신소설 ‘무정’을 집필한 춘원 이광수이다. 춘원은 1930년대 말부터 우리 청년들의 징병을 독려하는 소설과 시를 발표하여 일제의 전쟁터로 내모는 데에 공(?)을 세웠다. 그리고 남양주 사릉에서 거주하다 해방을 맞았다.

 

친일 행각으로 오갈 데 없는 그에게 봉선사의 거처를 장만해 준 분은 운허 스님이었다. 스님은 또 그에게 자신이 설립한 광동중학교의 국어 교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스님은 본명이 이학수인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불경 번역가로 춘원 이광수와 팔촌 간(육촌 설도 있음)이었다.

 

이후 춘원은 1949년에 반민법(1945년 8월 이전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1948년 9월 제정되었던 법)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집에서 북한군에 납치되어 그해 12월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가 장황하였다. 봉선사 입구를 향해 오르다 보면 정희왕후가 남편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심었다는 500년 된 느티나무가 있고, 일주문을 거쳐  표지석을 지나면 오른편 산 밑으로 스님들의 추모비와 부도가 있는데, 사이에 춘원 이광수 추모비가 있다. 비록 갓이 없는 조그만 비이지만, 큼직하고 굵은 글씨로 그의 약력과 글 등을 적어 놓았다. 비문에는 친일 행적은 적혀 있지 않다. 추모비는 1975년에 우리나라 첫 여류 의사인 그의 부인 허영숙과 언론인이자 시인인 주요한 등이 주축이 되어 세웠다고 한다.

 

우리 근대문학의 선구자 춘원 이광수가 무슨 연유에서 그리 지독한 친일 행각을 하였을까? 개인적 번뇌와 고통은 알고 싶지 않다.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행위를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대체로 외롭고 고독한 순간으로,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게 필자의 견해이다. 모든 감정과 욕망을 내려놓고, 용기와 당당함으로 시련과 유혹, 두려움에 대면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그 때 의 삶을 대면하는 심경은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죽음의 시련에 직면해본 사람은 알 수 있다.  

 

 삶

 

동물적으로 느끼는 것도 잃은 뒤 외로움도 절망도 아니다

느끼지도 말고 외로워하지도 절망하지도 않고 오직 충일하게......

텅 빈 해변에서

혼자 거부할 수 없는 해일을 맞이하더라도

(필자 생각)

 

사람은 인간이 주재할 수 없는 절대의 시간 위에서, 피할 수 없는 판단과 행위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이광수는 이와 같은 운명적 순간에 잘못된 판단과 행위로 스스로 오랜 세월 쌓은‘한국 신문학의 선구자’, ‘계몽문학의 개척자’라는 업적마저 퇴색시켜 버리고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방 후 이곳 봉선사에서 친일 반역자로서 참회의 세월을 보내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되고, 집에서 북한군에 납북되어 사망하는‘비참한 말년 5년’을 보낸 것이다. 그래서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갓 없는 작은 추모비마저 후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힐난 속에 쓸쓸하게 서 있는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삶의 어려움과 업보의 엄정함을 가슴 깊이 느껴본다.

 

 

봉선사 입구 주차장을 지나면 꽤 큰 규모의 연밭이 있다. 7월이 되면 온통 녹색의 연잎으로 우거져 있는 연못 여기저기서, 꽃대들이 봉곳봉곳 봉오리를 머리에 이고 하늘 향해 솟구쳐 오른다. 유희하던 잠자리와 나비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면, 연꽃은 벙긋 입을 열기 시작하고, 화려한 개화를 시작한다. 백련, 홍련, 자련, 수련이 온통 개화하는 7월 중순이면 연꽃 축제가 시작된다. 연꽃이 만개하면 봉선사 전체가 환해지고 청정해진다. 

 

불가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연꽃에서 왕생한다고 한다. 연꽃은 화생의 상징으로, 고결하고 청정한 불국세계의 꽃이다. 연이란 수생식물은 비록 더러운 진흙에서 잎과 줄기를 키워내지만, 물을 정화하여 아름다운 꽃대를 만들고 백색, 홍색, 자색의 찬란한 꽃을 피워 올린다.

 

사람들은 연꽃의 아름답고, 깨끗하고, 청결한 모습이 좋아 축제 때가 되면 봉선사를 찾는다. 봉선사에 오는 사람들 모두가 연꽃 구경을 하는 순간만은 돈, 명예, 권력과 같은 탐욕은 잠시 내려놓고, 연꽃처럼 맑고 아름답게 살겠다는 생각만 했으면 좋겠다. 필자가 적어 놓은 ‘봉선사’라는 시를 소개한다.

 

연잎 사이사이

하양 연분홍 봉오리 황홀하게 피어나고

법당 앞뜰 거위 뒤뚱뒤뚱 몸짓하며

색 색깔 잉어가 무리 지어 유영하는

봉선사

   

법당 뒤편 소롯이 쌓은 작은 돌탑엔

많은 사연 있을 성싶다.

뉘신지 모를 이 49재 애잔한 기원

독경 소리 향 내음에 배어

법당을 휘감아 저승에 이르고......

목탁 소리 가슴을 두드린다.

 

청아한 풍경 소리 좇으니

 

뭉게구름 머무는 하늘가

수백 년 노송에서 까치들이 새끼를 키우고 있다.

 

산죽나무 덤불 속 몇 마리 참새

“포르롱 짹짹”힘찬 비상이 산사의 정적을 깬다.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봉선사는 조계종 본사이다. 조선 예종 때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남편 세조를 추모하여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창건하여 봉선사라 하였다.

 

봉선사 대웅전에는 ‘큰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이 붙어 있어 정겹다. 주지였던 운허 스님이 봉선사에 한글 편액을 고집하여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큰 법당을 돌아 뒤편으로 가면 작은 돌탑들이 단아하게 쌓여 있는 곳이 나온다. 무슨 연유로, 무슨 기원을 하며, 어떤 이의 명복을 빌려고 돌을 하나하나 올려 탑을 쌓았는지 사연이 궁금해진다. 돌탑이 있는 근처 계단에 앉아 큰 법당 너머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청명한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큰법당 오른쪽 지장전인 듯싶다. 슬픈 독경 소리가 가슴을 울리며 하늘로 오르고 있다.  

 

왕도(王道)가 백성들의 인륜(人倫)과 다를지 몰라도, 명분이 미약했던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벌어진 조선 왕조 500년사에 있어 유례없이 인륜에 반하는 참혹한 비극이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데 바로 이 봉선사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사육신을 도륙한 장본인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절이라 하니 새삼 인간의 본성과 도리를 생각게 한다. 이런 역사적 사연이 깃들인 이곳 봉선사에 민족을 배신하고 우리 청년들을 일제 전쟁터로 내모는 데에 일조한 신문학의 선구자 춘원 이광수가 거처하며 참회의 글을 썼고, 그의 추모비가 있으니 마음이 더욱 착잡하다.

 모두를 위해서 옴마니반메훔(모든 죄악이 소멸하고 모든 공덕이 생겨난다는 불교 진언)을 외운다.  

 

 

서재원 교수

. 창수초등학교, 포천중, 포천일고, 서울대 졸업

. 한국방송 KBS 편성국장, 편성센터장(편성책임자)

. 차의과학대학교 교양교육원장, 부총장

. 포천중.일고 총동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