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버몬트(Vermont)주의 단풍 2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필자 김은성 작가.


버몬트주는, 이반 데니소비니치의 하루라는 책으로 노벨상을 받고 반체제 인사로 소련에서 추방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1976년부터 구소련이 붕괴하여 러시아로 돌아간 1994년까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인구 1,400명이 사는 캐번디시(Cavendish)라는 작은 마을에서 은거할 때, 마을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알았으나 방문하는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조용히 살고 싶어 한 그의 바람을 한 마음으로 존중해준 것이 버몬트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해준다. 캐번디시의 도서관은 솔제니친이 떠나며 선물로 준 그의 서명이 있는 저서를 보물처럼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2백년 전쯤에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의 버몬트주에 단풍이 불타는 계절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어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타지로부터 불러 모은다. 신생국 미국에서 만나는 옛 모습은 불과 2백년 전으로 돌아가니 수천 년의 흔적을 간직한 구대륙에 비하면 옛것이라 부르기도 빈약하지만, 수천 년이 아닌 2백년이라 시간의 체감이 더 선명할 수도 있다. 

 

▲우리가 들러본 마을들을 빨간 점으로 표시해봤다.

 

스트래튼(Stratton)


도시나 산업단지 등으로 개발된 곳이 별로 없는 버몬트주는, 설악산(5600피트)보다 낮고 넓게 펼쳐진 Green Mountain(4,300피트)과 약간의 목초지로 형성된 지역이다. 전체가 산지이다 보니 작은 주이지만 스키 리조트가 30개 정도 있다. 


그중에서 뉴욕이나 보스턴에서 접근성이 좋아서 비교적 근래에 개발된 스키 리조트인 스트래튼에서 버몬트의 첫 밤을 유숙했다. 고도는 3,000피트 정도이다. 4,700피트인 용평스키장보다 비교적 낮은 산에 있으나, 현대적으로 아름답게 조성된 타운이다.


밤에 도착하여 만원사례 중인 버몬트에서 우선 아늑한 숙소가 있는 게 반가워서 잠을 청하고 아침에 일어나니, 아직도 나뭇잎들이 파란 우리 동네에서 갑자기 시간 여행해온 듯 비현실적인 단풍의 절정이 펼쳐있다.


버몬트로 단풍 시즌에 오는 관광객들은, 옛 모습을 간직한 버몬트의 예쁜 마을에서 머물고 싶어 한다. 우리처럼 갑작스레 이 여행을 결정한 뜨내기에게 그런 숙소가 남아있을 리 없으니,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속의 스키 리조트로 들어왔으나 숨 멎을 듯 아름다운 단풍이 가득 펼쳐진 이곳에서 오랫동안 있고 싶었다. 단풍으로 둘러싸인 산속에서 골프를 치거나 스키 슬로프에서 하이킹을 즐기며…..

 

▲현대식 스키 휴양지로 조성된 마을, 스트래튼.

 

맨체스터(Manchester)


미국을 자동차로 여행하다 보면, Historic town이라고 부르는,  옛날 모습을 간직한 작은 마을들을 종종 만난다. 그러나 오래된 물건들을 다 앤틱 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오래된 와인이라고 다 빈티지 와인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낙후된 채로 쇠락한 모습의 오래된 타운은 관광객들을 모으지 않는다.

 

그에 비해서 빼어난 자연경관과 잘 보존된 옛 건물들이 남아있는 아름다운 타운의 역사를 보면 그동안 쭉 부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관광, 휴양, 정치, 산업 등이 부자들을 불러 정착하게 하는 요소이다. 

 

▲1800년대 건물들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다운타운을 이루고 있는 맨체스터.


맨체스터도 버몬트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타운이다. 산자락 가운데 자리 잡은 경관이 수려하여 근처에서 광산업이 시작되어 자원을 나르려고 철도가 생기자 뉴욕 부자들의 관광, 휴양지로 인기를 끌게 된 곳이다. 현재 인구 4천명이지만, 오래된 건물들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고, 개성 있는 작은 가게들과 두어 개의 스키장이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다. 사방에 산이 보이고 아름다운 단풍이 눈부신 마을이다. 


이번에는 못 들러봤으나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링컨 대통령의 혈육인 로버트 링컨의 저택도 맨체스터에 있다고 하니, 버몬트에 다시 올 기회가 허락된다면 꼭 방문해보고 싶다.

 

▲힐든(Hildene) 링컨 대통령의 아들이 지은 저택과 정원.

 

벌링턴(Burlington)


버몬트에서 가장 번화하고 큰 도시는 서북쪽에 샴플레인(Champlain) 호수에 자리 잡은 벌링턴이다. 인구 4만명이 조금 넘지만, 주립대학이 있고 거리에 젊은이들이 많아서 활기가 넘치는 도시다.

 

▲다운타운에는 명동처럼 보행자들만을 위한 거리가 있다.

 

옛날부터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항상 물이 있어야 했다. 바다를 면하지 않은 버몬트주는, 5대호 다음의 6번째 호수라고 불리는 바다 같은 샴플레인 호수를 면하고 있다.

 

샴플레인이라는 프랑스 사람이 캐나다에서부터 호수의 물길로 내려와 이곳을 탐험하기 시작하여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곳이 벌링턴이다. 물은 더 이상 교통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으나, 호숫가는 아직도 사람들이 매우 선호하는 주거 환경이다.

 

▲바다처럼 넓은 샴플레인 호수 건너편은 뉴욕주이다.

 

다운타운에는 성별을 분간하기 힘든 복장과 외모의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버몬트주는 다양성을 포용한다는 개방적인 정치와 종교의 성향이 현저한 곳이라는 것을 거리에서도 느낄 수 있다.  트렌디한 레스토랑들과 아웃도어 스포츠용품을 파는 가게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호수의 해안선을 따라 물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공원이 형성되어 있는데, Little Italy라고 쓰여 있는 간판과 대리석 조각품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대리석이 생산되어, 18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많은 대리석 장인들이 이주하여서 모여 사는 동네가 있었는데 도시 개발로 없어진 자리라고 한다. 버몬트 곳곳에서 고급스러운 이탈리아 식재료 가게를 만난 이유가 설명되는 듯하다.


도시로 나오니 방을 구할 수가 없어서, 호숫가의 캠프장에서 차박으로 이틀 밤을 머물면서 버몬트주의 북쪽 마을들을 탐방하는 베이스캠프를 벌링턴으로 정했다. 

 

스토우(Stowe)


벌링턴에서 동쪽으로 단풍이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도로를 한 시간 정도 탄성을 지르며 달려가면, 더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마을, 스토우를 만난다. 버몬트의 아름다운 마을 대표선수는 단연코 스토우이다.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스토우.


맨체스터처럼 이곳도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인데 산세가 더욱 깊고 수려하며 겨울엔 동계 스포츠, 여름엔 평균기온 섭씨 15도 근처인 선선한 날씨가 구석진 위치에도 불구하고 유명세를 높인다. 오랫동안 잘 관리되어온 아름다운 옛 건물들이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으로,  옛것과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깊숙이 충족시키는 스토우의 상주인구는 5천 명에 불과하다.

 

▲스토우에 있는 부틱호텔 로비..


우리가 이곳을 방문한 날은 콜럼버스 데이였다.  콜럼버스가 원주민들을 학살한 흑역사로 인하여 요즘은 원주민의 날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다. 새로운 것에 진취적인 버몬트주의 스토우에서는 벌써 이곳의 원주민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도 잠시 들러 아름다운 스토우의 자연 가운데, 그들의 역사를 자세히 들을 기회를 가졌다. 


스토우 근처에는, 사운드오브뮤직의 모델인 본 트랩(Von Trapp)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해와서 고향의 자연과 비슷한 산자락에 정착하여 세운 호텔이 있다. 마치 알프스에 온 듯한 느낌의 건물과 정원, 인테리어 등이 가족들과 함께 와서 즐기고 싶은 휴양지의 모습을 갖춘 곳이다.

 

▲아름다운 산속에 자리한 본 트랩 랏지(Von Trapp Lodge).


만원사례라서 숙박은 못 했으나, 알프스 풍의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는 있었다.

 

영화 '매디슨카운티의 다리'(1995년 작)로도 유명한 지붕 있는 다리(covered bridge)는 1800년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노스탤지어를 유발하는 이 다리는 미국 사람들이 열광하는 '옛것'이다. 1800년대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버몬트는 미국에서 covered bridge를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주이다. 숫자로만 말하면 펜실베이니아주, 오하이오주에 더 많으나 면적대비로 버몬트주에 가장 많다.


그 당시 다리에 지붕을 올린 이유는, 목조다리가 비에 삭아 무너져 다시 짓게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제 철근으로 지으니 지붕있는 다리가 필요 없어졌으나 버몬트에는 100개가 넘는 covered bridge가 잘 보존되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스토우 근처의 커버드 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