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미국 대륙횡단 여행기-여섯 번째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Day-10, 사랑은 움직이는 것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탁실로 향했다. 이 캠프장은 호텔에서 운영하는 곳답게 널찍하고 깔끔한 세탁실에 신형 세탁기가 많이 구비되어 있다. 세탁실과 같은 건물에 있는 샤워 시설도 관리인들이 항시 대기하고 계속 청소해서 늘 청결하고 널찍하다. 샤워하는 동안 여행 중에 쌓인 세탁물을 상큼하게 정리하고 나니 비가 올 듯 말 듯 하다.

 

Visitor center에서 본 정보에 의하면, 비 오는 날엔 Jackson lake lodge에 가서 놀면 된다고 쓰여 있는 게 기억나서 그리로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가는길에 짧은 하이킹 코스로 가장 인기있다는 Targat lake trail 코스를 살펴보자며 트레일 시작점에 들러봤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해가 날 듯 하고 비도 그치는 듯 하여, 짧고 쉽다는 3마일짜리 Targat lake trail을 아침 운동 삼아서 걷기로 하고 입구의 지도를 확인했다. 그런데 5.9마일짜리 trail을 하면, 다녀온 청년들이 아름답다고 하던 두 개의 호수와 시냇물을 볼 수 있다는 걸 발견하자, 예정은 이게 아니었는데 이걸로 가자는 충동구매형 결정을 내렸다. 시간으로 봐서 점심도 필요하고 비라도 오면 돌아오는 길이 멀어 홀딱 젖을 텐데, 차 안에 있는 사과와 간식거리 주섬주섬 챙겨서 짊어지고 젖은 숲을 향했다. 젖은 숲의 파인 향은 유난히 더 짙었다. 
 
비 올듯한 날씨에 준비도 미비하게 나서는 하이킹인지라, 사진찍느라 지체하지 말고 목적지까지 원샷해야 된다고, 늘 맘이 급한 배달의 자손 남편이 나에게 신신당부하는데 거의 압박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5분도 못 걷고, 여기선 사진을 안 찍을 수가 없네, 하면서 먼저 멈추는 남편이다. 심히 아름다운 경치가 죄인이다. 어제까지의 트레일은 잊게 되고 다시 우리의 가슴속을 다 차지해 버리는 아름다운 티탄의  트레일! 이곳은, 관광버스 세워서 보는 눈엔 보여주지 않는 비경들이 너무 많은 곳이다. 
 
 백록담보다 더 높은, 해발 7000피트에선 Bradley 호수를 만나고 조금 내려온 지점엔 Targat호수가 있다. 여기선 얕은 물에서 skinny dip(벌거벗고 수영) 하는 금발 머리 4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기가, 이 호수를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 엄마는 아이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여 옷을 다 벗겨 호수에 들어가게 해줬다고 한다. 유럽의 비치에선 발가벗은 아기들 많이 봤는데 미국에선 처음 본다. 
 


▲Targat 호수에서.

 
호수가에서 점심 겸 간식으로 요기하고 다른 하이커들과 사진을 서로 찍어줬다. 우리같이 은퇴한 노부부들, 여름 바캉스온 가족들, 그리고 남남 커플들도 종종 보였다. 


봉우리들 사이의 계곡을 따라서 내려오는 길은 침엽수가 주를 이룬 이곳에선 흔치 않은 활엽수인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광활한 초원에 펼쳐진 English garden(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의 이상적 모습을 모델로 한 조경)의 연속이다. 오늘 새로 만난 노란 야생화, butter and eggs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져, 어제까지 내가 사랑한 Lupin과 Indian paint brush는 더는 나를 설레게 하지 않는다.

 


▲'버터와 계란'이란 이름의 야생화.

 

사시나무라고도 불리는 자작나무는 여기선 Aspen이라고 한다. 미세한 바람에도 바르르 떠는 나뭇잎은, 잎을 들고 있는 손목에 해당하는 부분의 단면이 동그랗지 않고 네모라서 그렇게 떠는 거라고 한다. 잎이 금빛으로 물드는 가을엔 신라의 왕관 장식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떨림과 검은 무늬의 크림색 나무 등걸이, 최고경관의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나무이다. 
 
어제까지 본 비경들은 오늘 본 경치들 앞에서 다 잊히고 만다. 자연은 늘 충만해서, 부족할것이 없고 옛것이 아쉬울 일도 없다. 늘 새롭게 가슴이 꽉꽉 차오르게 해준다. 이생의 장막에서 사는 동안, 무엇에든 집착하고 아쉬워할 이유도 없는 거다. 
 
Plein air painting은, open air painting 즉 풍경화 그리는 걸 프랑스말로 굳이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걸 Rocky mountain Plein air artist 들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Visitor center에서 엊그제 배웠다. 메밀꽃밭에서 작업 중인 artist가 보여, 가까이 다가가 그리는 걸 봐도 되냐고 하니 명함을 주면서 선뜻 허락했다.

 

전업 작가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Plein air artist group이라며. Visitor center 전시 봤는데 당신 그림도 있냐고 물으니, 네가 기억을 못 한다니 없는가 보다며 예술가 특유의 자존심의 촉을 세운 까칠함을 드러냈다.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니, 전시한 작품들 중, 굵은 붓질의 터치가 인상 깊고 내 맘에 닿았던 작품들이 기억나서 그 얘길 했더니 자기 작품이었을 거라고 한다. 휴, 예민한 예술가들과 대화할 땐 뒷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야외에서 풍경화그리는 장르를 굳이 프랑스말로 Plein air painting라고 한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던 날씨에, 3시간이면 족한 코스를, 시작 전의 굳은 다짐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도 느긋하게 즐기고 사진을 찍고 찍고 또 찍느라 4시간 반 걸려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비가 진짜 내리기 시작한다. 

 

캠프로 와서 Marmot 노는 거 쳐다보며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고 비가 오는 날 가보라는 Jackson lake lodge로 온다. 자연 가운데 튀지 않는 모습으로 숲속에 숨어 있는 유서깊은 이 호텔은, 광대한 와이오밍의 이미지와 꼭 어울리게 크고 높고 넓은 라운지가 있고, 티탄의 번화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사람들로 붐빈다. 토요일이라 결혼식도 진행 중이다. 호텔 안에 있는 상점들 중 한곳에 들어가 야생화 씨앗을 발견하고 무조건 집어 들었다. 심을 땅도 없으면서. 
 
이렇게 또 하루를 보내고, 아담한 산장 같은 우리 숙소 호텔과 달리 규모로 봐서 와이오밍의 진수 같은 이 호텔 벽난로 곁에서 비오는 날의 편안한 저녁을 즐긴다.

 


▲잭슨호숫가 호텔의 로비.

 

Day-11, 안식일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따스한 날씨다. 오늘 하루도 어딘가 쑤시고 다니며, 여기 온 보람을 일구기 위해 열공, 아니 열심히 놀아줄 수도 있는 몸 상태지만, 앞으로 남은 여정을 위해, 그리고 한곳에 오래 묵는 여행의 진수, 그곳에 사는 척하기, 즉 여행 와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여유를 누려 보기위해  캠프에서 안식하기로 한다. 
 
망설이던 이 여행을 떠나올 수 있게 용기 주신 대학 선배 부부께서 이곳을 지나는 길에 들러주시기로 한 날이기도 하다. 온종일 진빠지게 놀 거 다 놀은 다음에 피곤한 몸으로 손님을 맞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지 한참 되어온다. 쥔장이 피곤해 보이는 집에서 손님이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체력의 안배도 친구에 대한 배려이며 hospitality의 중요한 요소다. 
 
재작년쯤 펜실베이니아 주립공원에서 캠핑할 때, 주일 예배를 그곳 amphitheater(노천극장)에서 은혜롭게 드린 기억이 나서 호텔 데스크에 물어보니 이곳에도 있다고 한다. 안내서에 적힌 대로 10시에 노천극장으로 가니, 젊은 처자와 엊그제 호텔 편의점에서 카운터보던 청년이 예배 인도자였고. 조지아주에서 매년 이곳에 온다는 은퇴 부부와 우리가 예배자이다.

 

1951년 Yellowstone 국립공원에서 시작된, 국립공원선교회 소속 젊은 사역자들이다. 통나무 십자가를 뒤에 두고 통나무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하는 26세의 Dave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전업 청소년 사역자로 일하다가 와이프와 이곳에 와서, 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파트타임으로 국립공원 선교회에서 사역 중이라고 한다.

 

 ▲우리 애들보다 어린 26세 청년 사역자에게 듣게 될 걸 기대하기 힘든, 고난에 대한 메시지다.


우리 인생에서 편집해 버리고 싶은 많은 고난과 우여곡절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그분과 더 닮아가는 거라고, 특별하거나 새로울건 없는 말씀이었으나 노천극장에 서서 말씀을 선포하는 26세 건장한 남자를 보니, 30세 즈음 산상수훈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상상된다. 저 정도로 건강하고 젊고 흠없는 모습이셨겠구나... 복음서가 비주얼을 동반하며, 이 땅에 잠시 오셨던 하나님의 어린 양을 상상해본다.
 
햇살이 눈 부신 캠프에서 점심을 먹고 공중부양되는 느낌으로 해먹에 누워 태양이 주는 우주급 조도 아래 독서 삼매경, 햇살이 덥혀주는 아랫목 같은 온기 가운데 따끈하게 몸을 덥히며 낮잠과 휴식의 사치를 누린다. 
 

예정 시간보다 1시간 일찍 5시에 선배님 일행이 도착했다. 선배 부부와 한국에서 오신 친구 두 분과 총 42박짜리 여행 중이시란다. 선배님 남편께서 작은 나무를 컵에 심어서 애지중지 들고 다니신다. 내가 좋아하는 향기로운 침엽수 Duglas fir. 화분들고 여행하는 나와 정서를 공유한다며 서로를 기뻐한다.

 


▲선배님 남편께서 작은 나무를 컵에 심어서 애지중지 들고 다니신다. 내가 좋아하는 향기로운 침엽수 Duglas fir. 화분들고 여행하는 나와 정서를 공유한다며 서로를 기뻐한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불량식품인 김치라면과 구워서 보관중인 갈비, 맥주로 이 먼 곳에서의 반가운 만남을 즐겼다. 캠프파이어 피워 올리면서 더 오랜 시간 함께 하고 싶지만 거의 매일 숙소를 이동하며 많은 곳을 보러 다니는 일정도 빠듯하고, 일행 중 한 분이 감기 기운이 있어서 식사 후에  한 시간 거리가 떨어진 호텔로 떠났다. 다시 호젓한 저녁이 찾아오고, 안식의 축복과 의미를 되새기며 하루를 접는다.

 

Day-12, 꽃길을 걸어보다 
 
남편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머리 싸매고 샅샅이 읽은 국립공원 안내책에 의하면 Solitude lake에 꼭 꼭 꼭! 올라가 봐야 한다고 쓰여 있다고 한다. 그런데 거리와 고도가 겁이 나고 회색곰도 겁나서 선뜻 가겠다고 못 하고 있는데, 살짝 머뭇대는 척하던 남편이 두 주먹 불끈 쥐며 거길 꼭 가야겠다고 한다.

 

가기도 겁나고, 안가기도 어정쩡해서 아침 일찍 떠나야겠다고 서두르는 남편에게, 왜 이렇게 서두르냐며 짜증 내는 내가 짜증이 나는지라 둘이서 한판 부딛히려다가 기운도 딸리고 여행 와서 이러면 안되지 하는 마음에 서로 참는다. 
 
가다가 힘들면 난 돌아온다는 합의로 백두산 천지보다 더 높은 곳에 호젓이 있어선지 Solitude(고독)라고 불리는 빙하 호수를 향하여 편도 7.5(12km)마일을 나선다. 지난번에 Inspiration point 갈 때 가파른 경사로 생각보다 시간이 두 배나 걸려서 놀란 적인 있는 나로서는 그 곳을 지나 한없이 더 가야 한다는 소리에 은근히 겁이 났다.

 

올라가는 데만 7시간 걸린다고 하니 혹시라도 경사가 심해서 죽음의 행진이 되는 것은 아닐까, 회색곰이랑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등등의 생각으로 두려웠다. 남편은 오늘 갈 길이 멀다며 나에게 사진촬영 금지령을 내렸다. 자기가 먼저 멈추고 사진 찍으면서, 내가 찍으면 민폐란다. 
 
비장한 심정으로 등산용 지팡이 잡고 앞만 보며 올라가니, 지난번에 45분은 걸린 듯한 지점까지 30분에 날아온다. 흠...이렇게 가면 셰넌도어에서 하이킹하던 평균대로 시간당 2마일은 갈 수 있겠다 싶은 자신감으로 두려움을 밀어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눈앞에 새롭게 펼쳐지는 계곡의 아름다움이 비로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봉우리들 사이로 맑은 물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을 두 시간가량 오르니 아랫동네에서 이미 피고 진 꽃들이 고도가 올라가며 다시 나타나고, 이제까지 본 English garden은 다 잊어라는 수준의 아름다운 야생화 초원이 나타났다.
 
▲야생화 꽃밭 사이 꽃길을 걸으며 내가 이런 꽃길도 걸어보는구나 하는 감동이 물밀 듯 밀려온다.
▲두려움을 이기고, 비지땀 흘리며 경사를 오르고 오르니 꽃길도 걸어보는 게 우리 인생이구나 싶다.
 
 여기 와서 살살 강도 높여가며 하이킹을 해서인지, 3시간 15분 만에 별로 큰 어려움 없이 오지 않고 떠났으면 진짜 억울했을 호수에 도착했다.  빙하가 손에 닿을듯 가깝게 보이는 산속의 호수, 3개월된 아들을 짊어지고 바람처럼 걸어 올라온 젊은 부부가 호숫가에서 점심 먹으며 아기에겐 수유하고 있다. 건강하고 예쁘기 짝이 없는 그림이다. 
 
우리도 호수를 만끽하며 가져간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차가운 호숫물에 피곤한 발도 씻었다. 리즈 위더스푼의 최근 영화 Wild에 나오는 것 같은 배낭을 메고 비박하며 back country camping하고 있는 많은 사람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눈다. 그들은 모두 몸과 맘이 건강하게 보인다. 동부에서도 많이 온다. 
 
▲Solitude, 고독의 호숫가 차가운 빙하 물에 발을 담가본다.
 
호텔 라운지에서도, 하이킹 중에도 유럽 사람들을 많이 본다. 특히 프랑스인들이 많은데, 알프스나 피레네는 너무 많이 가봐서 여기 오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은 영어를 진짜 못했다. 수려한 티탄의 계곡에도 대접만큼 커대란 종을 목에 멘 소떼들과 사람 사는 집들의 그림을 덧입히면 알프스의 샤모니 골짜기랑 비슷할 수도 있다. 개발되지 않은 원초적 자연... 이것이 미국만의 자랑이다. 
 
올라갈 때 헉헉대며 갔으니 내려올 땐 거저 미끄러져 금방 내려와야 맞다고 생각했는데 내려오는 시간도 올라가는 시간과 거의 비슷하다는 발견에 매번 놀란다. 이미 지친 다리를 끌고 내려오느라 그런가? 하이킹 마일을 줄이려고 다시 제니 호수를 건네주는 shuttle boat에 오르니, 하루종일 맑던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날씨가 도와줘도 너무 도와주는 거 아닌가 싶어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다.  
 
등산용 지팡이 덕분인지 부상 없이 긴긴 꽃길을 걸어 왕복 15마일의 여정을 무사히 마쳤다.  점심시간 1시간 포함해 사진도 살금살금 찍어가며 7시간 반의 여정을 잘 마치고 돌아와, 어제 손님 접대로 충분히 지어놓은 하얀 쌀밥에 고기 반찬으로 산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도 "건강하게" 그리고 뿌듯하게 하루를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