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피렌체에서 만난 르네상스 2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Day-3, 보티첼리의 흔적을 따라서
 
어젠 하루를 뚝 잘라 반나절만 살고 잠자리에 드니, 새벽 1시 넘어도 말똥거려서 할 수 없이 수면제 반 알 삼키고 아침 8시에 기상하는 데 성공했다. 여유로운 아침을 보내고 10시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피렌체의 두오모 앞을 지나며 출근 도장을 찍는다. 두오모 뒷골목에 거주해보는 벅찬 감동을 매일 음미해보려고 한다.


▲오만가지 색의 대리석을 색종이처럼 오려 붙여 지은 피렌체의 두오모를  매일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지난여름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을 여행하며, 뉘른베르그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르네상스 화가인 알브레트 뒤러와 찐하게 만나 그의 흔적을 따라 여행한 것처럼, 이 겨울 피렌체에서 나의 감성을 뚫고 깊이 들어 온 예술가는 보티첼리이다. 

 


▲작품 가운데 그려 넣은 보티첼리의  자화상.


Alessandro di Mariano di Vanni Filipepi라는 길고 긴 본명 대신 작은 술통이란 뜻의 별명, Botticelli라고 불린 artist가 피렌체에서의 나의 여정을 이끈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간 그는, 뮤즈였던 시모네타의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가 묻혔다는 Ognisanti 성당에 찾아갔는데 관람객을 위한 시간표에 쓰여 있는 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무덤을 확인하지 못했다.  

 

성당은 보티첼리가 평생 떠나지 않고 살았다는 동네에 있다. 보티첼리의 아버지는 가죽과 금세공업자였고, 보티첼리는 비교적 서민 동네였다는 구역에서 살았다. 그의 무덤이 있다는 성당은 12세기에 지어져 아르노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천년 가까이 건재하고 있다. 자그마한 동네 성당이다.  
  


▲Ognisanti 성당 앞의 Facade.

 

영어 이름인 플로렌스만 마음에 새기고 기차 타고 처음 피렌체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기차역에 플로렌스라는 이름이 없고 피렌체라고만 쓰여 있어서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앞 Facade.

 

그 기차역의 이름은 산타마리아 노벨라라고 하는데, 역전에 있는 성당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아름다운 성당은, 최초로 원근법을 이용한 그림을 그려 르네상스 미술의 새로운 길을 열어놓은 마사치오(Tommaso di Ser Giovanni di Simone)의 프레스코 벽화가 있어서 더욱 유명하다.

 

기하학적이고 평면적인 기법으로, 라틴어 성경을 읽지 못하는 평민들에게 성경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그려진 중세의 그림과 구별되게, 입체적인 기법으로 그린 최초의 작품이다. 인간성의 회복이 르네상스 예술의 명제라고 보는 관점도 있으나, 르네상스 시대가 기독교적인 영성을 떠났다기보다는 더욱더 깊어진 면이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마사치오가 최초로 원근법을 이용하여 3차원으로 그린 프레스코 벽화, Holy Trinity.

 

마사치오는 바사리의 기록에 의하면 그 시대 가장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 중 하나였다고 하는데 아깝게도 26세에 요절했다. 그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친근하게 느껴지는 별명으로 부르는 것을 좋아한 듯, 그의 본명 토마소의 마소에 치오를 부쳐서, 어설픈(clumsy) 토마소라는 뜻으로 마사치오 (Masaccio)라고 불렀다고 한다.

 

보티첼리가 긴 본명 대신, 작은 술통이라는 뜻의 보티첼리로 기억되고 있는 것과 같다.  때로는 자조적이기도 하지만 풍류 있는 호를 붙여 불렀던 우리 선대의 예술가들과 비교되는 별명들이다.

 

지난번엔 겉모습만 보고 감탄하고, 로마 시대에 경주장으로 쓰였다는 성당 앞 광장에 선 야외장터에서 기웃거리며 길거리 쇼핑만 하다 말았지만, 오늘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자세히 보았다. 14세기에 지어졌고, 도미니칸 수도회에서 지은 교회로는 피렌체에서 제일 오래된 성당이라고 한다.

 

본당은 박물관/미술관이지만 미사를 드리는 작은 채플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성스러운 기도처라고 느껴졌다. 미사가 있는 성당을 보기 힘들었던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피렌체의 성당들에서는 매일 미사가 드려진다. 

 

▲이태리 사람들은, 대리석을 깎아서 레이스처럼 만든다.  대리석을 저렇게 정교하게 깎아 놓은, 수백 년 전의 이태리 사람들 손끝이 경이롭다.


피렌체에서 5~6마일을 걷고 헤매며 하루를 보낸 후, 개선장군처럼 귀가하면서 집에서 160m 거리에 자리한, 구글이 추천하는 steak restaurant으로 간다.  3코스 디너와 키안티 와인 한 병이 70유로! 미국에선 절대로 만나볼 수 없는 저렴한 가격이다. 와인을 위해 만들어진듯한 맛인, 본토 가공육들 살라미, 프르슈또 등 소금기 충만한 첫 번 코스를 지나서, 토스카나 사람들은 고기를 어찌 숙성하는지 제일 잘 아는듯한 훌륭한 T-bone steak, 그리고 홈메이드 같은 다정한 맛의 케이크 한 조각까지 싹 다 비우고 훠이훠이 걸어서 나의 14세기 고택으로 돌아와 뿌듯한 하루를 접는다.

 


 

 Day-4,  Oh... David!
 
보슬비가 오락가락하는 피렌체, 오늘 아침에도 아름다운 두오모를 지나서 내 여행가이드 책에서 피렌체 볼거리 No.1으로 올라온 곳, 아카데미아( Galleria dell' Accademia)로 향한다. 메디치 가문에서 미술학교로 설립한 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건물이다.


이곳은 그냥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위해 만들어진 미술관이라고 보면 된다. 피렌체에 널린, 대한민국에 대입하면 국보급 12~16세기 회화들도 많이 있으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주인공인 미술관이다. 유명한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널려있어서, 수많은 그림 중에 보티첼리 그림 찾기를 하며 관람했다.

 

그의 그림엔 거의 같은 얼굴의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하므로, 그의 작품 속 여인의 얼굴을 확인해보는 재미도 있다. 너무 많은 작품들을 다 볼 순 없으니, 집중적인 관심을 한 작가에게만 품는 것도 여행객으로서의 미술 감상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미술 교과서에서부터 본 작품, 너무너무 유명해서 새로울 게 없을 것 같아서 지난 여행엔 와보지도 않은 다비드. 이번엔 왜 이 조각상이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건지 나도 느끼게 되길 원하는 마음에서, 요리 보고 조리 보고 자세히 보고 멀리 보면서 감상했다. 우피치와 같은 입장료를 이 작품 한 개로 뽑고자 작심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생명을 불어넣은 대리석이, 내 감성 안으로도 걸어 들어왔다. 그의 아름다움과 디테일과 작품의 멧시지가! 
 
Artist 이기 전에 시인이었다는 미켈란젤로의 풍부한 감성과,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묵상한 구원을 향한 그의 영성과, 작품을 통해 피렌체인들에게 주고 싶던 메시지가, 그의 예술성으로 아름답게 시각화되어 형상화된 것을 깊숙이 느끼고 왔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보이게, 혹은 읽히게, 혹은 들리게 해주되 아름다움에 그것을 올려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미술로 내려오면, 다른 얘기가 되지만) '그 메시지가 얼마나 깊은 울림으로, 얼마나 위대한 아름다움에 실려서 전달되고 공감을 부르는가'가 명작의 정의라는 결론을 내리는 중이다. 르네상스가 태동하던 시대의 피렌체인들에게, 로마가 있는 방향을 강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아름답고 순수하고 건강한 젊은이 다비드가 얼마나 감동과 위로와 희망과 자랑이었을까!  


너무 길고 좁아서 별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던 대리석 덩어리 안에 숨어있던 다비드상을 미켈란젤로가 다듬어서 꺼내어 준 거라는 세기의 명작! 요즘 기준으로 두상이 크게 만들어진 이유는, 원래 두오모 꼭대기에 설치하려고 만들었기 때문에 아래에서 올려다봤을 때 균형이 맞도록 비율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골리앗을 물리쳐버린 승리자의 모습이 아닌, 골리앗에 맞선 젊고 싱싱하고 용기 충만한 모습을 표현한 것도, 새롭게 태동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상징같이 느껴진다. 전통에 의하여 할례를 받았어야 맞는 유대인 소년인 다윗(한글 성경 속 이름)의 누드가 할례받은 것을 표현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다윗 당시의 할례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 표현된 것처럼 상징적으로 포피를 살짝만 잘랐다는 견해가 개인적으로 공감이 된다. 완성되었을 때 6t이나 되어 두오모 위로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여 처음 의도와는 달리 베키오 궁전 앞에 세웠으나, 1873년 보존을 위하여 아카데미아로 옮겨왔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메디치 가문은 이 천재가 그들의 방대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 컬렉션을 보고 배우며 성장하게 지원해 주었다. 그런 배경에서 자라온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표현된 남성 누드의 아름다움은, 그가 고대 미술에서 보고 배운 대로 사춘기 소년의 풋풋한 남성미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으로 너무나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 천지창조의 인물들은, 고대 조각상을 그린 거라는 느낌을 주는 이유도 그런 성장 배경에서 근거한다고 생각된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더 오래 아카데미아에 파묻히고 싶었으나, 갑자기 한기도 느껴지고, 외식을 매일 해대니 염분을 너무 많이 섭취한 듯, 뜨거운 숭늉이 마구 당겨서 할 수 없이 2시간 만에 조퇴했다. 미국 같으면 입장권 한번 사면 종일 들락날락 할 수 있을 텐데, 관광이 주 수입인 이 동네에선 한번 나가면 다시 못 들어온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걸어서 10분인 집으로 와서 가져온 누룽지로 숭늉을 한 솥이나 만들어 마시니 상태가 호전된다. 가져온 밑반찬으로 누룬밥 점심. 이탈리아 음식 실컷 사 먹으려구 누룽지 쪼금 가져온 거 후회막급이다. 
 
오후 수업(?)은 집 앞마당 같은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 방문이다. 현재 피렌체 시청으로 사용되는 건물이며, 르네상스 시대에는 메디치의 궁전이었다. 이곳은 거주목적이 아니고 통치목적으로 지어진 궁전인데, 그 위용과 빈틈없이 빼곡한 예술품 도배(?) 정신이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생각나게 한다. 빈 공간이 있으면 큰일 날듯한 예술품 장식과 컬렉션.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문화적인 영향력을 끼친 메디치 가문의 엄청난 예술 사랑을 역사학자들이 여러 시각으로 분석한다.  그중에는 이자를 받아 돈을 버는 은행업으로 부를 일군 것에 대하여 종교적인 죄책감이 있던 메디치가, 전통적으로 교회에 바쳐지던 예술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면서 속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거라는 견해도 있다.

 


▲우피치 바로 옆집인 베키오 궁전 앞에는 다비드상의 복제품이 있다. 원래 여기 설치된 것을 1873년에 아카데미아로 옮겨서 보관 중이다.

▲아카데미아에서 본 보티첼리 작품, 그리스 신화를 그린 작품이 유명하지만, 기독교적인 그림을 훨씬 더 많이 그렸다.
 
겨울비가 오는 피렌체의 체감온도는 실온보다 훨씬 낮다. 수백 년 된 5층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좁은 골목들이라서 여름엔 시원한 그늘이 되지만, 겨울엔 섭씨 10도 정도지만 해를 가리니 훨씬 차갑게 느껴진다.

 
베키오 궁전의 탑은 비가 와서 못 올라가게 한다. 비 안 올 때 다시 오면 입장료 없이 올라가게 해준다고 하는데,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이 동네라서 별로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된다. 안되는 건 칼같이 안되고, 되는 건 반드시 되는 미국과 달라서 불편한데 정겹기도 하다. 

 


 
숭늉으로 잘 다스린 몸, 으슬으슬 비 오는 이 겨울 여행을 건강하게 마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