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문학산책

채현기 작가의 隨筆 '팬덤(fandom)에서 배우다'

포천문인협회 사무국장과 포천예술인동우회 사무국장 역임

 

 '팬덤(fandom)에서 배우다' 

 

나라는 잘살게 되었는데 개인의 삶은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는다. 날로 심화하는 빈부 격차를 실감하고 청년층 취업난과 더불어 불안정한 현실 탓에 삼포 세대니 오포 세대니 하며 삶의 재미가 덜한 게 현실이다.

 

삶을 재미로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없는 삶만큼 힘든 삶도 없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이자 문화학자인 요한 호이징가는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규정하며 호모 루덴스라 불렀다. 인간의 이런 욕망은 사회, 정치, 예술,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되었다.

 

서로 좋아하는 관심사를 함께하는 많은 사람은 팬덤으로 발전했고 현재 대중문화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팬덤은 어느덧 시대의 새로운 풍속도가 되었고 많은 사람이 즐기고 있다. 무언가에 혼신으로 몰입하면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잊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밥 먹는 것도 잊고, 누군가 부르는 것도 잊은 채 일하게 된다. 그런 순간에는 슬픔도 고통도 아픔도 잊고 오직 그 일에만 몰두한다. 좋아한다는 것은 오로지 한 곳만 보는 몰입이다. 한 곳에 마음을 쏟고 어떠한 실익도 따지지 않는 순수한 마음이다.

 

얼마 전, 방탄소년단(BTS)의 데뷔 10주년 기념 축제가 여의도 일원에서 벌어졌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모여든 아미(ARMY:방탄소년단 공식 팬클럽)들을 위한 BTS 10주년 기념 공연과 전시회, 야간 불꽃 향연이 펼쳐졌다. 서울 시민도 밤새 화려한 불꽃 축제에 취했고 거리는 BTS를 추앙하는 아미들로 넘실대었다.

 

모두가 함께 즐거웠고 행사가 끝난 후에도 주변에선 쓰레기 한 조각도 찾을 수 없었다. 문화의 변방이었던 한국에서 한 아이돌 그룹이 세계를 열광하게 했고 그들이 불렀던 노래는 많은 사람을 위로했고 더불어 한국의 k-컬쳐를 알리는 브랜드가 되었다. 과거 우리는 팬덤의 큰 힘을 경험했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붉은 악마'가 대표적이다. 더 넓은 광화문 거리를 붉은 물결로 수놓았고 경기장마다 붉은 악마 신드롬은 세계인이 주목하는 이색 볼거리였다. 그날 이후 20년이 지나면서 스포츠 팬덤은 한국을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만들었고 박지성, 박찬호, 김연아, 박세리, 손흥민, 이강인 등. 걸출한 스포츠 스타 탄생을 보여주었다.

 

스포츠 브랜드 가치는 국가 경쟁력을 키웠고 삼성, 현대, LG와 같은 세계 일류 기업의 탄생까지 시너지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팬덤은 스타의 추앙을 넘어 경제, 문화, 역사의 가치를 갖는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팬덤은 사람도 바꾼다. 언제나 예민했던 아내가 어느 날, 나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졌다. 집안에서 늘 있었던 아내의 잔소리도 사라졌고, 매주 다니는 문학 강의에도 이제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단 하나, 아내의 관심사에 내가 관심을 끊어주면 우린 모두가 평화롭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두가 힘들어하던 시간, 혜성과 같이 나타난 한 가수는 많은 이에게 코로나를 이기고 극복하는 힘을 주었다. 그는 이제 아내의 빛이고 희망이며 삶의 목적이 되었다. 비단 아내 혼자만의 일은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임영웅 팬덤은 이젠 하나의 트랜드가 되었다. '미스터 트롯'을 시작으로 '사랑의 콜센터'를 거치면서 함께 했던 가수들은 물론 임영웅이란 히어로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팬심은 없던 힘도 나게 하는 신묘한 힘을 가졌다. 3년여 시간의 코로나 팬데믹으로 공연 기획사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맹위를 떨쳤던 코로나의 확산도 이젠 눈에 띄게 감소하며 소위 위드코로나를 체감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임영웅 전국 콘서트에 시작을 알렸다. 공연 티켓을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지정된 날짜에 티켓팅이 시작됨과 동시에 매진 사태가 빚어졌고 티켓팅에 실패한 일부 열성 팬은 웃돈을 얹어 티켓을 구하는 일까지 생긴다.

 

다행히 티켓팅에 성공한 아내는 드디어 전국 투어에 나서게 된다. 광주, 대전, 인천까지 팬심의 꼭짓점 서울 콘서트의 티켓팅 불발을 위로하며 열심히 히어로 굿즈를 어루만진다. 광주 콘서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내를 서울역까지 마중 나가고 인천 콘서트는 휴일인 관계로 나들이 겸 콘서트 장소인 송도까지 기사 노릇을 자처했다.

 

인천 송도 콘서트홀 주변은 ‘영웅시대’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유튜브에서는 임영웅 출근을 실시간 방송하고 하늘색 티셔츠의 물결은 인천 앞바다를 옮겨 놓은 듯하다. 공연 티켓을 구매하지 못한 팬들은 공연장 주변에서 새어 나오는 음향으로 위안받는 진풍경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공연을 마친 임영웅의 '퇴근 모습'은 어김없이 실시간 유튜브 방송으로 이어졌다. 4번 출구로 빠져나가는 임영웅의 차량을 발견하자 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경호업체의 인원으론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팬들의 이동 물결은 흡사 영화 '월드 워' 에 등장하는 좀비의 무리가 까마득하게 높은 담장을 넘어가는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팬덤이란 가히 무서운 힘이고 에너지였다.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기성세대에게 있어 팬덤은 잃어버린 나의 정체성을 찾고 위안을 얻는 수단이 된다. 자녀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세대가 이제는 자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행동한다. 40대 이상 여성들, 쌈짓돈을 모아 손주에게 용돈 줄 생각을 하던 노년층까지도 자신의 관심사와 선호를 위해 나서고 있다. 지금까지의 통념과는 다르게, 나이를 초월하는 소비 지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다.

 

'팬덤'이란 어제오늘 생겨난 개념은 아니지만, 10~20대 젊은 여성 중심의 전유물로 취급되던 시기는 이제 지났다. 적극적인 팬덤의 활동은 세대 간 격차를 좁혀주기도 한다. 엄마의 늦은 덕질을 본 자녀들은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지만, 점차 부모의 취미 생활을 응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많은 자녀가 부모의 취미 생활에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미스터트롯 출신 가수의 팬카페에서는 부모를 대신해 티켓팅과 스밍을 하고 있다는 자녀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팬덤 문화는 소수를 위한 유희를 넘어 대중과 공유하는 매개적인 활동이며, 사회적인 문제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집단성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팬덤 문화는 더 이상 소수 열혈 팬끼리만 즐기는 문화가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으로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팬덤이 더 많은 사람과 같이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을 팬덤으로 유입하기 위해 활동 방식을 조정하고 대중의 거부감을 해소하려는 노력도 함께 한다. 이런 노력을 통해 팬덤 문화가 소수의 문화에서 대중의 문화로 확대되고 팬덤의 소통 방식과 홍보 문화는 주류 문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팬덤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팬덤의 거대한 영향력과 대단한 홍보력 덕분에 어디에서나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게 된다.

 

팬덤 현상은 GDP의 성장과 생활 수준 향상으로 소비 여력이 확대된 것도 주요인이겠지만,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를 통해 쉽게 모이고 서로 팔로우(follow)하면서 소통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 이런 변화의 중요한 원동력이다.

 

게다가 장년층과 노년층까지 이런 흐름에 동참한 것은 다분히 코로나가 추동한 변화다. 커뮤니티를 통해 관심사에 대한 정보와 콘텐츠를 소비하고 서로 소통하면서 관심은 로열티가 되고 팬덤으로 발전한다. 팬덤은 순수한 관심과 열정의 집합으로서 '아무것도 묻고 따지지 않는' 소비 행동의 동기가 된다.

 

코로나 이후에 사람 사이는 적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고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의 정도도 심해졌다. 이런 사회적 모순을 펜덤을 통해 풀어가면 좋겠다. 건강한 팬덤으로 같은 몰입감을 가진 사람들에 관심과 배려를 하고, 집단 속 약자를 살피는 관계 개선으로 성숙한 팬덤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바야흐로 팬덤의 시대다. 앞으로의 사회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할지 무척 궁금해진다.

 

 

 

채현기

●문학 경력

2015년 현대시선 시 부문 등단

2019년 에세이문예 가을호 수필 부문 등단

2015년~ 포천문학, 마홀문학, 계간 에세이문예 동인 활동 중

사)포천문인협회 사무국장 역임

포천예술인동우회 사무국장 역임

brunch.co.kr (카카오 브런치) 작가 활동 중

시집 '백여시들 수다를 떨며' 공저

 

●수상 경력

2016년 반월문화제 운문 특선

2017년 포천사랑백일장 운문 차상

2019년 경기도 독서문화 유공표창 경기도지사상

2019년 사)포천문인협회 공로상

2022년 서울지하철 창작 시 공모전 당선

2022년 포천시 전국 독후감 공모전 수상(장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