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문학산책

이병찬 시인의 시 '공간', '늦장마'

대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포천문화원 포천학연구소장

 

 

공간

 

시나브로 내리는 빗줄기

메마른 땅이 목을 길게 쳐들고

얼굴 가득히 받아내고 있다

 

잔잔하게 적셔지는 땅의 숨결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요한 평화

 

외로운 자만이 의미를 찾고

고독한 자만이 사색하고 집중한다

 

외로움과 고독은

텅 빈 공간이 아닌

또 다른

성찰과 성장의 공간

 

정갈한 찻잔에 담긴

지난 가을이 주고 간

따뜻한 국화향기

 

얌전하게 놓인

작은 방석 하나를 꺼내

고즈넉이 자리 잡는다

 

 

 

늦장마

 

돌아오는 길은 지루하고 무더웠다

진회색의 촘촘한 하늘 틈새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윈도브러시를 쓰기도 애매한

 

거리의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걷고

그들을 바라보는 내 표정 또한 시들하고

 

여름 끝에 물폭탄을 맞아 사람들을 경악시킨

강남역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뻔뻔하다

 

쇼윈도에 선명하게 번쩍이는 외국산 마크를 달고

거만하게 들어앉은 자동차는 더 가증스럽고

 

허공에 매달린 40억짜리 아파트는 아래 삶들과는

무관하게 위풍당당했다

 

변두리 반지하방에 살던 여자는 고양이를 찾으러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어느 하늘 길로 들어섰는지

 

열린 맨홀 속으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간 황당한 사람들은

지금쯤 한강 어느 언저리에 떠 있는지

 

어제 일들을 말끔하게 걷어낸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여전히 평온하고 안녕하시다

 

 

 

위천(爲川) 이병찬(李秉讚)

문학박사

대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포천문화원 포천학연구소장

동농이해조선생기념사업회장

종자와시인박물관 운영위원

포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