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5천년을 열흘에 본 이집트 여행 3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12월18일

 

거리를 오갈 때 보이는 풍경과 사뭇 다르게 호사스러운 궁전, 아니 호텔에서 아침을 맞는다. 상다리가 휘어지고 넘치도록 차려진 호텔 뷔페로 조식을 먹고 관광버스에 오르니, 앞이 잘 안 보이는 흐릿한 날씨이다. 우리 동네는 겨울인데 이 여행에는 어떤 계절의 옷을 챙겨와야 할지 고민하게 한, 으스스한 가을 날씨이다. 수은주 온도와 체감 온도는 사뭇 다르니, 현지의 기온만으로 옷을 챙겨오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 번의 여행으로 배웠다. 어딜 가더라도, 양파처럼 여러 겹으로 입었다가 벗을 수 있는 옷들이 필수이다.

 

버스는 고대문명 7대 불가사의로 너무나 유명한 피라미드를 보러 기자(Giza)로 향한다. 카이로 근교로 호텔에서 7㎞ 정도 떨어져 있다. 나일강의 동쪽인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이동한다. 이집트 고대 문명의 모든 무덤은 강의 서쪽에 있다. 나일강이 생명줄이던 그들에게 해가 떠오르는 동쪽은 현세 삶의 상징이며, 해가 지는 서쪽에는, 다시 해가 떠오르길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곳, 무덤이 위치한다.

 

기자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진 거대한 피라미드(쿠푸 왕의 무덤)과 두 개의 피라미드는 사진에서 수없이 보았으나, 실제로 보니 그냥 인간들이 쌓아 올린 산이라고 보면 될 듯한 규모이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채석장이 바로 근처에 있었다고 하니 산을 깎아서 옆으로 옮긴 거라고 할 수도 있겠다. 1×2.5×1(m) 크기, 6.5~10톤 정도 무게의 석회암 2백만여 개를 정교하게 쌓아 올린 건축물이다. 근래 들어 마천루들이 세워지기 이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가장 큰 피라미드의 주인 쿠푸가 기원전 2500년경의 파라오였다니. 그 시대에 세워진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5천 년 동안 이곳에서 파라오들이 꿈꾸던 영원 같은 시간을 지켜보고 있다. 백 년도 못살고 사라져 간, 우리 같은 성정을 가졌을 한 인간이 자신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이런 무덤을 준비하며 살아갔다니. 파라오들의 정신 세계가 피라미드보다 더 신기하다고 느낀다.

 

 

이집톨로지(Egyptology)라고 이름 붙은 학문, 이집트학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적어도 13,000~40,000명의 인부들이 27년 정도 걸려서 지었을 거라고 한다. 노예들이라고도 하고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었을 거라고도 하는데 학설일 뿐이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와서 보고 압도되어, 이곳에 있는 세 개의 피라미드의 돌들을 프랑스로 옮겨가면 1피트 두께 10피트 높이의 성벽으로 프랑스 전체를 둘러쌀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했다고 한다. 야심 충만했던 그는 이런 거대한 무덤을 세운 파라오의 자아(Ego) 크기와 자신의 자아 크기를 비교해 봤을 것 같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 내부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 몸을 구부리고 앞사람의 엉덩이에 바짝 붙어 10여 분간 불편한 자세로 올라가 파라오의 석관이 남아있는 밀실까지 들어가 봤다. 밀실은 천장이 시원하게 높고 널찍한 공간이라 왕궁의 한 방 같은 느낌이다. 발견될 당시부터 그의 석관은 비어 있어서 그의 미라는 아직도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관광객으로 잠시 들른 이집트의 유적 가운데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의 답은 백과사전으로도 다 못 채울 것 같다. 호기심 충천한 고고학자들은 아직도 새로운 학설과 주장들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피라미드 앞에 서 있는 스핑크스는 얼굴은 파라오의 모습일 거라고 짐작되고 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앉아서 어제 서쪽으로 저문 해가 아침에 다시 떠오르듯 몸을 떠난 영혼이 피라미드에 잘 보관된 유기물 육신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미라를 지키고 있다고 느껴진다. 미라도 없어지고 보물들도 텅 빈 거대한 피라미드 앞에서…….

 

 

피라미드 뒤편으로 가니 수많은 낙타가 관광객을 태우려고 기다리고 있다. 초등학생 정도의 아들과 아빠가 모는 낙타의 등에 올랐다. 낙타가 일어서니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높아서 무서웠다. 당장 내리고 싶은 걸 참고 모래밭을 걷고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내렸다. 남편은 나와 달리 더 오래 낙타를 타고 싶은데 벌써 내린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나는 말보다 훨씬 불편한 낙타를 교통수단으로 의지하여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다행이라 여겼다.

 

 

고대 문명의 불가사의인 기자의 피라미드를 밖에서도 보고, 사방 1m 좁은 비밀 통로로 들어가서도 본 엄청난 경험을 소화해내기도 전에 다시 버스에 올라 기자에서 차로 50분 거리(27㎞)쯤 떨어진 사카라(Saqqara)로 이동한다. 사카라는 나일강 동쪽에 있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나일강 동쪽에 있는 도시(예를 들어 멤피스)에서 치리하던 파라오를 위한 무덤이 강의 서쪽에 위치하는데 그 거대한 묘역을 네크로폴리스라고 부른다. 라틴어로 죽음을 뜻하는 네크로(Necro)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polis)가 합해졌으니 ‘죽음의 도시’라고 직역할 수 있다. 무덤을 공사하던 수만 명의 인부들이 그곳에서 살았을 테니 ‘도시(Polis)’라고 불러야 맞다.

 

3,000년 동안 묘역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카라의 하이라이트는 최초로 세워진 피라미드,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다. 기원전 2,600년경의 파라오 조세르에게는 학자이며 의사이며 건축가이던 고대의 다빈치 같은 사람 천재 재상 임호텝이 있었다. 임호텝이 계단식으로 높이 쌓아 올리는 피라미드를 지어 바쳤는데 우리가 아는 피라미드들도 그 안은 계단식으로 쌓은 후에 밖을 마무리하여 사각뿔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계단식 피라미드도 왕의 석관이 남아 있는 비밀의 방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조세르의 피라미드로 들어가려면 거대한 문과 신전들을 지나는데 로마의 원형 경기장을 연상케 하는 넓은 마당도 남아 있다. 이집트 신전의 회랑의 거대한 돌기둥을 보고 흉내 낸 것이 그리스·로마의 기둥들일 거라는 유추를 해본다.

 

 

사카라에는 귀족들의 무덤도 남아 있다. 5천 년 전의 채색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 당시의 일상이 그려진 벽화들을 현대미술과 닮았다고 느끼면서 얼마 전 읽은 미술사 책의 서두 ‘미술의 수준은 인류 역사와 함께 계속 발전해 오지 않았다. 이미 고대부터 최고의 수준에 다다른 예술이다’를 소환한다.

 

호텔로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카이로 거리 풍경의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공동 주택(아파트 포함)이 철근이 삐죽삐죽 보이는 완공이 안 된 모습인데 그 안에서 주민들이 살고 있다는 거다.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재산세가 너무 비싸서(매년 집값의 10%를 부과) 그렇다고 한다. 준공이 안 된 상태로 살면 5년간은 세금을 안 내기 때문에 그런 상태로 살다가 5년이 지나면 공사를 다시 시작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주거 환경은 물론 도시 미관이 엉망이다. 비현실적인 재산세를 줄여달라고 아우성쳐도 재산세를 줄여주면 다른 세금도 줄여달라고 할까 봐 못 줄인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고 한다. 아이소어(Eyesore, 시야를 괴롭게 하는 것)라며 미관상 기준에 못 미치는 어떤 것도 동네 주민 자치회 차원에서 용납 안 하는 미국에서 살아온 내 눈이 아주 괴로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