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버몬트(Vermont)주의 단풍 1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필자 김은성 작가.

 

 

미국은 면적이나 독립적인 행정체계나 경제력으로 봐서 하나의 국가 같은 50개의 주가 모여 미연방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이루고 있다. 기회가 허락된다면, 지나가는 길에 자동차 바퀴로라도 50개 주를 한 번씩 밟아보고 싶다는 바램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보지 못한 주가 일곱 주 정도라 실현 가능성이 있을 것도 같다. 

 

▲버몬트주는 바다를 면하고 있지 않은 주이다. 동서로 80마일, 남북으로 160마일, 남한의 1/4 정도 크기의 작은 면적에 인구는 우리나라 경기도 일산과 비슷한 60만 명이 산다. 


2022년 가을에는, 미디어보다는 그곳을 다녀온 자인들로부터 아름답다고 많이 들은 바 있는 최고의 단풍을 보러 버몬트주를 방문해 보았다. 좋은 여행이 되려면, 날씨가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일정 지역을 어느 계절에 방문하는가에 따라서 여행의 추억과 만족도가 달라지니, 한번 가볼 거라면 그곳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계절에 방문할 수 있다면 최고의 행운이다.

 

버몬트주는 코네티컷, 메인,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로드아일랜드주와 함께 17세기 초 유럽인들이 건너와 정착하기 시작한 신대륙의 땅, 뉴잉글랜드라고 불리는 동북부 지역에 속하는데, 그중 유일하게 바다를 면하고 있지 않은, 충청북도 같은 주이다. 동서로 80마일, 남북으로 160마일, 남한의 1/4 정도 작은 면적이고 인구는 경기도 일산과 비슷한 60만 명, 두메산골 같은 작고 구석진 주이다. 


버몬트(Vermont)라는 이름은 이 주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완만하고 넓게 펼쳐진 초록산(Green mountain)의 프랑스어(Vert Mont)에서 유래한다. 이름처럼 주 전체가 산자락(Green mountain range)이라서 특정 지역으로 가지 않고 어느 길이든지 달리면 차창 밖 풍경이 단풍놀이 파노라마라고 생각하면 되는 곳이다. 
 
자동차로 운전하며 주마간산으로 단풍을 보려면, 다른 지역엔 아직도 나뭇잎이 푸른 10월 초, 버몬트주로 가서 아무 도로나 운전해 가면 숨 멎을 듯 아름다운 단풍으로 가득 찬 산들이 도로를 따라 끝도 없이 계속된다. 선명한 단풍의 색도 아름답지만, 단풍놀이의 스케일도 압도적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전부 덮어버린 눈부신 단풍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은.

 


▲차창 밖 버몬트주의 풍경.

 

버몬트의 대표적인 특산물은 메이플 시럽(maple syrup)이다. 한국에서 고로쇠 물이라고 부르는 단풍나무 수액을 조려서 농축한 시럽이 메이플 시럽이다. 주로 아침에 와플에 부어 먹는, 독특한 향기가 있는 단 시럽이다. 수액을 40배로 농축한 제품이라 값도 비싼 편이다. 


버몬트의 단풍이 특히 아름다운 이유는, 메이플 트리(Maple tree)라고 부르는 단풍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불타는 듯한 빨간 색이 선명하게 단풍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개발되지 않은 산과 구릉이 주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어딜 봐도 단풍이고, 가을에 기온이 급히 뚝 떨어지는 기후 때문에 나뭇잎이 더욱 선명한 빛들로 물들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지 않는 남쪽에선 아름다운 단풍을 보기 힘들고, 고도가 높거나 특별한 지형으로 가을의 차가운 공기가 나뭇잎을 만져야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다. 특별한 관광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통이 편리한 것도 아닌 버몬트이지만, 조용한 가운데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곳의 단풍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10월 한 달간 1백만 명에 이른다.

 

유명한 국립공원 옐로스톤은 개장하는 3~4개월 동안 4백만 명이 찾는다고 하니, 거의 그 정도 수준의 인기라고 볼 수 있다. 10월 첫 두어 주에 몰리는 관광객을 수용할 숙박시설이 부족한지라, 시설에 비해서 숙박비가 상대적으로 비싸고 빈방도 구하기 힘든 여행길이다. 

 


▲버몬트주 전체가 이런 풍경이다. 


우리 거주지에서 버몬트주의 초입까지 8시간 정도 차를 운전하고 가서, 섭씨 10도 근처로 내려가 이미 어깨가 움츠러드는 쌀쌀한 날씨에 낯선 동네를 자동차로 발로 여행하는 것은,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안락한 집을 떠난 고달픈 여정이기도 하다. 사진작가들이 찍은 작품들이나 여행 작가들의 책, 영상으로 만나면 굳이 발품 팔고 비용 들여가며 갈 필요가 없을 듯도 하다.  

 

그러나 현지에서만 체감되는 그곳의 정서와 문화, 그리고 카메라 렌즈가 담지 못하는 시각적인 감동이 심박수를 높이고 뇌세포를 깨우는 짜릿함이 있어서 다시 괴나리봇짐을 싸고, 모험 같은 여행길로 나서는 것 같다. 


요즘은 달라졌겠으나 2003년 자동차로 고국을 여행할 때, 아름다운 경치마다 뜬금없이 러브호텔들이 서 있어서 안타까웠다. 그런데 충청북도를 여행하니 러브호텔이 눈에 띄지 않아서 반갑던 기억이 있다.

 

물을 따라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게 마련인데 내륙에 있는 그곳은, 예로부터 오가는 발길이 적어서 좀 더 점잖고 보수적인 동네라서 그런가 싶었다. 개발도 원하지 않는 듯, 구석에 조용히 숨어 있는듯한 내륙 속의 작은 나라 버몬트주도 그럴 거 같다는 예상을 깨고 내가 지금껏 가본 미국의 여러 주 중에 가장 개방적, 진취적인 성향의 동네라고 느끼고 왔다. 


주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지만 17세기 초 이곳을 처음 탐험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유럽인들은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영토전쟁에서 영국이 이겨서 뉴잉글랜드로 소속되었다. 뉴욕주 같은 덩치 큰 주가 합병하고자 압박을 했으나 각 나라의 애국심 못지않은, 자신들의 주에 대한 자부심으로 지켜내어, 작지만 독립적인 행정 단위로, 연방 상원에 당당히 두 명의 상원의원을 보내는 주로 남아 있다.

 

인구 4천만인 캘리포니아주와 인구 60만의 버몬트가 같은 숫자의 상원의원을 연방의회로 보내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중의 하나가 2016년 대선 때 신선한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Burnie Sanders)이다. 그는 뉴욕주 출신이지만 대학 졸업 후 버몬트주로 와서 정착하여 시장, 하원의원, 상원의원을 거쳐 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 경선에서 경합하며 많은 젊은 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사회주의적인 개혁 진보 성향의 정치인이다. 



▲버니 샌더스의 저서 '우리의 혁명'이라는 제목의 책 표지.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라도 덩치 큰 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국의 50개 주의 하나로 존재하고 있는 이 작은 주는, 그만큼 강한 존재감을 지키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버몬트는 기업들을 유치하고 경제적인 번영을 추구한다기보다 환경을 보존하고 옛날 모습을 유지하는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예술가들이나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버니 샌더스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 버몬트의 정서를 대표한다는 것을 현지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섬유업이 활발하던 버몬트주는 남부의 목화산업과 긴밀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음에도 노예제도를 열렬히 반대했고, 남북전쟁이 있기 100여 년 전인 1777년, 최초로 노예를 불법화한 주이기도 하다. 1776년에 미국이 건국했는데, 1777년에 이미 흑인 남성들에게 투표권도 부여한 버몬트의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의 뿌리는 그 땅의 역사만큼 깊다.


팬데믹이 미국을 덮쳐 암울하던 2020년, 버몬트주는 가장 낮은 감염률을 유지한 주이다. 보수적인 성향의 주들은 인구밀도와 상관없이 감염률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버몬트주의 현저하게 낮은 감염률의 원인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버몬트주를 방문해 보니, 그들은 새로운 시대와 가치관에 매우 개방적이고 환경과 지구촌의 이슈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들이라는 요인이 방역에도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된다. 


버몬트주의 부동산 10%는  뉴욕이나 보스턴 등 타지 사람들의 별장이고, 부동산이 창출하는 일자리와 세수가 주 정부의 중요한 수입원이기도 하다. 미국 영토가 한없이 넓어도 경치가 좋은 곳은, 외져도 부동산 가격이 비싸다는 공식은 여기서도 해당한다.


주 전체가 산자락이라 농토보다는 목초지가 많아서 낙농업으로 유명하지만, 요즘엔 예전보다 적은 수의 젖소가 더 많은 양의 우유를 생산하는 공장식 낙농업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한다. 버몬트를 상징하던 푸른 초장의 젖소들은 수익성이 떨어져서 요즘에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

 


▲서리가 내린 버몬트의 가을. 사진작가의 작품이다.

 

인구 60만이 남한의 1/4 면적에 드문드문 흩어져 사는 구석지고 작은 나라(?) 버몬트주. 딱히 와볼 일이 있을 거 같지 않은 동네이다. 단풍놀이로 굳이 와보지 않았다면 깊숙이 느낄 수 없었을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서를 체감하며, 눈부신 단풍이 빛내준 버몬트의 대표적인 마을들에 잠시 들러본 기록을 남겨두려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