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문학산책

隨筆 '도발적인 하루'

김나경·시인, 포천문인협회 사무국장

도발적인 하루

 

김나경·시인

 

자연 속에 들면, 가끔 위안을 받는 수가 있다. 누군가가 그리울 때는 더욱 그렇다. 식물원 같은 데를 소요하면 한결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있다. 자연은 어머니의 품과 같이 내 인생의 고민을 어루만져준다. 오늘 나는 18세 소녀와 즐겁고 즐거운 하루를 만들며, 삼십대 여인으로 살 수 있는 행복한 날을 보냈다. 세계 한민족 공연 예술축제가 포천의 관광명소 허브아일랜드에서 있으니 관람하러 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미망인협회 회장님에게 전화를 했다. “회장님, 우리 허브아일랜드가요.” 약속 장소에 미리 와계시는 회장님을 뵈니, 사소한 인간의 번민 따위는 한 입김으로 불어 내던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문인협회 일을 하면서부터 어른을 모시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한 남자를 사랑하듯 떠나는 것을 좋아한다. 동반에는 우정이란 게 있다. 어떤 험난한 코스라도 손을 붙들고 이끌어주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는 도중에 회장님이 내게 말씀하신다. "나는 말이야 올해가 81살인데 나는 18세로 즐겁고 예쁘게 살아." 그 말을 듣는 순간 키케로의 말이 떠올랐다. ‘신에 의해 부여된 인생은 짧지만, 즐겁게 보낸 인생의 기억은 영원하다.’ 공자님도 즐기는 게 최고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머, 회장님 정신연령이 나랑 같은 가봐." 속으로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아이구 자제분들이 걱정 많이 하실 것 같네." 계속 웃음이 나왔다. 산 중턱에 자리한 허브 아일랜드는 시작부터가 등산 코스다. 나는 연골이 파열되어 수술한 지 2개월째라 걷는 것이 불편하다. 81세이신 회장님도 무릎에 인공관절 수술을 하신 몸이다. 낮은 언덕을 오르는데 금세 땀을 흘리셔 걱정스러웠다. 한참을 올라 화원 앞에 도착한 우리는 기진맥진했다.


 하지만 나는 회장님 모습을 보고 얼른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덥죠. 아우 힘드시죠. 내가 라벤더 아이스크림 사 올께요." 나도 힘들지만 쪼르르 달려가 보랏빛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 왔다. 컬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이 기억나서, 분홍색을 택했다. 맛있게 아이스크림의 부피를 줄여나가는 회장님의 모습을 보니, 홀로 된 삶에 핑크빛이 감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 접시의 물로도 연못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즐거움에 찬 얼굴을 하고 계신 게 분명했다. 땀이 범벅인 채로 "이거 얼마야, 내가 다 사 줄께" 하신다. "아니에요. 어여 드세요." 그녀는 적자 인생을 사시는 듯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공연 전에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당 아테네홀까지는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는 지름길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회장님 말은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내가 안 된다고 고개를 흔들며 평탄한 언덕으로 돌아가는 먼 길로 손을 잡아끌었다.


언덕을 몇 발짝 오르자마자 숨 쉬는 소리가 거칠어지더니 금세 쌕쌕거리는 소리가 나고 컹컹거리기까지 한다. 나는 또 후회가 밀려왔다. "아이구 내가 무리한 거지. 회장님하고 오는 게 아닌데, 18세 소녀라더니." 그 소녀가 어찌나 땀을 많이 흘리는지, 좀 젊은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아테네홀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테네홀에서 베네치아 공연장으로 갈 때는 언덕길을 두고 멀다는 이유로 지름길인 돌계단을 선택하길래 나는 안 된다고 했는데도 고집쟁이 그녀가 갈 수 있다고 우겨서 돌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주춤주춤 뒤뚱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고, 소녀는 씩씩하게 나보다 더 먼저 돌계단을 내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백담사 추녀 끝에 걸어놓은 풍경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이다. 바람이 불어 비로소 그윽한 소리가 난다. 인생도 평지처럼 평탄하다면 어떻게 즐거움을 알겠는가. 힘든 일이 있으므로 기쁨도 알게 된다. 돌계단을 힘들게 내려온 덕분으로 그 도전에의 성공이 심금에 닿아서 인생의 교향악이 연주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고 했던가. 그 모습을 보고 내 어릴 적 어머니와 열일곱 가을에 산 밤 주우러 갔던 일이 생각났다. 깊은 산까지 올라갔는데 산 밤은 없고 주인 있는 밤이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는 빈손으로 가기 싫어 주인있는 밤을 따기 시작했는데, "누구냐?" 주인이 나타났다. 우리는 깜짝 놀랐고 주인에게 들키자 나를 두고 혼자 냅다 도망치던 젊은 날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엄마, 보고 싶다.’ 담석 수술하다 의료사고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첫 번째 기일이 돌아오고 있다. ‘사랑하는 엄마, 엄마 대신에 당신이 오늘 81세 회장님과 함께하는 하루를 주셨네요.’ 그녀는 81세지만 18세 소녀로 산다는 귀여운 엄마 같은 분이다. 우리는 정말 재미난 추억을 만들었다. 인생의 즐거움은 인생을 사는 인간의 생각에 달린 것 같다. 


베네치아 공연장에서 신이 난 그녀는 즐겁게 손뼉 치며 최고의 관객이 되었다. 그녀가 헤어지기 전에 내게 말해줬다. "오늘 데리고 나와줘서 고마워. 즐거웠어요." 남에게 조그마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을 갖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한 추억 속의 한 컷이 삶의 에너지로 되살아나니, 도발적인 하루는 참된 행복을 느낀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도 가고 있다. 나도 그녀를 따라가고 있다. 18세 소녀로 사는 법을 배웠다. 쉽지도 어렵지도 않을 그 길이 아득하지만, 아늑하게 느껴진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내 앞에 놓인 생은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아내어야겠다. 베토벤의 기도가 문득 깊은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오오, 신이여! 단 하루를, 진정한 환희의 단 하루를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참다운 즐거움이 저 깊은 음향이 나로부터 멀어진 지 오래됩니다. 오오, 나의 신이여! 언제 나는 다시 한번 즐거움을 대하게 될 것입니까, 그날은 영원히 오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 그것은 너무나 잔인합니다.” 

 

 

 

김나경
포천문예대학 시 수필 창작 과정 수료.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포천지부 사무국장.
2021년 <한국작가> 신인문학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