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피렌체에서 만난 르네상스 4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Day-6, 피렌체의 과학 시간
 
시차에 시달리느라 오늘 아침 눈뜨니 10시. 잃어버린 시간을 아까워하기보다 남아 있는 시간을 기뻐하자! 오늘은 햇살도 숨바꼭질하며, 종종 쨍 하고 볕 들 날, 아니 볕이 내리는 순간들을 선사한다. 

 


 ▲우피치 뒤쪽 아르노 강변에서 오랜만의 햇살을 즐겨본다.


르네상스 시대는 시간상으로 14세기에서 17세기로 역사에서 그리 긴 연대는 아니지만, 현대인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는 역사적인 시대 개념일 듯하다. 오늘은 그 시대 과학의 역사를 보여주는 갈릴레오 뮤지엄으로 간다. 

 


▲갈릴레오 뮤지엄.
 
이 뮤지엄은 아르노강을 바라보는 강가에 서 있는 피렌체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로, 무려 11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이층집도 호사였건만, 유럽사람들은 천 년 전에도 이렇게 높은 복층에서 살았다는 것은 매일 볼 때마다 경이롭다. 메디치는 예술에만 돈 쓴 것이 아니고 과학의 발전에도 엄청난 투자를 했는데, 요즘 개념으로 R&D(research and development 연구와 개발),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서 신기술을 개발해나간 거라고 하면 너무 인색한 평가일까?


지동설로 인해 교황청과 맞선 갈릴레오도 메디치의 녹을 먹으며 여유롭게 살 수 있었고, 목성의 행성들을 육안으로 처음 관찰한 후 '메디치의 별들'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사진처럼 갈릴레오의 손가락을 성물함에 보관한다.


박물관의 시청각 교육용 과학기구들이 웬만한 가구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궁전의 소장품이기에 아름답지 않으면 그곳의 공간을 차지할 수 없다는 이유뿐 아니라, 귀족들의 볼거리 제공 차원에서 시청각 교재로 과학의 원리를 설명해주는 데 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갈릴레오 뮤지엄에 있는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시청각 교재들.

 

예술품같이 심히 아름다운 시청각교재들을 보면서, 그 당시 메디치궁전 귀족들의 파티 장면을 상상해본다. 춤과 노래와 음식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새로운 과학을 소개하는 지적 유희도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빈 왕궁의 파티에 가면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연주했듯이, 메디치의 궁전에선 갈릴레오가 별자리를 설명해주었을 것 같다.  요새 유튜브에서 인문학 강의가 인기 끌듯, 그 당시 이런 아름다운 시청각 교재로 지적인 entertainment를 펼쳤을 것이라고 유추해본다. 인기 강사도 있었을 것이다.


화학, 의학. 물리학 등을 설명하는 온갖 과학기재를 보며 우리가 학교 때 보던, 시청각 교재라고 불리던 조악한 물건들이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정말 아름다운 망원경들이다. 


미술 시간만 계속하다가 잠시 과학으로 채널을 바꿨다가, 점심 먹고 다시 미술 시간이다.

 

보티첼리의 무덤이 있는 오그니싼티 성당에 세 번째로 가서 드디어 입장에 성공했다.  세 번 가서라도 보게 되어 매우 흡족했다. 관광 명소에 별로 등장하지 않는, 피렌체에선 그저 동네에 있는 성당이지만 다른 데 가면 초특급 국보일 것 같다.  12세기에 지어졌고, 무려 보티첼리가 벽화를 그린 아름다운 성당이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다. 

 


▲보티첼리가 그린, 참회록을 쓴 성 오거스틴 벽화가 고해성사하는 곳 위에 걸려있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22세에 요절한 Muse 시모네타의 발치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 글을 읽고 진짜 발치에 묻혔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같은 성당에 그녀 무덤의 옆자리  정도에 묻히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했는데, 오늘 직접 가보니 말 그대로 발치에 묻혀있다.


우리가 아는 아메리고 베스푸치도 묻혀있다. 그의 가문이 주로 지원하던 교회였던 듯, 명망 있는 베스푸치 가의 며느리인 시모네타는 아름다운 채플 가운데 자리에 화려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보티첼리의 무덤은 그 발치 옆 채플에 보일 듯 말 듯 하게 있다.

 

▲보티첼리의 무덤이 있는 오그니싼티 성당.

 

그녀에게 굳어진 눈높이로 인해서 평생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일까? 상대방과 교류나 교제 없이 한 이성을 평생 품고 사는 건, 상대방을 사랑했다기보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한 것은 아닐까? 단테가 베아트리스를 사랑한 것처럼, 평생 두 번밖에 본 적이 없고 편지 교환도 안 해본 여인을 평생  마음에 품고 산 것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된다. 자기애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면 남의 일이라고 너무 깎아내리는 걸까?


 
피렌체에서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이들의 탐구의 끝은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그들의 DNA에 심어진 듯한, 아름다움에 대한 블랙홀 같은 탐닉을 느끼면서도, 이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면 행복감이 스르르 스며든다.  김환기 화백도, 자고새면 붓을 드는 것을 '형벌'이라고 썼다니, 보는 이들에게 스르르 밀려드는 감동을 주기 위해 사투를 했을 예술가들은 그 때문에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사투 없이도  말씀으로 모든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으신 하나님께 도달해보려고, 봄부터 소쩍새는.... 아니, 피렌체는 그렇게 이어져 왔나 보다.

 

Day-7, 르네상스의 버려진 아기들
 
어젯밤엔 진짜 잠을 설쳤건만, 공기조차 형체가 있다면 아름다울듯한 피렌체는 나의 체력을 평소보다 상향 조정해주는 듯하다. 
 
오전수업으로 관광객들에겐 우선순위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가보고 싶었던 곳, 피렌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광장( Piazza Della Santissima Annunziata )으로 향한다. 이 광장은 뾰족한 첨탑 대신 동그란 Dome을 두오모에 앉힌 천재 건축가, 부루넬레스키(Brunelleschi)가 디자인한 병원과 고아원이던 건물이 있다.

 


▲브루넬레스키가 디자인한 최초의 르네상스 건축물이라는 고아원.

 

고대 로마 스타일의 둥그런 아치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하는 르네상스 스타일이다. 로지아(Loggia 베란다 같은)의 아치 사이의 푸른 테라코타는 로비아(Andrea Della Robbia)의 작품으로, 강보에 싸여있는 아기들 모습이다.


광장에는 화가가 성모상을 그리다가 얼굴을 완성을 못 해 고민하다 잠들었는데, 그사이 천사가 와서 완성하고 갔다는 기적의 성당이 있다.

 


▲천사가 완성한 것으로, 교황청에서 기적이라고 인정한 그림.

 

한 여인이 전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창문이, 그녀가 죽은 후에 닫으려고 하면 부르르 떨리고 가구들도 흔들려서 수백 년 열린 채로 남아있다는 저택도 있는 곳이다.



▲광장 왼쪽의 벽돌 건물 2층에는 항상 열려있는 창문이 있다.

 
병원 건물은 유럽 최초의 고아원으로 1800년대 후까지 운영되었는데, 버려지는 신생아들을 작은 창문을 통해 받아서 유모가 젖을 먹여 키웠다고 한다. 동시에 천 명의 아기들이 있었던 적도 있다. 피임이 없던 시절, 사연에 관계없이 원치 않는 임신을 이렇게 거두어준 르네상스의 박애 정신을 이곳에서 본다. 박애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도 외치던 구호인데, 15세기 피렌체에서도 태동하고 있었던 흔적을 이곳에서 만난다. 

 


▲아기를 받아들이던 작은 창문. 구구절절 사연을 묻지 않고 아기를 받았으나, 이 창살을 통과하는 신생아들만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 고아원에서 자라 부자가 된 상인이 교회에 헌정한 작품도 전시되고, 이곳에서 자란 유명한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도 있다. 신생아가 있는 소아과 병원에서 일한 나에게 특별히 가슴 시린 박물관이었다. 


고아원의 경제적인 운영은 실크 상인 조합에서 책임졌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새로운 흐름이, 예술, 과학, 문학, 철학 등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예라고 생각된다. 부자들이 고아원 재단을 은행의 개념으로도 이용했다고 하지만, 종교집단이 아닌 상인들의 조합이 자선단체를 경제적으로 지원하여 지역사회를 돌본 것은 서민들의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이 진화해간 증거라고 보인다.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중세를 깨운 르네상스 시대는, 새로운 문명으로 인하여 서민들의 삶의 질까지는 향상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 고아원의 역사를 보면서 새롭게 깨어나는 시민 정신의 좋은 예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