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에 목화가 좀 더 익어가며 가지가지에 달린 타래 속에서는 하얀 솜꽃이 망울망울 피어오르는데, 이때의 눈이 시리도록 하얀 모습은 그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감탄하게 한다. 그런데 사실 솜꽃은 낮보다는 달밤에 더 일품이다.
여름 지나 본격적인 가을이 되면 자연은 성장을 멈추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기에 바쁘다. 수확의 계절이다. 열매와 씨앗으로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가을걷이를 마친 들판과 냇가에 종류별로 앉아 있는 철새들이 어울려 우는 소리에서 계절을 깨닫는다.
'은혜로운 풍요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그를 환영하는 듯 코스모스, 칸나, 금잔화, 가을 장미, 설악초, 목화, 메밀, 부용화 등 온갖 꽃이 황홀하다. 나이가 들어 하늘은 퀭하니 높은데 고추잠자리 몇 마리 날아오르고, 하늘거리는 색색깔의 코스모스 모습을 보노라니 마음이 애잔하다.
내 고향 포천 인근의 한 공원을 찾았다. 산책로 옆 벤치에 무심하게 앉아 있자니 한기가 조금 느껴진다. 가을빛이 완연하다. 가로수로 심은 마가목에는 진노랑 열매가 성숙해 가고, 가을이 물들어 가는 노란색의 산수유나무 잎 사이사이에서 발그레한 열매가 수줍은 듯 얼굴을 내보인다. 구름 한 점 없이 드높은 연파랑 하늘과 잘 어울리니 보기가 좋다.
산책로, 자전거 도로에는 원색의 옷을 입은 행렬이 가득하다. 짙은 화장을 한 채 늘씬한 몸매를 뽐내며 달리는 원숙한 여성들의 날리는 머릿결과 바람결에 언뜻언뜻 섞여 풍겨오는 화장 내음이 필자의 눈과 코를 호사롭게 한다. 공원을 활 모양의 곡선으로 감싸 휘어져 내려가는 포도 너머로 까마득하게 펼쳐진 수만 평의 화전이 십여 개로 구획되어 각기 다른 꽃들이 피어오르고 있다. 장관이다. 반듯하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탈이지만, 이만한 크기 이만큼 다채로운 꽃밭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가을날의 호사에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다. 몸도 마음도 여유로운 오늘, 맑고 고운 예쁜 추억의 가을 정서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기분이다.
아이들의 조잘거림이 불러내는
몇 가지 어린 시절 정서
공원 주위를 더 둘러보니, 수세미 넝쿨이 30여 미터 길이의 녹색 아치형 터널을 이룬 산책로 옆에는 색색의 꽃밭이 구릉을 이루며 펼쳐져서 흐른다. 목화밭이 나란히 줄지어 있고 왼편으로 하얀 메밀밭, 백색의 설악초 꽃밭, 색색의 백일홍밭이 자태를 뽐낸다.
오른편으로는 금잔화, 코스모스, 해바라기, 칸나가 있다. 솜털 같은 마음으로 공원 벤치에 앉아 만개한 색색의 꽃을 감상하고 있는데, 주말을 맞아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함께 화창한 가을 꽃길을 걸으며 아득하게 사라지고 또 다가온다. 가족 가을 나들이 장소로는 이 공원이 제격이다.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어린이들의 웃음소리, 즐거운 조잘거림이 밭 사이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정적을 깨며 꽃 속으로 사라진다.
집을 떠나 혼자 있는 필자에게도 그리움과 상념의 바람이 세차게 일고 있다. 가을 정서가 평정심에 돌을 던지기도 하는구나 싶다. 깊고 깊은 추억의 게시판에 단단히 붙어있던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의 가을 소풍이 소환된다.
가을 소풍
초가을
누리 벌판 꽃길
코발트색 하늘 아래
아이들의 재잘거림
…… 웃음소리 꽉 차 흐르고
다리가 아프도록 걷고 싶다
여름 패션 잡지보다 더 화려한 꽃 잔치
분홍색 주황색 보라색 하얀색 빨간색……
구획되어 있는 밭들엔
백일홍 천일홍 금잔화 설악초 칸나 과꽃이 지천이고
애들의 환호성과 활갯짓 단란한 웃음소리가 물결쳐 흐르니
한낮 가을이 명랑하다
먼 옛날
하늘색 옥양목 치마저고리 고왔던 엄마
노랑 보라 들국화 길을 걸어
달맞이꽃 피어나는 산허리 휘감아
손잡고 가을 속으로 소풍 가던 추억에 물들다
-필자의 시-
목화밭, 그리고 고향 추억
보기 어려운 목화밭이 있다. 한국 목화, 이집트 목화, 터키 목화, 브라질 목화, 미국 목화 등 여러 나라의 목화가 정해진 곳에서 특색 있게 자라고 꽃들은 벌써 잎을 벌고 있다. 목화는 크기, 가지 모양, 잎사귀 등은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꽃 색깔만은 흰색, 연한 황색, 붉은색으로 한결같다.
그런데 목화가 찬란한 꽃을 두 번이나 피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늦여름인 8월부터 가을 초인 9월까지 배배 꼬인 꽃봉오리가 여러 색으로 꽃잎을 벌며 탐스러운 꽃잎을 피워낸다. 이때 푸르고 울창한 목화 숲에서 무궁화, 부용화처럼 계속해서 다발로 피어나는 목화꽃은 가을 하늘과 조화를 이루면서 너무도 육감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두 번째 목화꽃은 10월에 열매, 즉 타래가 성숙해지며 하얀 솜을 팡팡 터뜨리는데 이른바 솜꽃이다. 그건 꽃이 아니라 열매와 씨앗이라 하는 것이 정직한 표현이다. 솜 타래를 터뜨리기 전 덜 성숙한 푸르스름한 손톱 크기 타래는 군것질거리가 없던 60년대, 아이들의 좋은 간식거리였다.
목화 타래는 손톱보다 조금 커다란 크기이고 표면이 녹색일 때 손톱으로 눌러보면 말랑말랑하고 속이 연한 것이 맛이 좋다. 타래 속이 목화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면 맛이 없어 먹을 수 없다. 타래 껍질을 벗겨 솜으로 성숙하기 전의 하얀 속을 꺼내 입에 넣으면 달콤한 육즙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서너 개를 먹으니 들큼한 맛에 질려 더 먹을 수 없다.
가을볕에 목화가 좀 더 익어가며 가지가지에 달린 타래 속에서는 하얀 솜꽃이 망울망울 피어오르는데, 이때의 눈이 시리도록 하얀 모습은 그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감탄하게 한다. 그런데 사실 솜꽃은 낮보다는 달밤에 더 일품이다. 목화 타래가 익어가는 계절, 달이 높다랗게 떠오른 밤에 바라보는 목화밭 풍경은 하양의 향연이다.
어두운 밤하늘에 휘영청 밝은 달님이 불쑥 떠올라, 하얀 솜 타래가 끝없이 흘러내리는 목화밭을 비출 때의 환상적인 모습은, 마치 소복 입은 아낙네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기지개를 켜는 듯, 네 활개를 치는 듯 보름달을 맞이하는 모습인 양 싶다.
더구나 오늘은 그 옆 메밀밭에 소금을 뿌린 듯, 쌀 튀밥을 터뜨려 놓은 듯, 자그마한 흰 꽃들이 꽉 차 있다. 달뜨는 오늘 밤 화전은 가히 황홀경으로 보는 이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할 정도로 육감적이다.
밤 따기의 어릴 적 추억
야트막한 산자락을 오른다. 밤을 딸 요량이다. 나무에는 아람을 벌은 밤송이가 몇 개 달려 있다. 나무 팔매를 만들어 밤송이를 향해 힘차게 던진다. 정통으로 맞았다. 밤송이 두어 개가 땅에 떨어진다. 송이를 까서 알밤을 주머니에 넣는다. 이제 먹을 만큼 땄으니 더 이상 욕심낼 필요가 없다. 산에서 내려와 휘파람을 불며 개천가 소로를 따라 엄마가 일하는 밭으로 향하다 밭둑에 앉아 밤을 까먹기 시작한다.
밤은 속껍질을 깨끗이 벗겨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떫어 맛이 없다. 칼이 없으니, 입과 손으로 밤을 까서 먹어야 한다. 손으로 겉껍질을 깐 다음 속껍질을 이빨로 잘 벗겨 ‘퉤, 퉤’ 내뱉는다. 그런데 속껍질을 뱉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흰 적삼에 밤물이 묻으면 옷이 시커멓게 변색이 되고 그 시커먼 색은 지워지지 않는다. 엄마에게 심한 꾸중을 들을 것이다. 엄마의 꾸중보다는 늦여름 초가을에 입을 옷이 하나뿐인 아이에게는 그 시커먼 밤물이 든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녀야 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추석 무렵의 어린 시절, 내 고향 창수 장승거리 가는 산에서 밤을 따던 추억이다. 아람이 탐스럽게 번 밤송이를 향해 길쭉한 나뭇등걸을 던져 떨어뜨려 알밤을 꺼내던 영상, 밤송이에 머리를 맞을까 봐 머리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이던 영상 등이 기억의 저 뒤편에서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고 서서히 일어나 점점 더 선명하게 걸어 나오고 있다. 인간의 기억력은 그야말로 오묘하고, 위대하고 신비스럽다고 생각한다.
서재원 교수
. 창수초등학교, 포천중, 포천일고, 서울대 졸업
. 한국방송 KBS 편성국장, 편성센터장(편성책임자)
. 차의과학대학교 교양교육원장, 부총장
. 포천중·일고 총동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