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원 칼럼] 살며 생각하며

8월에 생각나는 역사의 가르침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KBS프로듀서·아나운서

 

미국이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서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묵인한 일,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의 치욕, 미군 철수 뒤 1950년 1월에 공산국에 대한 극동 방어선 ‘애치슨라인’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한 일,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이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하고, 지원한 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8월에 들어서면 생각이 깊어지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한제국(조선왕조)이 멸망하고 한일병합이 이뤄진 경술국치일(8월 29일)이 있고,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광복절이 있고, 8월에 한반도가 실질적으로 분단되었기에 관련 역사가 생각나서 그렇습니다.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정전 상황으로 남북 분단의 비극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반도 코리아는 남쪽의 대한민국과 북쪽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양분되어 첨예한 이념 대결의 상황, 서로를 주적으로 하는 엄혹한 정전 상황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열강들은 태평양과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중요 거점 한반도, 남북한 코리아를 둘러싸고 무력을 집중하며 대립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으로 이어진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기 직전인 1900년 전후에도 세계의 열강들은 이곳 한반도에서 힘의 각축을 벌인 바 있습니다. 대륙 침략의 야욕을 펼치던 일본제국주의, 한반도와 국경을 접한 청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동북아시아와 대한제국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힘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일본제국주의였습니다.

 

조선왕조의 임금 고종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일본과 청나라에 요청하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 한반도에 대군을 상륙시켜 동학군을 진압하고 청나라 및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합니다. 이어 미국의 양해를 받고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과의 합병에 성공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술국치로, 이 비극의 여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롯된 우리의 비극적 서사를 이야기하고 온고지신으로 삼고자 합니다.

 

경술국치 비극의 1주일

1910년 8월 22일 낮 1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이척은 창덕궁에서 대신들로부터 일본과의 합병을 보고받고,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 조약을 체결토록 한다. 이완용은 오후 4시에 예장동 조선통감부 관저에서 통감 데라우치와 나라와 백성을 일제에 넘기는 한일병합조약에 상호 조인하고, 서명해서 위임장과 함께 행정적으로 제출한다. 체결된 조약은 1주일간 발표되지 않다가 1910년 8월 29일에 순종의 조칙으로 발표된다.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개국한 조선왕조가 518년 만인 1910년 8월 29일에 문을 닫은 것이다.

 

고종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끊임없이 외교 관계를 요구하는 외세에 굴복하여 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청나라를 비롯한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세계열강의 무력과 외교 압력을 감당할 국력도 지도력도 없었다. 내부 개혁에도 실패하고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청나라군을 불러들인다.

 

일본군은 동학군을 진압하고,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 중 절대 강자가 된다. 그리고 1905년, 미국과의 비밀외교에서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묵인하는 조건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이른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는다. 그해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이것은 결국 1910년의 한일합병조약의 경술국치,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한반도의 일제 36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쇠약해진 조선왕조의 국력, 왕과 대신을 비롯한 대한제국 지도자의 무능력, 무소신, 무책임, 자주독립 의식 없는 줏대 없는 외세 의존 외교,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결국 세계 제국주의 열강의 야욕을 견디지 못하고 나라와 백성을 통째로 내어준 것이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이 시작된 1945년 8월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거세게 밀어붙이던 미국이 7월 16일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7월 17일, 미·영·소의 베를린 회담에서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에게 이 사실을 내비치며 태평양전쟁 참여를 설득한다.

 

소련군이 연해주와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면 태평양에서 지쳐있던 미군의 막바지 일본 본토 공격이 훨씬 수월해지고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군이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기민하고 영악한 소련의 스탈린은 8월 7일에 태평양전쟁 참전 명령서에 서명하고, 다음 날인 8월 8일에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다.

 

그리고 미국은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다시 원자폭탄을 투하, 태평양전쟁 승리의 쐐기를 박는다. 이를 목격하던 소련군은 8월 10일, 한반도까지 일본군을 밀어붙여 내려오고, 8월 13일에는 군대를 우리 청진항에 상륙시킨다. 8월 15일에는 일본 국왕이 항복을 선언하고 한반도가 광복을 맞는다.

 

조선왕조의 국왕 고종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려 일본군, 청국군을 불러들인 것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단초가 되었듯이 한반도 분단의 단초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북위 38선을 경계로 하여 군대를 남북으로 진주시키기로 협의한다. 이미 청진에 상륙한 소련군은 8월 26일에 평양에 주둔하고, 미군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다음, 9일에 서울에 도착한다. 그해 12월에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대표가 모여 이를 추인하며 한반도 남북 분단의 주요 결정들을 내린다. 남북한 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 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공동위원회 설치, 조선 독립 국가 수립을 돕는다(?)는 목적의 신탁통치를 하기 위한 방안을 만드는 것 등이 그 내용이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에 미국, 소련 군대가 행정·치안 등을 관할하는 각각의 군정청(?)이 마련되고, 미소 주둔 군대의 통치가 시작된다. 그리고 3년여 후인 1948년 8월 15일에 남한에 대한민국 민주 정부가 수립되고, 9월에는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 정부가 수립된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 전후의 미소 극한 대립의 냉전체제 소용돌이에 휘말려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참혹한 한국전쟁을 맞게 된다.

 

숨 가쁘게 변화했던 한국전쟁 직전의 국제 정세

1949년 3월,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남한 공격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하나 거절당한다. 몇 달 후인 6월,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한다. 9월에는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이를 공식 발표한다. 한편, 중국의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은 중국 공산당 모택동 군대에 패퇴하여 12월에 수행원 10여 명과 함께 타이완으로 도주한다. 중국 대륙의 공산화가 이뤄진 것이다. 그다음 해인 1950년 1월,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은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1월 12일, 미국의 공산 국가 방어선인 극동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내용의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김일성은 소련의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하여 3월 30일~4월 25일, 장기간 머물며 남침계획을 설명하고, 지원 및 승인을 받으며 중국 공산당 지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다음 달인 5월, 김일성은 박헌영과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공산당 모택동의 전쟁 승인을 받는다. 세계 1차대전에 버금가는 폭탄 등 무기가 사용되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해서 세계 3차대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한국전쟁 발발에 숨겨진 이야기이다.

 

한국전쟁은 대한민국, 미국을 포함한 유엔군 16개국(전투 부대 참여국), 북한과 중공, 소련(실질적 참전) 등 모두 세계의 20개국이 참전한 세계대전이다. 대한민국 군인, 유엔군 합해 27만여 명, 북한 및 중공군 60만여 명, 남북한 민간인 250만여 명, 모두 합해 33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나 정확한 통계는 알려지지 않는다.

 

반복되는 역사, 그리고 역사가 주는 가르침

지금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는 핵으로 중무장한 세계 초강대국 - 미국 중국 러시아, 세계의 경제 대국 - 일본과 대한민국, 실질적으로 핵으로 무장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 여섯 나라가 서로 합종연횡하며 외교전을 벌여 세를 불리고, 군사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몇 안 되는 초접전 지역이 한반도입니다. 그 와중에서 우리 남북한 코리아의 지도자들은 열심히 세계 초강대국의 지도자인 바이든, 트럼프, 푸틴, 시진핑, 기시다 등과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북한은 서로를 주적으로 삼아 더욱 격하게 비난하고, 무력 대결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종이 우리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일본군과 청나라군에 요청한 참담한 일, 고종이 세자와 함께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도피해 일 년 이상 동안 머물며 집무한 치욕의 ‘아관파천’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미국이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서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묵인한 일, 이어지는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의 치욕, 미국이 미군을 철수한 뒤 1950년 1월에 공산국에 대한 극동 방어선 ‘애치슨라인’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한 일,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이 한국전쟁 직전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하고, 지원을 약속한 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한반도 코리아의 지도자들 모두는 역사가 주는 준엄한 가르침과 그에 따른 엄정한 책임과 의무를 잊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 동포 모두는 그들의 결정과 행동을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한일합병, 일제 36년, 한국전쟁 발발에 원인을 제공하거나 야합한 자들을 단죄하지 않은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시정되어야 합니다.

 

 

 

서재원 교수

. 창수초등학교, 포천중, 포천일고, 서울대 졸업

. 한국방송 KBS 편성국장, 편성센터장(편성책임자)

. 차의과학대학교 교양교육원장, 부총장

. 포천중.일고 총동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