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5천년을 열흘에 본 이집트 여행 4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필자 김은성 작가.

 

 

 

▲파라오들의 거대한 석상과 오벨리스크가 맞아주는 룩소르 신전.

 

12월 19일

 

오늘은 아침 7시 비행기로 나일강의 상류, 룩소르로 떠나는 날이다. 새벽 3시반에 기상 전화가 올거라는데, 호텔이 아침 7시까지 단수라고 한다. 어린 날, 단수 소식을 들으면 어른들이 물통에 물을 잔뜩 받아두던 기억이 나서, 욕조에 물을 받아두고 잤는데 일어나보니 물이 거의 빠져서 얼마 남지 않았다. 비몽사몽 가운데  물을 알뜰하게 쓰며 씻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그 새벽에 아침이 준비되어 있다.

 

우리를 위해서 직원들을 동원해서 영업시간 몇 시간 전에 아침을 준비해줄 호텔은 미국에선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커피와 도너스정도 준비된다면 이게 왠 횡재인가 할 거다. 최고급 호텔에서 물이 안 나오기도 하고, 새벽 4시에 화려한 조식 부페가 차려질수 있는 것이, 아직 선진국에 들지 못한 나라를 경험하는 한 예라고 생각된다.

 

고객의 편리함을 위하여 저렴한 보수로 동원된 인력이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과 달리, 아무도 불편하지 않게 살기 위하여, 모두가 조금씩 불편을 감수하며 사는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역설적인 이론이 성립된다.

 

미국에 살다가 한국에 나가면 24시간 모든 음식이 배달되며, 적은 비용으로도 일상이 너무나 편리하게 돌아간다며 좋아하는 걸 보곤 한다. 그러나 그 편리한 나라의 행복지수가 낮은 것은 편리함을 창출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으로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새벽별을 보며 강행군으로 카이로 공항으로 실려가서, 복잡한 탑승 수속을 거쳐 1시간 남짓의 비행으로 룩소르에 도착한다. 하늘길로는 서울 부산 정도이지만, 도로사정은 좋지 않은지 육로는  8시간 이상 걸린다고 한다.

 

지도를 펼치면 아래쪽에 보이는 룩소르로 '내려가는' 거라고 해야할 것 같지만, 나일강의 상류쪽으로 가는지라 '올라간다'고 표현한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문득 있는듯한 룩소르 공항에 도착하자, 버스는 우리를  바로 카르낙 신전으로 싣고 간다.

 

고대 이집트는 북으로는 지중해에서 남쪽으로는 수단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땅을 치리하는 민족과 왕족은 7천 년간 다양하게 바뀌어왔으나, 이 나라의 영토는 동일하게 유지되어 왔다고 하니 그것도 신기하다.

 

고대 이집트는 남왕국과 북왕국의 통합 정권이었고, 룩소르는통합왕국의 수도로 수천 년 동안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수단 쪽에서 침략하는 적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북쪽의 수도에서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룩소르는 궁전이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유래된 이름이고,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성스럽다는 의미의 이집트 원어민어에서 유래된 테베(Thebes)로 알려져 있어서, 유럽에선 아직도 테베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밑둥이 둥그렇게 연꽃모양으로 마무리된 카르낙 신전의 돌기둥. 문양들에는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 압도적인 화려함을 상상해 본다.

 

룩소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노천 박물관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유적들이 나일강 서쪽에 위치한 묘역이지만, 이곳에는 동쪽에도 신전이 남아있다. 신들에게 제사 지내던 유적이 거대하게 남아있으나, 어디에도 그들의 주거지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수천년을 이어간 거대한 왕국의 파라오들이 천년 만년 남아있을 요란한 궁전을 짓지 않았던 것으로 추축된다고 한다.

 

요즘 기준으로, 주거환경에 관한한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놀랍도록 자유로웠던 왕들이었던 것 같다. 신들을 위한 신전과 다음 생을 위한 무덤에 모든 소중한 것을 투자하고 상대적으로 소박한 주택에서 '잠시'인듯한 이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어쩌면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이유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왕조가 바뀌기는 했으나 한 나라가 수천 년을 엄청난 풍요를 누리며 계속 되어올 수 있는 경이로운 역사가 가능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변변한 장비도 없던 시절, 인간의 노동에만 의지하여 세워져 아직도 남아있는 엄청난 건축물을 짓기 위한 사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고달픔에 지쳐서 나라를 뒤집어 엎어버리지 않고 묵묵히 그 나라를 수천 년간 유지했다는 역사가 거대한 유적들보다 더 놀랍다.

 

근대사의 지도자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현세의 부를 누리고 쌓는 모습으로 국민들의 지탄과 배척을 받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 아닌가. 국가의 3요소는 주권, 영토, 국민이 아니던가…. 그들이 세운 유적으로 이곳에서 '잠시' 살다가 간 존재의 흔적을 남겨놓은 고대 이집트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헤아려본다. 보이는 것(유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정신세계)이니까.

 

카르낙 신전은 기자의 피라미드 다음으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다. BC 1900년대에서 BC 300년대 헬레니즘 왕조가 오기까지 수십 명의 파라오들이 계속 증축해온지라 신전에는 전체적인 조화보다는 시대적 다양성이 버무려져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스나 로마의 거대한 석조 건축물보다 더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그들보다 적어도 2천 년 앞서서 세워져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는 믿기 힘든 현실과 대면해야 한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직선으로 내려오는 그리스 로마의 콜럼들과 달리 밑둥이 둥그렇게 마무리된 거대한 돌기둥들이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마무리된 기둥의 아랫단은 연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연꽃과 파피루스가 가장 신성한 식물로, 벽에도 곳곳에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거대한 돌기둥의 모양도 연꽃인 것이 신기하다. 연꽃은 매우 동양적인 식물이라고 생각해 온 나의 고정관념을 뜷고 들어온다. 뿌리는물속 진흙에 박고 물위로 올라와 꽃을 피우는 연꽃이 우주의 이치를 상징한다고 여겼다고 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연근이나 연밥을 먹느냐고 물으니 안먹는다고 한다. 그 맛있는 것을….

 

 

유럽인들이 오매불망 가져다 놓고 싶어한 오벨리스크가 돌더미들 사이에서 파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는 모습은 내가 봐도 너무 아름답다. 이집트 사람들은, 오벨리스크(라틴어로 작은 쇠꼬챙이)를 '하늘을 찌름'(tekhenu)이라는 의미의 이름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들이 좋아하는 피라미드 모양을 하늘 높은 곳에 올려놓고 종교적으로 심오한 뜻을 담아 세워놓은 성스럽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 유럽에서 많이 본 오벨리스크를 원래 있던 자리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가장 높은 것은 30미터 정도에 이르는데, 하나의 돌덩이에서 깎아서 만든 이 뾰족한 조형물을 어떻게 일으켜 세워서 수천 년을 쓰러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있는지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햇살 아래 카르낙 신전의 오벨리스크를 배경으로.

 

카이로 근처에 있던 오벨리스크 두 개는,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알렉산드리아로 끌고 와서 세워놨던 것을, 1800년대에 뉴욕과 런던으로 실어와서, 클리오파트라의 바늘이라고 불리고 있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본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의 아름다움, 하나의 화강암이라는 신비로움, 수천 년의 보이지 않는 세월을 담고있는 만져지고 보여지는 물질(Tangible object)을 만나는 경이로움에 압도된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이 파견한 분봉왕이  이 나라 저 나라에 선심써서 마구 보낸 거라며 가이드가 안타까워한다.

 

카르낙 신전과 근처의 룩소르 신전을 연결하는 3km 길이의 넓은(76m) 도로에는 1,000개가 넘는 스핑크스가 도열해 있었다고 한다. 2천 년 전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며 깔아놓은 길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놀라는데, 내가 어렸을 때 대한민국에서도 별로 본 적 없는 넓은 도로를, 무려 4천 년 전에 거대한 석상 스핑크스들로 장식해서 깔았다니, 이 또한 기함할 일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연인 마크 안토니와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여행으로 이곳까지 왔었다는 기록이 이곳의 석판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어마어마한 장면들이 고대의 실제 모습보다 덜 화려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카르낙 신전을 방문한 후, 우리가 일주일간 머물 나일강 유람선에 오르니 화려한 부페 점심이 준비되어 있다. 나일강 유람선은 1920년대부터 시작되어, 아가사 크리스티의 유명한 추리소설 '나일강의 죽음'의 무대가 되기도 한 배로 이곳의 관광을 책임지는 운송 숙박시설이다..

 

점심 식사와 휴식을 취한 후 해가 뉘엿뉘엿할 즈음 조명이 밝혀지는 룩소르 신전을 방문한다. 조명으로 아름다운 신전의 입구에는, 두 개 중 하나가  파리로 옮겨져 짝을 잃은 오벨리스크가 홀로 서있다. 파리 콩코드 광장에서 본 것과 똑같이 생긴 오벨리스크를 여기서 보니 깊은 감회가 스친다.

 

근대사에서 시민혁명을 주도한 프랑스가 혁명 이후 수도의 가장 중심부에, 고대 이집트의 가장 강력한 파라오였던 람세스2세의 치적을 새겨놓은 오벨리스크를 굳이 세워 놓다니, 매우 이율 배반적인 발상이다.

 

아름다움에 목숨을 건 듯한 프랑스 사람들이 제일 아름다운 오벨리스크로 골라서 뺏어온 것은 아닌데도 이집트 상형문자가 현대 미술처럼 새겨져 있어서, 다른 오벨리스크보다 더 아름답게 보인다. 그 당시 이집트를 치리하던 오스만 터키 출신 분봉왕이 프랑스가 이집트의 현대화를 도와준 답례로 선물했다는데, 현재 이집트 사람들은 우리가 준 게 아니니까 돌려달라고 아우성이라고 한다. 

 

 

룩소르 신전은 카르낙 신전에서 스핑크스가 양쪽으로 도열한 3km 대로를 걸어오면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 아니라 왕들의 대관식, 축제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파라오를 신격화하는 목적으로 지어졌을 것으고 생각된다. 로마제국이 와서 신전의 일부를 기독교의 채플로 바꾼 흔적들도 보인다.

 

▲조명이 켜진 룩소르 신전.

 

룩소르는 카이로보다 남쪽이라 그런지 날씨가 훨씬 포근하고 따스하여 12월의 저녁을 야외에서 쾌적하게 즐길 수 있다. 오늘부터는 나일강 위에 떠있는 4층 건물 같이 생긴 유람선에서 거주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