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미국의 르네상스맨, 토머스 제퍼슨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필자 김은성 작가.

 

내가 사는 동네,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시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는, 벚꽃 필 때의 제퍼슨 기념관을 꼽는다. 1912년 일본에서 배로 실어 와서 선물로 심어준 3천여 그루 벚꽃이 만개한 워싱턴 디시의 벚꽃 축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볼거리이며 사진작가들이 사랑하는 풍광이 펼쳐지는데, 제퍼슨 기념관이 보이는 사진이 가장 많고, 가장 아름답다고들 한다 .

 

▲토마스 제퍼슨. 1800년, 50대의 모습이다.

 

벚꽃이 만개하면, 관광객으로 뒤덮이는 디시에 가서, 제퍼슨 기념관 앞 층계에 앉아서 일본에서 온 꽃과 인공호수 건너편으로 보이는 미국 수도의 건축물이 어우러져 펼치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곤 한다.

 

주로 외관과 주변의 아름다움만 즐기곤 하다가, 여유가 있어진 요즘에야 기념관 안의 주인공 제퍼슨에 관한 전시물을 자세히 읽고 나니, 토마스 제퍼슨(1743년~1826년)은 미국의 다빈치(1452년~1519년)라고 생각되었다. 

 

▲네오클래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제퍼슨 기념관. 제퍼슨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방대한 전시물이 있는 박물관이다.

 

미술에 관심이 별로 없어도, 수십만 점의 소장품을 자랑하는 루브르 미술관의 최고 인기 작품인 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말년을 프랑스 왕궁에서 보낸 피렌체 사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정작 완성하여 남겨진 작품이 20점 미만이지만, 인류 역사에 근대를 열어젖힌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르네상스맨으로 불린다.

 

그의 천재성은, 예술에 국한되지 않으며 수학 과학 엔지니어링 철학 생물학 해부학 등, 많은 분야에서 보통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가 남긴 기록들을 분석해온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인물 중에 가장 뛰어난 슈퍼 인류(superhuman)로 인정되고 있다. 

 

▲다빈치의 자화상.(1515년경, 60대 초반 미술사학자 바사리의 기록에 의하면, 다빈치는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우아했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과학자 비트루비우스의 이론에 따라, 인간의 몸의 가장 이상적인 비율을 그려낸 다빈치의 드로잉은 서양문명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다빈치가 그린 태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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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르네상스를 지나 2, 3백년 후 근대로 오며 '갑자기' 역사에 등장한 신생국가이다. 비옥하고 광활한 국토를 차지하고 건국 이후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은 헌법으로 오늘날까지 거대한 국가를 유지하며 구대륙 유럽의 열강을 제치고 강대국으로 서 있다.

 

역사는 계속 변화하며 많은 제국들이 명멸해왔으나, 우리가 사는 시대에 패권을 가진 미국 건국의 기초에는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이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역사가들은 인정한다. 다방면에 걸친 방대한 인문학적인 경륜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것은 물론, 워싱턴 디시를 도읍으로 정하고 설계한 것도 제퍼슨이다. 


제퍼슨 기념관의 기록물을 찬찬히 읽으며, 제퍼슨이라는 경이로운 인간이 그 시기에 이곳에 있었기에 오늘날의 미국이 가능했다는 생각을 하며 다빈치가 떠올랐다. 문헌을 찾아보니 공식적으로 제퍼슨은 다빈치처럼 '르네상스맨'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식으로 학교에서 교육받지 않은 다빈치와 달리, 제퍼슨은 버지니아주에 있는 William and Mary 대학에 이르기까지 정식으로 좋은 교육 과정을 밟아온 법률가였다. 그러나 다방면에 걸친 새로운 지식의 탐구 정신으로 신생국인 미국을 깨우며 이끌어간 제퍼슨도 '르네상스맨'으로 불리고 있다. 


독립선언서에서 건국 이념의 초석을 놓은 것은 물론, 버지니아 주지사, 프랑스 대사, 국무장관,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중요한 업적들은 미국 역사의 주춧돌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나폴레옹 통치하의 프랑스로부터 사들여, 루이스와 클라크를 보내 탐험하게 하고 국토로 삼은 루이지애나주에서  몬타나주까지 관통하는 광대한 영토는, 그의 비전과 사상을 넘어 아직도 가시적으로 남은 그의 업적이다. 

 

▲흰 부분이 제퍼슨이 프랑스에서 사들인 영토다.

 

지난 4월 화창한 봄날, 디시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버지니아주 시골에 위치한 제퍼슨의 농장 몬티첼로(Monticello)를 방문했다. 르네상스맨이 대통령 퇴임 후 말년을 보낸 곳에서 미국의 다빈치를 만나본다.

 
몬티첼로가 자리한 샤롯빌까지 운전해가는 버지니아의 시골길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버지니아주의 슬로건, Virginia is for lovers처럼 '버지니아는 연인들을 위한 주'이다. 왜 그런 슬로건을 걸었는지 공감할 수밖에 없는 로맨틱한 풍경이다.

 

젊은 연인들이 주말에 몰려드는 와이너리,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는 농가가 계속된다. 핑크색 박태기꽃이 만발한 버지니아의 신록은 비옥하고 아름답다. 쭉 뻗은 하이웨이 대신, 완만한 구릉이 만든 푸른 초원 사이로 시골길을 구불구불 달려 몬티첼로에 도착한다.  

 

▲박테기꽃이 만발한 버지니아주의 봄.

 

몬티첼로(이탈리아리어로 '작은 산'이라는 뜻)는 이름에 걸맞게 작은 산 위에 지은 집이다. 저택이 있는 작은 산 주변으로 제퍼슨이 상속받아 소유했던 농장은 5,000에이커였으나, 현재는 2,500에이커 정도만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건축에도 조예가 깊었던 제퍼슨이 직접 설계해서 지은 네오클래식 건축의 저택과, 농장의 노예들이 살던 숙소, 그들의 작업장, 텃밭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넓고 비옥한 국토를 차지한 신생국이 부를 일궈나갈 길은 농업이라고 생각한 제퍼슨은 유럽에서 각종 식물들을 들여와 미대륙에서 어떤 작물을 키우고 어떤 꽃들을 심어야 할지 계속 연구했다고 한다. 제퍼슨이 심은 품종의 꽃과 나무, 작물들이 아직도 그곳에서 자라고 있다. 그는 새로운 국가의 부를 이룩하기 위하여 무엇이 좋을까 연구하며 퇴임 후 몬티첼로에서 노년을 보냈다.

 

▲제퍼슨의 텃밭에 무꽃이 피어있다. 왼쪽 건물들은 노예들의 숙소와 작업장이다.

 

대포 등 무기들도 디자인해서 만들었던 다빈치처럼, 제퍼슨도 많은 도형기와 기계 등을 디자인해서 만들어 썼는데, 그는 발명한 기계들에 대한 특허권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개발된 기술은 하루속히 널리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 같다.

 

▲제퍼슨이 최초로 만든 Swivel chair. 앉은 자리가 빙빙 좌우로 돈다.

 

건국의 아버지 중에 하나로 꼽히는 제퍼슨이 꿈꾸고 이끌어나간 신생국가를 위한 미래 비전 중에는 교육도 들어간다. 그가 디자인한 캠퍼스와 교육이념으로 세워진 대학 University of Virginia(UVA)도 몬티첼로와 가까운 곳인 샤롯빌에 있다.

 

버지니아 주립대학이면서 미국의 4천 개 대학 중 상위 1%에 꼽히는 유서 깊은 명문 대학이다. 제퍼슨의 아이디어로 학생과 교수들이 어울려 살며 가장 바람직한 배움의 환경으로 조성된 캠퍼스와 아름다운 조경 등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버지니아 주립대학 UVA 캠퍼스 전경.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것을 자신의 업적 중에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제퍼슨은 상속받은 농장에서 600여 명의 노예를 소유했다.

 

그중에 샐리 해밍스(Sally Hemings)라는 노예와는 자녀를 낳고 오랫동안 남녀관계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는 자손들의 DNA 연구로 인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샐리는 그의 아내 마사 제퍼슨(Martha Jefferson)이 제퍼슨과 결혼할 때 친정에서 데리고 온 흑백 혼혈 노예이며 마사의 이복동생이기도 하다.

 

마사는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기 19년 전, 산후 회복을 못 하고 33세에 몬티첼로에서 사망했다. 샐리는 그의 아내가 사망한 후 제퍼슨의 시중을 드는 지밀나인 같은 위치에서 자녀를 적어도 여섯을 낳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퍼슨과 샐리의 손자 Beverly Frederick Jefferson과 그의 아들들.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하지 않았으며 한 여인과 지속해서 관계를 이어간 제퍼슨은 샐리를 성적 착취물로 대하기보다는 그녀를 한 여인으로 사랑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녀가 낳은 제퍼슨의 자녀들도 노예로 살았으나 기술교육을 받고 비교적 노동의 강도가 약한 기술직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천명한 제퍼슨은 600여 명의 노예를 소유했던 농장주였다는 모순과, 노예였던 샐리와의 관계 등이 몬티첼로의 투어가이드들에 의하여 매우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몬티첼로 해설사들의 프로그램을 전부 들었는데, 제퍼슨의 업적보다 샐리와의 사생활과 자손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부각된듯한 인상을 받았다. 심지어 몬티첼로 투어의 주인공이 제퍼슨이 아니고 샐리인 듯  느껴지기도 했다. 


성스러운 명화, 최후의 만찬을 남기고 간 다빈치는 다방면에 걸친 연구 기록과 함께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기록해 놓은 노트가 남아있으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의 끊임없는 호기심이 유추해 낸 바로는, 정황상 다빈치는 동성애자였으리라는 추측으로 기울고 있다. 


5,000에이커 대규모 농장주였던 제퍼슨은 자신의 재정관리에는 천재가 아니었던 듯 하다. 몬티첼로의 저택을 부수고 다시 짓고 보수하기를 반복하느라 가세가 기울고 농사의 작황이 좋지 않아 많은 빚을 남기고, 독립선언문이 반포된지 정확히 50년 후인  1826년 7월 4일, 83세로 몬티첼로에서 생을 마감했다.

 

▲몬티첼로에 있는 제퍼슨의 묘지에도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묘지처럼 오벨리스크가 있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 신전 앞에 세워진 건축물로, 태양의 신을 향해 솟은 모습을 상징하기도 하고, 내세로 이어지는 영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는,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몬티첼로와 노예들은 매각되었고 몬티첼로는 여러 주인을 거치다가 1923년에야 토머스 제퍼슨 재단에서 사들여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 

 

노예 소유에 대한 깊은 고민을 했으나 자신의 전 재산과 사회의 경제구조를 와해할 용기가 없었던 제퍼슨은, 노예 해방은 반드시 있어야 하겠으나 다음 세대가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50여년 후 노예를 해방한 링컨은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가 아니라서 그 과업을 이루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비범한 사람들에 의하여 시대를 앞서간 비전들이 제시되며 세상은 분명 더 나은 사회로 가고 있다고 믿어진다. '더 나은 세상'이란 공평과 정의를 향해 발전해 가고 경제적인 풍요가 있는 세상이겠으나, 개인의 행복지수와 비례하진 않다는 것 또한 모순이긴 하다.


단지, 천재들이 제시한 비전 자체가 그들이 개인적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해서 부인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역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리더들의 평가에는 업적과 과실이 항상 같이 부각되곤 한다. 미국의 수도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자리한 기념관에 서있는 제퍼슨도 역사를 흔들며 천명한 진리를 그의 삶으로 실천하지는 못하고 시간 속으로 사라져갔다.

 

신념을 개인의 삶에서 살아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부각하기보다, 그의 비전으로 달라져 가는 세상을 보며 그가 실천하지 못했던 비전을 향해 가는 것이 후세대의 몫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