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원 칼럼] 살며 생각하며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길 위의 사람들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KBS프로듀서/아나운서

 

고령화 사회에 제2의 인생을 설계할 때 선택의 순간이 오면, '몸이 하나이기에 아쉬워하며 바라보가만 한' 한때 갖고 있던 꿈이었던 '가지 못한 길'을 가보는 것은 어떨까.

 

고등학교 교사로서 3학년 담임을 맡고 있을 때 가장 어렵던 일이 진학지도였다. 학생의 삶이 달라질 수도 있는 대학, 학과를 정하는 일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교사는 거의 기계적으로 빠르게 그 일을 해야만 했다. 상담 학생은 많은데 시간은 너무 없었고 능력이 다소 미흡했다.

 

대학에서 학과 교수로서 3-4학년 학생의 취업 상담을 할 때도 부담이 아주 컸다. 많은 세월이 흘러 내가 지도한 어떤 학생과 우연히 만나 삶을 살아온 여정과 회한을 말하는 과정에서 ‘선생님은 왜 그때 그 대학, 그 학과를 제게 권하셨어요?’라고 약간은 부정적으로 질문할 때의 자괴감, 책임감, 곤혹스러움을 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이 대학, 학과에 따라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삶의 여정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는 순간이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순간의 선택이 삶을 좌우한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이야기 시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 )’을 일부 소개하며 글을 이어간다.

 

아쉬었던 가지 않은 길

노랗게 물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몸이 하나여서 두 길을 모두 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오래도록 서서 한 길이 덤불 사이로 굽어지는 곳까지/멀리, 저 멀리까지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길로 나아갔습니다/ 똑같이 아름답지만/더 나은 길처럼 보였습니다/풀이 무성하고 닳지 않은 길이니까요/ - 중략 -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하겠죠/까마득한 예전에//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로 나아갔고/그것이 모든것을 바꾸었다고/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시로서 예비고사, 수능 시험에 출제된 바 있다. 자연 속에서 인생의 깊고 상징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이 시에서 말하는 ‘길’은 ‘일, 직업’만을 이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꿈, 이상, 비전, 일, 직업, 사랑 등 삶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들을 포괄하는 말이다.

 

이 시는 삶의 과정에서 단순히 어떤 길을 걸었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인생에서 선택의 중요성, 결코 그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다른 기회를 포기했던 일에 대한 후회와 회한을 소박하게 정서적. 인상적으로 그렸다는 생각이다.

 

현대는 고령화 사회이다. 다모작의 삶을 기획하여 살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다. 대부분 직장인은 50-60 세 정도에 정년퇴직이든 명예퇴직이든 아무튼 퇴직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인생길이 달라지는 것이다. 건강 관리를 잘하면, 70세 이상 일을 할 수 있으니 웬만하면 제2의 인생을 설계해야만 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몸이 하나이기에 아쉬워하며 오래도록 바라다보기만 한’- ’가지 못하는 길’을 그 설계에 넣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다. 인생의 한순간에 갖고 있던 꿈이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동기와 이유, 목적

일을 하는 노동자의 인식과 동기를 몇 가지로 구분하여 일의 가치, 의미 차이를 연구한 학자가 있다. 벨라(Bellah et al, 2007)라는 학자의 구분을 소개한다.

 

일을 직업(job)으로 보고 그 일에 집중하는 사람은 금전적 보상을 최우선으로 삼고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등 1차적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삼는다고 한다. 일의 조건 등을 우선으로 고려하여 선택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일을 경력(career)로 보는 경향이 큰 사람은 앞의 1차적 욕구에도 집중하지만, 개인의 성취, 승진에는 더욱 집중과 노력을 한다고 한다. 성취 욕구가 강한 소위 출세(?)를 지향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세 번째로 일을 소명(calling)으로 보는 경향이 큰 사람은 1차적 욕구 충족이나 2차적 욕구인 성취, 승진 등의 충족 욕구보다도 공동체 혹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더 큰 가치로 보고 그것에 더 신경을 쓰고 집중한다고 한다.

 

매우 도식적인 구분이라 비판받을 수 있다. 사람이 일을 함에 있어 그 일에 대한 인식, 동기, 가치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단순한 구분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의 일, 직업의 동기, 목적 등을 생각하면 위 세 가지 욕구 가운데 한쪽으로 분명히 편중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며 다양한 직업이나, 일을 가지기는 어렵다. 인간은 대부분 1-2개의 일을 하며 평생을 살아간다.

 

오랜 기간 종사한 일과 직업에서 벨라가 말한 ‘가치, 의미, 인식’ 등을 모두 찾으려 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래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가치, 아쉬움, 기회의 상실에 대한 회한을 가진다는 생각이다. 여러분은 벨라의 일에 대한 노동자들의 인식 구분, 3가지 가운데에서 어느 편의 비중이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지 않은 길이 아쉬워서 자연으로 가는 사람들

벨라가 말한 일을 직업(job)이나 경력(career)으로 보며 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왕성하게 일할 나이인 청장년기에나 가능하다. 직장에서 은퇴한 많은 사람들은 일을 금전적 보상, 성취나 승진.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그럴 기회를 얻기가 어렵기도 해서), 가치, 기여, 봉사 등 소명(calling)으로 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집중하지 않나 싶다. 요즘 모 케이블방송의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리고 이를 제2의 인생 로망으로 삼는 이들이 주위에 꽤 있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프랑스 교육 철학자 루소는 저서 에밀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강조한다. 인간 본성으로의 회귀와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자는 뜻이다. 유럽 사회의 인위적이고 부패한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야만의 상태인 자연이 훨씬 순수하니 본질적으로 인간의 순수한 본성과 도덕성을 자연에서 회복하자는 주장이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와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은, 도시화와 환경문제, 자본주의적 경쟁 시스템, 물질적 상업주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기나긴 청장년기를 보내며 지친 노년.장년 층에게 마치‘마법의 탄환’처럼 강하게 어필한다는 생각이다.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창하는 메시지, 그것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자연인의 모습을 로망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한편 최근의 귀농, 귀어, 귀촌 운동이나 자연 속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힐링 문화는 앞에서 말한 루소의 사상과 '인위적 행동을 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것'을 뜻하는 노.장자의 도가사상 ‘무위 자연론’과 우리 사회의 세태, 그리고 고령화 사회의 해법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다.

 

가치 창조를 위해 ‘가지 않은 길’을 다시 가는 사람들

인간의 주관적 행복감은 삶의 만족 정도와 소중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와 비례한다고 한다. 이 잣대를 어떤 한 사람의 종사한 일, 직업에 적용하여 보면, 그에 대한 만족과 가치를 느끼면 행복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노.장년층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인생 이모작을 시작할 때 보다 가치 지향적인 일, 평소 소망한 일, 행복한 일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소명(calling)이라 생각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일은 대부분 한 인간에 있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 )’에서 말하는 ‘가지 않았던 길’, 아니 ‘가지 못했던 길’일 것이다.

 

주위에서 예를 찾자면, 토목 및 건축 플랜트 현장 등에서 오랜 세월 동안 일하다 장년기에 조각 공부를 하고, 나무, 돌, 청동, 철 등 일반적인 소재를 활용하는 기존 조각과는 전혀 다른 소재 레진(resin:합성수지)을 소재로 하여 자신만의 조각 세계를 구축하며 전문가 호평 속에서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고, 우리의 고향 포천에서 창작에 전념하는 운악(雲岳) 이현성 조각가가 그렇다.

 

레진이 지니는 가공의 어려움, 색상 구현에 있어 명도와 채도의 문제점 등을 전문성으로 극복하며 새로운 예술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공업용 또는 의료용으로 쓰이는 수지를 소재로 전문성, 경험을 기반으로 다양한 색상과 형태를 구현하여 가둠과 갇힘, 해방, 상징이라는 복잡하고 어려운 조각의 과정을 반복하며 창의와 도전으로 창작하고 있다.

 

소재, 미적 구현 등에서 신선한 발상이자 새로운 시도이다. 그가 작품 속에서 진정으로 구현하려고 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부조리, 갇힌 영혼과 억압받는 생명 등 모든 존재의 질곡의 현실에 대한 고민 그리고 진정한 실존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어린 시절 관심과 동경을 일,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다 나이 들어 그 동경과 추억을 예술로 창조하여 새로운 미적 세계를 만드는 이도 있다. 추사의 그림과 고택을 접하며 유소년기를 보내다 중장년기에 붓질의 필획과 회화의 그림을 융합.접목하여 우리 자연의 산, 강, 나무, 해와 달, 대나무를 화폭 속에 담아 철학과 영혼을 불어넣는 삶을 살아가는 담운(潭雲 ) 이일구 서화가가 또한 그러한 사람이다.

 

 

 

서재원 교수

● 창수초등학교, 포천중, 포천일고, 서울대 졸업

● 한국방송 KBS 편성국장, 편성센터장(편성책임자)

● 차의과학대학교 교양교육원장, 부총장

● 포천중 · 일고 총동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