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이해조문학전집』 12권 완간하다

이병찬 동농이해조선생기념사업회 회장

 

동농이해조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병찬 대진대 명예교수)에서는 12월 『이해조문학전집』 12권을 완간하면서 12일 포천문화원에서 이를 축하하는 출판기념식을 가졌다. 『이해조문학전집』 완간은 이해조 선생의 고향인 포천뿐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도 기념비적인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동농 이해조(東儂 李海朝, 1869-1927) 선생은 애국계몽기 포천 출신의 소설가이며 교육자이다. 『이해조문학전집』에는 그의 처녀작인 한문소설 「잠상태(岑上苔)」(1906)에서 마지막 작품인 「강명화전(康明花傳)」(1927)에 이르는 37편의 작품을 수록했다. 1986년 최원식의 박사학위 논문인 「이해조 문학 연구」에서 친일문학과 애국계몽기의 문학으로 분류하여 이해조 문학을 애국계몽기의 우리 소설사의 주류로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이래 후학들의 연구가 이어졌고, 2006년 동농이해조선생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이해조 문학의 계승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제 그 일환으로 마침내 동 사업회에서 최초로 『이해조문학전집』을 발간하였다.

 

이해조가 1906년 한문소설 「잠상태」로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소년한반도》의 폐간(1907. 4)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당시 한글전용을 고수하여 일반 서민층과 부녀자들 간에 독자가 많았던 《제국신문》에 1907년 6월 5일부터 소설 「고목화」를 연재하면서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무려 8편을 소설을 연속적으로 연재하게 된다(「빈상설」, 「원앙도」, 「구마검」, 「홍도화」(상), 「만월대」, 「쌍옥적」, 「모란병」). 이 기간 중에 《제국신문》 외에서도 번역소설 『화성돈전』(1908. 4, 회동서관)과 『철세계』(1908. 11, 회동서관)가 나왔다. 이 두 권은 일제 통감부의 검열에 걸려 판매금지되었다.

 

이해조는 이 시기에 《기호흥학회월보》(1908. 12 ~ 1909. 7)에 「윤리학」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이해조의 교육운동과 계몽운동 그리고 소설가로서의 활동의 사상적, 이론적 토대로서,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과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한 그의 교육사상(敎育思想)을 체계화하고 있다.

 

이해조의 작품에는 유독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이것은 《제국신문》의 주요 독자층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일치한다. 또한 이것은 이해조가 연동교회(蓮洞敎會) 신자로서의 경험과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교육관이 반영되어 있다. 시대적 굴레에 갇힌 여성들이 고난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근대의 의미를 간취(看取)하게 되고 여성해방의 필요성을 알게 한다. 『자유종』(1910)은 융희 2년(1908년) 이매경의 생일잔치에 모인 네 부인이 시국을 토론하는 특이한 토론체 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토론 참가자가 모두 여성인데, 이는 바로 개명한 여성에 의해 주도된 토론체 형식으로 소설을 전개하고 국민교육을 중심 주제로 하는 정치적 명제를 토론 내용을 설정함으로써 작가 이해조의 애국계몽사상의 대중적인 폭을 드러낸 것이다.

 

이해조는 1910년 10월 《매일신보》의 기자로 입사하여 1913년 5월 퇴사하였다. 그는 입사 후 약 2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15편의 소설을 잇달아 연재하는 기록을 남겼다(「화세계」, 「월하가인」, 「화의혈」, 「구의산」, 「소양정」, 「춘외춘」, 「옥중화」, 「탄금대」, 「강상련」, 「연의각」, 「소학령」, 「토의간」, 「봉선화」, 「비파성」, 「우중행인」). 이들 작품을 통해 나라는 빼앗겼지만 다양한 일탈 군상을 등장시켜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의 고난을 냉정한 안목으로 바라보게 하고 있다. 작품 속의 인물들을 통해 당시 민중들의 바램과 희망이 무엇이었는가를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

 

이들 작품중에 「옥중화」는 「춘향전」, 「강상연」은 「심청전」, 「연의각」은 「흥부전」, 「토의간」은 「별주부전」의 판소리 사설을 바탕으로 각각 이해조가 개작한 작품이다. 이해조는 고전문학 형식인 판소리를 근대적 출판매체인 신문지면에 활자로 표기함으로써, 우리 고전을 새로운 매체에 연결하여 보전하려는 데에 경술국치 이후의 그의 창작의 열정을 새롭게 쏟으려 했다.

 

이해조는 2013년 5월에 「우중행인」 연재를 끝으로 《매일신보》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일체의 사회활동에서 은퇴했으나,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이어졌다. 1914년 『정선조선가곡(精選朝鮮歌曲)』이 신구서림에서 나왔고, 1918년 『홍장군전』, 『한씨보응록』이 오거서창에서,  1927년 『강명화전(康明花傳)』이 회동서관에서 나왔다. 신분의 한계로 연인과 결혼할 수 없자 1923년 6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실존인물 기생 강명화를 모델로 한 이 소설을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1927년 6월 10일(음력 5월 11일) 포천 자택에서 향년 5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1906년 이해조의 처녀작인 「잠상태」에서 여주인공 홍운영의 신분을 초월한 인간해방을 주제로 삼은 이후, 1927년 마지막 작품인 『강명화전』의 강명화의 자살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여성의 신분으로부터 해방을 주제로 삼았다.

 

이해조의 『정선조선가곡』은 전집에 수록되지 않았지만, 소리꾼 박춘재(朴春載, 1881-1948)의 구술로 구성된 작품으로서, 18세기 『청구영언』과 『해동가요』, 19세기 『가곡원류』를 근대로 이어주는 우리 소리의 집성(集成)이다. 『홍장군전』, 『한씨보응록』은 각각 홍윤성(洪允成)과 한명회(韓明澮)를 그린 역사소설로서 유교적 명분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투쟁을 사실적으로 그려놓음으로써 이후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예감하게 한다.

 

이와 같이 이해조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에도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해 판소리 정리, 전통 가곡 편찬, 역사소설 창작 등과 같은 구비문학 채록과 역사소설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그의 마지막 혼을 불살랐다. 이해조의 문학은 이후 춘원 이광수(李光洙)를 거쳐 우리 근대소설 문학의 토대이다. 그의 소설은 1919년 3.1운동 후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문학적 실천의 초석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모국어와 문학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이해조문학전집』을 간행하면서 수록 작품은 원칙적으로 초간본을 대상으로 하였다. 100여년 전 어휘의 보고(寶庫)인 그의 작품을 원래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해조는 기자로서 구체적인 인간의 삶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당시의 사회상과 시대상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 다른 어떤 역사서보다 더 생생하게도 살아있는 인간상과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이해조의 문학을 통해 우리는 당시 인간들의 내면에 들어가 볼 수 있고, 당시의 시대상과 민족적 과제에 도달할 수 있다.

 

이해조의 소설에 나타난 어휘를 보면 인물의 성격과 계급에 따라 실로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들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이해조의 천재성은 세부 묘사에서의 치밀성과 무당, 기생, 지관, 종 등 다양한 인물들의 성격 묘사에 있다. 또한 이해조 문학의 계몽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치열한 탐구는 그의 문학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준다. 이해조 소설에는 역사적인 한계에 갇힌 인간의 모습과 함께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우리들 조상의 모습이며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해조문학전집』의 발간을 계기로 우리 문학의 토대와 뿌리가 재조명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개항과 일제침탈, 해방후 좌우대립과 제주4.3사건, 5.18광주민주항쟁을 겪으면서 살아나온 우리 민족의 저력이 최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는 성과를 내는 것으로 이어져왔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소설문학의 세계적 보편성의 근거를 찾아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제 전집의 발간을 계기로 향후 포천에서는 이해조문학관의 건립과 이해조문학상의 복원을 통하여 그 문학적 성과를 전 국민과 함께 공유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이다. 

 

 

 

 

 

이병찬(李秉讚) : 위천(爲川) 

문학박사

대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동농이해조선생기념사업회 회장

포천문화원 포천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