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원 - AI 시대에 쓰는 사람이야기

오래된 기억 속의 이야기 하나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KBS 프로듀서· 아나운서

 

 

사내애들은 여자애들이 아는 척도 안 하고, 쌀쌀맞게 군 게 몹시 화나고 서운해서 앙갚음했다. 여자애들은 아직도 울상이다. 남자애들이 얄밉다. 그러나 그리 싫지는 않은가 보다.

 

 

모 방송은 2013년 여름에 ‘독일 루르 공업지대’에서 제작한 '광부, 간호사 파독 50주년 가요무대 특집'을 두 차례 방송했다. 꽃다운 나이, 간호사로 독일에 가 40여 성상을 보낸 100여 명의 어머니 합창단의 ‘들장미’로 시작되는 특집은 동시대를 살아온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성인이 된 이 이야기 주인공 민호 씨는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기 직전,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름의 이유 있는 기억과 정서로 인해 애틋한 감회에 젖었던 바 있다.

 

넉넉지 않은 집안의 소녀로 시골에서 똑똑했던 아이, 스물이 채 안 된 어린 나이에 간호사로 간 아이, 그 아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가슴 속에는 그 어린 나이에 무슨 이유로 머나먼 곳으로 떠나갔을까,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 호기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줍은 동심

동네 아이들이 사내아이 계집아이 정답게 어울려 초등학교에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동네를 벗어나 학교로 가는 오솔길에 들어서자, 사내아이는 사내아이끼리 계집아이는 계집아이끼리 슬며시 나뉜다. 동네에서는 콧등을 맞대고 찔레 순, 밀대 순을 함께 먹어대던 아이들이 내외를 한다. 학교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눈길도 주지 않고 외면한다. 맹랑한 놈들이다.

 

사내애들은 책보를 등 쪽 어깨죽지에 두고 책보 끈을 어깨 위에서 가슴 방향으로, 사선으로 빙 둘러 명치 부근에 질끈 동여 묶고, 힘차게 양팔을 휘두르며 걷는다. 그런데 계집애들은 책보를 허리 뒤쪽에 두고, 책보 끈을 허리에 빙 둘러 배꼽 근처에 동여매고, 앞뒤로 팔을 얌전하게 흔들며 앞만 보고 걷고 있다. 그러다 뒤에 가던 순희, 정순이, 미순이가 민호, 명수, 천수에게 곁눈도 주지 않고 ‘쌩’하고 옆을 스쳐 추월해 교문으로 들어간다. 남자애들은 괘씸한 ‘년들(?)’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도착하니 아침 운동시간이었다. 오백여 전교생 모두가 운동장에 나와 반별로 모여 포크 댄스를 춘다. 포크 댄스는 같은 반 아이들이 남녀로 나뉘어 따로 두 겹의 원을 만든 다음, 반대로 돌며 파트너를 바꾼다. 그리고 마주 보며 손을 맞잡거나 손뼉을 치며 춤을 춘다.

 

민호는 체조는 괜찮은데 포크 댄스는 싫다. 단상에서는 무섭기로 소문난 여자 체육 선생님이 경쾌한 포크 댄스 음악에 맞추어 사뿐사뿐 동작하며 앙칼진 목소리로 구령을 붙여댄다. 댄스 동작을 제대로 하지 않는 아이가 있으면 손가락질하며 불호령을 내리거나, 앞으로 불러내어 벌을 세운다.

 

오늘도 포크 댄스를 하고 있다. 숫기가 좀 없는 여자애들은 사내애들에게 손가락 하나를 슬쩍 내민다. 동네에서 제일 예쁜 깍쟁이 순희는 항상 사내아이가 짝으로 오면 손대신 작은 막대기를 삐쭉 내민다. 오늘 민호에게 마찬가지였다.

 

민호는 제발 학교에서 포크 댄스가 없어졌으면 소원했다. 그 소원은 일 년 후에 이루어졌다. 여자 체육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면서 포크댄스 시간은 저절로 없어졌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대신 무서운 남자 체육 선생님이 왔다는 것이다.

 

3학년 민호는 남녀 합반인데, 남학생 여학생이 짝이 되어 책상을 함께 쓴다. 같은 동네 순희가 짝꿍이다. 순희는 동네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학교나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민호에게 유별나게 쌀쌀맞다. 순희는 다른 여자애들처럼 책상 가운데를, 칼로 파서 금을 만들고, 검정색 빨간색 크레파스로 짙게 칠해 경계선을 만들었다. 손이건 책이건 무조건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한다. 이 삼팔선을 넘으면 절대 안 된다, 알았지! 민호에게 단단히 다짐 겸 협박을 한다. 민호는 기분이 좋지 않다. 순희, 제까짓 계집애, 얼마나 예쁘고 잘나서 이러나 싶었다.

 

개구쟁이 아이들

민호와 명수는 3학년이라 열두 시가 조금 넘어서 수업이 끝났다. 운동장에서 딱지치기하며 4학년 천수를 기다릴 생각이다. 천수가 나오자 책보에서 딱지를 꺼내 순서를 정한다. 민호가 일등이다. 명수와 천수의 딱지가 바닥에 놓이고 그중 만만한 놈을 골라 공격한다. 명수 딱지가 뒤집기 쉽겠다 싶어 힘차게 쳐서 뒤집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역부족이다. 딱지치기를 하다 지친 아이들은 슬슬 배가 고파온다. 집에 가려다 운동장 저편에서 순희, 정순이, 미순이 여자아이들이 비석치기를 하며 노는 것을 보았다.

 

수작을 걸어볼 생각으로 슬슬 다가선다. 쟤네들 노는 데 가 보자! 아침에 괘씸했던 여자애들을 어떻게 하면 골려줄지 의논하며, 노는 곳에 가서 기웃기웃하기도 하고 딴짓도 하며 빙빙 돈다. 여자애들은 참 우습다. 넓적한 돌을 갖고 발로 차며 노는 비석치기가 뭐가 재미있어서 저렇게 깔깔대며 웃는지 모르겠다.

 

순희야, 정순아, 미순아, 집에 같이 가면서 놀지 안을래? 이윽고 명수가 슬슬 작전을 편다. 집에 가다가 길옆의 개천하고 논에 미꾸라지, 메기 등 고기가 많은데 잡지 않을래? 민호가 제안한다. 못 이기는 체, 여자애들이 남자애들 뒤를 따른다. 일단 작전은 성공이다. 저기 논둑 옆 샘에 엄청나게 큰 미꾸라지가 있는데 가서 보자. 여자애들을 슬슬 유인해서 골려줄 생각이다. 모두가 개울 위로 올라와 논 가장자리에 있는 샘 가까이 다가선다.

 

그런데 갑자기 천수가 제 키 정도 크기의 막대기를 구해 손에 든다. 그리고 샘 안으로 깊숙이 찔러 넣어 무언가를 들어 올린 다음, 여자애들에게 ‘홱’ 던진다. 뱀장어보다 기다랗고, 징그럽게 생긴 놈들이 막대기 끝에서 ‘휙, 휙’ 공중을 날아 여자애들 얼굴 방향으로 향한다. 악, 뱀이다! 천수, 이 자식 너 죽여 버린다! 얼굴로 날아드는 뱀처럼 흉악하게 생긴 놈을 피하려고 여자애들이 혼비백산이다.

 

드렁허리다. 샘에 살고 있는 드렁허리를 보아두었다가 막대기로 집어내어 여자애들에게 내던지며 골려주고 있다. 드렁허리는 농촌에서도 흔치 않은 민물 어류인데, 뱀장어 비슷한데, 생긴 게 훨씬 흉측하다. 이빨이 날카롭고, 징그러우며 역한 냄새가 나는 아무튼 기분 나쁜 놈이다. 이놈들은 논두렁에 굴을 뚫고 그 속에서 살기도 하는데, 비가 많이 오면 논둑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민호를 비롯한 사내애들은 아침에 여자애들이 학교 가는 길에서 아는 척도 안 하고, 포크 댄스할 때 쌀쌀맞게 군 게 몹시 화나고 서운했다. 그래서 앙갚음을 한 것이다. 여자애들은 아직도 논둑에 남아 울상이다. 몹시 놀라고 남자애들이 얄밉다. 그러나 동네 사내아이들은 그리 싫지는 않은가 보다.

 

얼마 있다가 아이들 모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논둑 위의 쇠뜨기 풀, 노란 씀바귀꽃, 꽃다지를 뒤로 하고, 징검다리를 팔짝팔짝 뛰어 건너서 고기를 잡으러 냇가로 가고 있었다.

 

에필로그

어느 문학 작품에서 읽은 글이다. 살아가며 진정으로 섬길 만한 사람 하나, 지킬 가치가 있는 신념 하나,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있으면, 행복하지 않겠는가? 이 글에 담긴 동심도 그중 하나라는 생각이다. 가슴 속의 정서를 시로 남긴다.

 

 

못다 한 이야기

 

손에 닿을 듯 초롱초롱한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이 밤

잘 있느냐 머나먼 곳의 순희야

 

초승달 아래 산기슭

별빛 같은 불빛만 아른거리고

인적마저 뚝 끊긴 고즈넉한 이 밤

네가 보고파지는 건

두견화 꽃봉오리 같던 열아홉 순희

별이 되어 예 있기 때문이다

 

개나리꽃 그림자 산모롱이 드리울 제

봄 소풍 가듯 떠나간 철없던 아이

그렇게 가는 길이 다신 오지 못할 길이 될 줄이야

머나먼 곳에서 천사가 된 순희야

-글쓴이 지음-

 

 

서재원

● 창수초등학교, 포천중, 포천일고, 서울대 졸업

● 전 한국방송 KBS 편성국장, 편성센터장(편성책임자)

● 차의과학대학교 교양교육원장, 부총장

● 포천중·일고 총동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