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이름의 영예

언론인 안훈은 TBC PD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뎠다. 동아일보 기자, DBS 라디오 방송작가, MBC 라디오 방송작가를 거쳤고, 1983년 이후에는 여성지 프리랜서 기자로 좋은 글을 많이 썼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시그나 사회공헌재단에서 취재위원으로 봉사했다.

무릇 세속적인 출세나 성공, 혹은 명예란 얼마나 슬픈 이름의 영예인가.

슬픈 이름의 영예―, 그것은 그들의 탐욕스러운 얼굴,

위선에 찬 표정만큼이나 슬프다. 그러니 내 그것들을 위해 찬양할

까닭이나 탐할 까닭이 하나도 없지 아니한가.

 

 

나는 세상에서 무릇 출세한 이들을 결코 선망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에서 무릇 성공한 이들을 결코 추종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에서 무릇 이름을 떨친 이들을 결코 존경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대뜸 나에게 화살을 겨누리라. 그것은 네가 이를테면 세상에서 그들만큼 출세하지 못했으며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름을 떨치지 못한 까닭이 아니겠느냐. 그 때문에 그들을 투기하며 시기하며 혐오하며 외면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세상에서 결코 그들만큼 출세하지 못했으며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름을 떨치지 못했으니 그런 공격을 받는다면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은 살면서 특히 어떤 이들을 선호하며 어떤 이들을 선호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극히 개인적인 일이긴 하나 자신의 소견대로 이야기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마땅치 않게 바라보며 기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그런 그들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실이다.

 

세상에서 무릇 출세한 이들, 성공한 이들, 이름을 떨친 이들이 진실로 아름답다면 어찌 감히 나 같은 이가 그들을 외면하며 선망치 아니하며 존경치 아니하며 추종치 아니하겠는가.

 

그들은 흔히 보는 시정의 소박한 필부 필녀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며, 그들은 흔히 보는 시정의 평범한 샐러리맨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며, 그들은 흔히 보는 우리 농가의 촌부들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다.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군가는 나에게 말하리라.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그렇다. 근거를 대라면 참으로 궁색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지극히 추상적이며 비현실적인 것이어서 무슨 서류를 펴놓고 도장을 찍듯이 나타내 보일 수 없거니와, 물적인 형태의 갖춤이 없으니 누구의 면전에 드러내 보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궁색한 나름의 서술로 대신할 밖에 없는 일이다.

 

출세하고 성공하고 이름을 떨친 이들의 아름답지 못함이 어디 한두 가지 지적으로 끝나랴마는 우선 그들이 내세우는 그 트레이드마크를 획득하기 위해 서슴지 않았던 숱한 비리와 희생을 디디고 서 있는 모습부터 생각해 보자.

 

어느 때는 비굴한 웃음을 남발했고 어느 때는 동료의 가슴에 못을 박았고 어느 때는 땅바닥을 기는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어느 때는 형제자매,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을 눈감았으며 어느 때는 누대로 내려온 가문의 족보도 팔았으며 자존심을 팔고 양심 같은 것은 애지녘에 떡 팔듯이 팔기도 했다.

 

출세의 깃발, 성공의 깃발, 명예의 깃발을 꽂기 위해 그들은 같은 모습의 선배, 상사, 스승을 위해 식모도 했으며 찬모도 했으며 비서도 했으며 시녀도 했으며 보디가드도 했다. 그들은 이미 그들보다 앞서 깃발을 꽂았던 선배, 상사, 스승들의 전철을 따르기 위해 그들 스스로 그들의 충견(忠犬)이 되는 일을 사양치 않았다.

 

그렇게 하여 얻어내고 따낸 출세의, 성공의, 명예의 깃발이니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지난 시절 시녀도 되고 보디가드도 되고 혹은 충견도 되었던 과거를 잊으려 함은 물론이려니와 그 깃발을 들고 무슨 제왕만큼이나 거드럭대며 거리를, 사무실을, 캠퍼스를 보란 듯이 활보하고 그에 대한 보상까지를 받아내려 한다.

 

그들의 추종자들로부터는 자신들의 뼈아픈 과거에 버금가거나 혹은 더한 값을 되돌려 받기 위해 또다시 그들의 상전이 되고 성주가 되고 군주가 되어 군림하는 슬픈 반복의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독한 시집살이한 며느리가 더욱 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세간의 속설처럼 내가 이만 이만하니 존경해라, 추앙해라, 대접해라 하며 추한 구걸을 해올 때가 얼마나 많던가.

 

실제로 나는 그런 이들을 나의 주변에서 퍽 많이 보아왔다. 나의 동기생 한 명은 교수가 되기 위해 같은 학과 교수들의 충실한 시녀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보이지도 않는 전화통 앞에서도 항상 황송하여 두 손으로 송수화기를 감싸 잡고 연신 굽실대며 비굴하리만큼 감겨드는 목소리로 아부하는 것이 습성이 되기도 했다.

 

또 나의 직장 동료였던 Y 씨는 죽는시늉을 할 만큼 상사들 앞에서 철저히 아부한 덕으로 그는 그가 근무하는 모처에서 중역의 자리까지 뛰어올랐고 동종의 타사 사장 자리로 옮기어 한때는 꽤 이름을 높이었으며, 또 그를 이끌어준 P 씨는 동문 선배를 배신하고 총수의 편에 섬으로써 출세 가도를 누비더니 그 막강한 기세로 정부 산하 단체의 장으로 승승장구의 영예를 누리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앞서의 Y 씨는 바로 그 P 씨의 대학 후배로 P 씨의 그 철저한 아부 근성과 출세 지향주의 전형을 그대로 답습했고, 그 P 씨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 P 씨의 심복이 되어 그 역시 꼭 같은 경로의 출세 가도의 맥을 잇고 있다.

 

어찌 그런 이가 이들뿐이랴. 예거하자면 수도 없지 않던가.

그러면 생각해보자.

출세를 위해서라면 선배도, 동료도 팔아먹는 그 파렴치가 아름다운가.

성공을 위해서라면 조상도 팔아먹을 그 몰염치가 아름다운가.

명예를 위해서라면 제 아내도, 제 남편도 팔아먹는 그 무분별이 아름다운가.

그 자그마한 출세와 성공과 명예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은 차치하고 최소의 양심, 손바닥만한 자존심도 떡 팔듯이 팔아온 그 철면피가 정말 아름다운가.

 

내가 이러한 그들에 대해 유난히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불행하게도 나의 직업과 연관된 탓인 것도 같다. 언론이랄 것도 없으나 여하간 대중매체의 한 축에서 일해오다 보니 숱한 사이비(似而非)의 그들과 접촉되며, 그들 안팎에 여울지는 위선의 가지가지를 싫거나 좋거나 목도하는 심정이 때로는 서글프고 때로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탓이기도 하리라.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 역시 졸속으로 창출됨이 수 없으며 그것들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면 뿌리도 없이 나타나는 싸구려 사이비 문화가 언론이나 방송가엔 또 얼마나 범람하던가.

 

인간은 한번 산다고 말해볼 때 그 해석의 관점은 서로 상반하는 양극의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한번 살기에 죽어도 아름답고자 하는 것, 한번 살기에 탐욕의 극대화로 안락을 추구하는 양극적 현상을 우리는 가끔 본다. 한번 살기에 태어난 본래의 순수한 그 모습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 하는 이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으며, 한번 살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출세와 성공과 명예와 치부를 위해 저 자신의 얼굴마저도 팔아먹는 이들이 세상에는 적지 않게 있다.

 

내가 아름답게 보는 것은 자연의 순수한 그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다.

힘들어도 청빈하게 살며 인간 본래의 모습을 지키려 노력하는 소박한 범부 범녀, 가난한 소시민, 흙의 사람들, 그 얼굴에 어리는 갖가지 삶의 애환을 아름답게 느끼며 더러는 숙연해지기도 하며 혹은 존경해마지 않는 때도 종종 있다.

 

앞서 예화로 든 Y 씨는 몇 년 전 작고했고 또 그 잘나가던 P 씨는 팔십도 훌쩍 넘긴 나이에 저명한 모 회사의 사장 자리에 앉더니 1년도 안 되어 교통 사고로 사망했다. P 씨가 팔십을 넘긴 나이에 C사 사장으로 가는 것을 보고 나름으로 생각했다. 설령 아무리 사장 자리를 내주며 초빙한다 해도 그 자리를 수락하는 것은 아닌 듯 싶었다. 고사(固辭)를 해야 했던 것 아닌가 했다. 그러나 P 씨가 살아온 내력으로 본다면 그가 팔십도 훨씬 넘긴 나이라 해서 고사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무릇 세속적인 출세나 성공, 혹은 명예란 얼마나 슬픈 이름의 영예인가.

슬픈 이름의 영예―, 그것은 그들의 탐욕스러운 얼굴, 위선에 찬 표정만큼이나 슬프다. 그러니 내 그것들을 위해 찬양할 까닭이나 탐할 까닭이 하나도 없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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