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친구가 없어요.
그녀는 혼자 왔다. 얼굴은 오십 안팎으로 보였지만, 요즘은 나이를 맞추기가 힘들다. 그녀는 커피 한 잔을 시켜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일어나 책들 앞에서 서성댔다. 그러다 이제 그만 돌아가는가 싶었던 찰나, 문득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친구가 없어요, 라고.
“친구가 없어요. ……. 물론 친구야 있지요.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어요.”
친구가 없다, 는 말에 나는 그만 그녀의 눈에 내 눈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도 친구가 없어요.”
그녀가 돌아간 지 하루가 지나도록 나는 그 말에 맴돌고 있었다. 나의 친구들은 어디에 있나. 나는 누구의 친구인가.
나라고 왜 친구가 없을까. 얼굴들이 떠올랐다. 가장 오랫동안 만났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주 어릴 때 만난 친구부터 사회에서 만난 친구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했다. 그들을 만났을 때 나의 눈빛과 그들의 눈빛을 생각했다. 모두 좋은 사람들.
그러나 오래 만났다고 과연 ‘친한 사이’일까. 은희경의 소설 <빛의 과거>는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무려 40년 전 여자대학 신입생 때 기숙사에서 만난 친구. 그러니 얼마나 오래된 친구인가. 그러나 이들이 반드시 ‘친한’ 것은 아니다. 은희경의 소설의 맛은 바로 이런 데서 시작된다. <빛의 과거>를 읽으면서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들을 떠올린 것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한 것은 소설 속 이야기가 ‘오래된 친구’를 이야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는 그보다 더 오랜 친구가 있다. 중학교는 물론 초등학교 시절에도 만난 친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가장 친한’ 친구일까.
혼자 왔던 그녀가 말했었다.
“저는 책을 읽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런데 제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친구가 없어요. 시도 읽어보고 싶어요. 그런데 누군가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어요.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마치 내가 잘못 살아왔나 싶어요.”
생각해보니 나는 누구와 가슴 떨리며 읽었던 책 이야기를 했었나 싶었다. 책방을 하면서 비로소 이곳에서 책으로 수다를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가 나를 떠났을 때도, 나 역시 친구를 떠나왔을 때가 있다. 한때는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그렇게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때때로 그런 것들은 마치 생살에 난 상처 같다.
중학교 1학년, 그러니까 14살 때 만난 친구가 있었다. 바로 옆자리, 짝궁.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나와서까지 아주 오래 만났다. 친하다고 생각했다. 결혼해서도 만났고, 그가 외국에 나가서도 연락을 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연락이 끊겼다.
십수 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이후 그가 한국에 나올 때마다 마치 중고등학교의 한 시절처럼 자주 만났다. 어느 여름, 팥빙수를 먹고 헤어지는데 그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팥과 빙수를 따로 시켰다.
그는 팥보다 빙수를 좋아한다고 했었나. 나는 빙수보다 팥이 좋았다. 나는 달디단 팥을 한 스푼 떠먹고, 빙수 반 스푼을 떠먹었다. 그는 어떻게 먹었나. 어느 순간 눈을 쌓았던 것 같은 빙수가 무너졌고, 질퍽댔다. 내가 웃었던가, 아니면 그 친구가 웃었던가. 빙수는 더 질퍽거릴 것도 없이 녹아 물이 됐다. 점심을 먹은 후여서 배도 불렀다. 남기는 게 아까웠던가. 마지막 남은 것까지 다 긁어먹었던 것은 나일까, 그 친구일까.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그런데 빙수를 먹는데 참 묘했다. 한 번 헤어진 경험이 있어서였을까. 백화점 식당가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 묘한 기분은 점점 더 진해졌다. 마침내 1층에 이르러 그 친구는 지하철을, 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서면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안녕.”
“안녕.”
안녕이란 말을 내뱉는 순간 정말 안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틀 후 그녀는 다시 외국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이메일을 보냈다. 최승자 시의 한 구절처럼 그를 생각하면 빈 배처럼 텅 빈 상태의 어느 날이었다. 끝내 그는 답이 없었다. 한동안 그래서 아팠다.
몇 년이 지났다. 생살의 상처가 아물었는지, 지금은 그를 생각해도 담담하다. 나 역시 누군가를 떠나올 때 굳이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헤어졌다. 우리는 어쩌면 똑같은 대화에 지치지 않았을까,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벗어날 수 없는 생활과 벗어나고 싶은 생활 사이에서의 동어반복. 나도, 그 친구도 지겨웠던 것 같다. 그럼 우리는 친구였나.
책방을 차린 이유가 뭐냐는 질문 앞에서 나는 곧잘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한 친구가 물었다. 만나지 않고는 못 사는가. 혼자서는 못 사는가.
그래서 생각해 보니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가 좋은 이유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시골책방에서의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꽤 많다. 그럼에도 가끔 누군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반짝반짝 그들의 시간을 만난다.
친구를 만나면서도 친구가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친구와의 만남이 온전히 나의 시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시간을 타인에게 내주고 났을 때는 채워져야 한다. 그를 통해 내가 채워지고, 나를 통해 그도 채워지고. 채움은 온기 같은 것이다. 가슴이 만나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를 깊이 만나고 나면 풍성해질 수밖에 없다.
“친구들이 있기는 해요. 만나서 말도 많이 하죠.”
그렇지. 친구들과 만나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가. 멋진 카페와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교육, 부동산, 종교, 연예 등등 나만 아는 것 같은, 나만 모르는 것 같은 것이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가. 그러다 속내를 아는 친구에게는 남편, 자식, 시부모 등등 나를 둘러싼 주변 이야기를 하게 된다. 목이 아프도록 말한다. 때로 이런 ‘수다’들은 나를 살린다. 그렇지 않으면 때때로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한 구질구질한 생활을 어떻게 잠시라도 벗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살아가는 일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구차함이 따른다.
그러나, 그래도 언제나 그 이야기만 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답답한 속 이야기도 하루 이틀이다. 내가 내 오래된 친구와 동어반복에 지친 것처럼 서로에게 지치는 순간이 온다. 그야말로 빈 배처럼 텅 빈 순간이 찾아온다. 삶에 허기가 지는 것이다.
시골책방을 혼자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그 허기를 메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잠깐 동안 자신에게 찾아온 자신을 잠깐 동안 만나는지 모른다. 나뭇잎이 떨어져 흐드러진 시골길을 혼자 걷는 순간에 자기를 만나지 않으면 대체 언제 만난단 말인가.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때때로 책을 만나고, 그림을 만나고, 음악을 만난다. 바람을 느끼고, 햇살을 느끼고, 거친 소나무의 몸통을 천천히 만져봄으로써 나무 안으로 들어가 보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언제나 좋다. 그래도 사람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