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논산-전주-완주 여행기
▲공주 영평사 대웅전. 추색으로 물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코로나에 앗긴 한가위의 즐거움을 찾으러 떠난 여행이었다. 올해 추석엔 코로나19 확산으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명절의 즐거움을 누리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매년 명절마다 누려왔던 큰 즐거움을 놓칠 순 없는 법. 그래서 그 어딘 가엔 숨어있을 즐거움을 찾고 싶어 길을 떠났다. 비록 코로나의 횡포가 겁났고 정부의 엄포가 지엄했지만 즐거움을 향한 마음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올해 한가위의 즐거움은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가족 모임도 자제하라, 고향 방문도 삼가 달라’는 정부의 엄포성 당부가 방방곡곡을 파고 들였다. 심지어 조상의 음덕을 기리려는 후손들의 정성마저 정부가 ‘공동묘원 성묘나 분향 금지’조치로 막아버린 명절이었다. ‘못난 국민들’ 탓인지, ‘잘하는 정부조치’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즐거움 찾아 떠나는 길은 즐거웠다. 나와 집사람, 그리고 집에서 추석 연휴를 즐기려던 딸은 추석날 정오 무렵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는 조용한 곳에서 가을 색을 만끽하는 즐거움을 찾아보려 했다. 그 방법으로 우리는 아늑한 산사(山寺), 만발한 가을꽃이 손짓하는 곳, 밤과 감 등 과일이 풍성하게 익어가는 곳, 그리고 선조들의 생활 지혜가 담긴 한옥고택(韓屋古宅) 탐방 등을 택했다. 물론 맛있는 집 찾아서 먹는 즐거움도 빼지지 않았다.
영평사(세종시 장군면<옛 공주시 장기면> 산학리)는 늦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절 주변을 하얗게 물들이는 구절초가 유명하다. 그래서 매년 가을이면 구절초 축제까지 열리는 곳이다. 그러나 올해의 구절초는 영 볼품이 없어 아쉬웠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몇몇 군데 소복소복 핀 꽃을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얀 구절초꽃과 화살나무 붉은잎에 내려앉은 가을.
그러나 엉성한 구절초가 안겨준 아쉬움을 잘 익은 알밤과 감, 활짝 핀 코스모스가 보상해 주었다. 절의 뒤쪽 산책로 옆 밤나무 숲에서 잘 익어 떨어진 알밤을 맘껏 주웠고, 빨갛게 익어가는 감들과 대추가 가을 길손들을 반겨주었다. 산책로를 따라 피어난 코스모스는 산들바람에 한들한들 춤을 추었다. 옛날 고향마을 입구를 수놓던 키 큰 코스모스여서 더욱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했다.
따사로운 가을빛을 즐기다 점심때를 놓친 우리는 세종시로 향했다. 도중에 길가의 창 넓고 깨끗한 찻집에서 간단한 케이크과 차를 즐겼다. 직장 때문에 세종시에 사는 딸의 아파트에서 첫날의 여장을 풀었다. 주워 온 밤을 쪄서 간식도 하고, 조금 일찍 저녁 식사를 하며 추석날 밤을 맞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신도시의 시가지를 산책했고, 시원한 공원의 벤치에서 구름 사이로 고개 내민 한가위 밝은 달이 보내주는 미소도 즐겼다. 달님은 왜 멋진 미소를 우리에게 보내 주었을까? 한 잔의 맥주를 마시며 추석날 밤을 즐겼다.
◇ 논산 종학당(宗學堂)과 명재(明齋)고택
세종시의 아침은 고요했다. 옅은 구름 사이로 연휴 사흘째 아침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식구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달리고 걸었다. 널찍널찍한 공간에 잘 꾸며진 화단과 조경, 시가지를 바둑판 모양으로 나누며 뚫린 대로들이 시원하다. 아파트단지의 조경수들에도 가을빛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파평 윤씨(坡平 尹氏) 사설교육기관인 종학당(宗學堂).
빵과 과일로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하고 딸이 운전하는 차로 논산시 노성면 죽림리로 달렸다. 거기엔 파평 윤씨(坡平尹氏) 사설 교육기관인 종학당(宗學堂)이 있다. 1628년에 처음 세워진 후 1919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문 될 때까지 숱한 인재들을 길러낸 곳이다. 초학 과정인 종학당과 상급 과정인 백록당(白鹿堂), 정수루(淨水樓)로 분리돼 운영되다가, 현재는 문중의 결의에 따라 셋을 합쳐 종학원(宗學園)으로 부른다고 한다.
안내판에는 창건 후 280년 동안 문과급제 42명, 무과급제 31명 외 많은 생원 및 진사를 배출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곳에는 옛 러시아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2008년 10월 2일 방문해 심은 소나무도 자리고 있었다. 마침 이날은 딸의 생일이어서 그 나무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정수루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 널찍한 정원이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젖고 있었다. 정원 너머로는 광활한 황금벌판이 펼쳐지고 들판 가운데엔 커다란 저수지가 있어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누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풍경은 8폭 병풍에 그려진 동양화 같았다. 안동의 병산서원을 연상시키는 풍경이었다. 정수루 뒤엔 백록당(白鹿堂)이 붙어있었다. 300년 가까운 풍상을 견뎌 온 고택의 지붕과 기둥, 서까래, 추녀에는 은은한 민족의 얼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명재 고택 앞 초가집에 딸린 큰 마당에 빼곡하게 들어선 장독 항아리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종학당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거리에 명재고택이 있다. 종학당의 초대 사장(師長)을 지낸 명재 윤증(尹拯)의 사저였던 고옥이다. 당초엔 ‘口’자 형태였지만 일부는 부서지거나 중수됐다. 남도 양식이 가미된 18세기의 건축양식을 지닌 집이다. 본채의 넓은 대청과 누마루, 앞마당 가운데의 붉은 꽃을 피운 배롱나무가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특히 고택 앞 초가집에 딸린 큰 마당에 빼곡하게 들어선 장독 항아리들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아마도 전국 각지에서 부탁을 받아 맛있는 간장을 만드는가 보다. 고택 뒤 야트막한 산 위엔 전망대가 있는데 거기로 오르는 길가엔 500년 넘은 느티나무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로성(上魯城)이라고 불리는 정상의 전망대는 우거진 나무에 전망이 가려져 아쉬웠다. <2편으로 계속됩니다 >
▲명재 고택 뒤 야트막한 산 위로 오르는 길가에 500년 넘은 느티나무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