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론은 바로 내가 ‘나’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내가 ‘나'로 살지 못했다는 얘기 아닌가.
그렇지. 나는 ‘나’로 살지 못했지. 왜일까.
나는 누구누구의 딸이며, 누구누구의 아내이며, 누구누구의
며느리이며, 누구누구의 엄마인 까닭에.
그것이 필요로하는 엄격한 책임과 의무에 매어
나는 언제나 그 뜻에 따라야 하지 않았던가.
행복하냐고요?
글쎄요…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혹은 하는 말 중의 하나가 ‘행복’이란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행복하세요’, ‘행복을 빕니다’, ‘~에게 행복을…’ 등 그 ‘행복’에는 언제나 주술적 의미가 뒤 따른다. 좋은 것이기에 나에게도 남에게도 언제나 베풀고 싶은 것-.
수없이 듣고 수없이 했던 말—. 그것이 바로 아주 보편적 일상어인 행복이란 어휘가 아닌가. 대체 그 행복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흔히, 그리고 많이 쓰이는 것일까.
누군가가 나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언제나 ‘글쎄요…’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를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엇을 가리켜 ‘행복’이라고 하는지, 좀 더 부연하면 이처럼 나이를 먹고 긴긴날을 살아오는 동안도 행복에 대해 올바른 답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일상어로 많이 썼던 것을 보면 좋은 언어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행복. 그것은 내게는 그저 개념어로 느껴질 뿐이다. 실제로도 그것은 추상적 개념어가 아닌가.
그런데 왠지 최근 들어 ‘행복’에 대해 정면 승부를 한 번쯤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그 행복이 과연 무엇인지, 또 나의 행복은 어떤 것일지에 대해 이만큼 나일 먹었다면 한 번쯤은 명쾌히 답을 구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들 모두 세상에 왔다 언젠가는 떠날 것임에 그 뜻은 좀 가려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행복은 무엇일까.
지난 시절, 나는 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매우, 무척이나 어려웠다. 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은 아니다. 한때는 여러 선인의 책을 통해 알아보려 했으나 그다지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분들도 ‘~게 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얘기는 하고 있으나 행복 자체에 대해 직설적 풀이는 하고 있지 않았다.
‘~게 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이야말로 어폐가 있는 말 아닌가. 개개인의 개성이 다르듯 ‘~게 하는 것’이야말로 천차만별, 그것은 공통분모는 될지언정 행복에 대한 해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원찮은 대로 이에 대해 몰두하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나는 그 답을 찾기 시작했다. 나의 ‘행복론’이다. 왜 이전에는 그 생각을 못했을까. 행복이란 테마가 너무 일상적이며 상식적인 탓이었는가. 그렇다 해도 나의 그것은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는 똑바로 찾아놓아야 하지 않는가.
나의 행복론-. 그것은 바로 내가 ‘나’로 사는 것이다.
‘나’로 사는 것. 그렇다면 이전에는 내가 ‘나'로 살지 못했다는 얘기 아닌가. 그렇지. 나는 ‘나’로 살지 못했지. 왜일까. 나는 누구누구의 딸이며 누구누구의 아내이며 누구누구의 며느리이며 누구누구의 엄마인 까닭에 그것이 필요로하는 엄격한 책임과 의무에 매어 나는 언제나 그 뜻에 따라야 하지 않았던가.
내가 하고 싶었던 일, 좋아하는 일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들이 바라는 일,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최우선으로 하지 않았던가. 왜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언제나 똑같을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이 좋아하니까.
나의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공부 잘 하는 우등생이기를 원했고, 나의 남편은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아내, 자신을 위해 수족 같이 일해 주는 아내이기를, 나의 시모께선 무엇보다 부모 공양 잘하는 착한 며느리이기를, 나의 아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전능의 엄마이기를 바랐다.
이런 형편이니 내가 ‘나’로 사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우선은 그들이 바라는, 혹은 원하는 일이 최우선이며 나는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존재’이어야 했다.
누군들 아니겠느냐. 그들 역시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요, 누구의 자녀요, 누구의 남편이며 누구의 시부모로서 각각의 소임을 다하느라 어찌 힘겹지 아니 했겠는가.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며 사회적 관계이며 그 최초의 단위 관계인 ‘나와 너’ 그리고 ‘가족 관계’ 일 것이니 이를 벗어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최근 들어 이런 가족 관계의 확장을 피하느라 ‘결혼’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이 속속 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갖는 ‘사회적 관계’ 외의 ‘가족 관계 축소’를 원하는 까닭이 아닌가 느껴지기도 한다. 행복을 논한다고 하더라도 이런저런 것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우리들의 ‘관계’ 가운데서 논급되어야 마땅할 것 아닌가. 그러나 겹겹이 옷을 껴입고 보면 춥고 배고픔을 얼마나 바르게 느낄 것인가.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조, 기능 가운데는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다중적 구성 요소가 있어 그 모든 관계의 억압성을 기피하거나 일탈하려는 강렬한 욕망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또 그에 예속하려는 불가해한 의지 또한 혼재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모든 이들에게 <‘나’란 개체>가 되는 것이 행복의 요건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해도 행복의 궁극적 본질에 접근하려면 개체에 접근하는 방법 말고 보편적 접근을 들어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행복’이란 감정 자체가 바로 ‘나’란 개체가 갖는 주체적 감정일진대 ‘보편’,과‘객관’이 끼어들 여지란 없는 것 아닌가.
이 때문에 ‘행복’에 대한 정면 승부는 어렵기 그지없다. 개개인의 감성이 다른 만큼 행복에 대한 추구, 결론은 어느 하나로 일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나’로 사는 것에서 행복의 답을 추출한 것 역시 그 때문은 아니었을가.
행복이 무엇인가.
가장 간결한 답은 ‘불행하지 않은 것’일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로 사는 것이야말로 ‘불행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