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가을 

언론인 안훈은 TBC PD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뎠다. 동아일보 기자, DBS 라디오 방송작가, MBC 라디오 방송작가를 거쳤고, 1983년 이후에는 여성지 프리랜서 기자로 좋은 글을 많이 썼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시그나 사회공헌재단에서 취재위원으로 봉사했다.

아, 그러나 가을은 무엇보다 고독해지는 계절이다.

고독이 병처럼 깊어가는 계절이다.

그리해서 다만 혼자이며 자아를 만나는 계절,

신을 생각하며 하나의 생명에 대해 진실로 겸허하고,

하나의 섭리에 대해 숙연하며,

하나의 죽음에 대해 무상(無常)을 깨닫는 계절이다.

 

문득 열어젖힌 창밖에 가을이 내린다.

하늘이 투명하다.

우수스이 낙엽이 진다.

한 줄기 바람, 바람이 불어온다.

언뜻 불어오는 바람결에 묻어 있는 가을 냄새.

가을은 이제 우리의 창밖에 와 있다.

 

햇빛은 깊고 푸르며 한 점 티도 없이 맑다.

한여름 계곡물이 맑다 한들 이만이야 하랴.

차라리 가을 햇빛은 이리 맑아 못내 슬프다.

나는 이런 가을 햇빛 속에서 현기증이 난다.

내 초라한 육신을 가릴 옷 한 자락 남김없이 속속들이 비춰내는 저 깊고 투명한 햇빛-.

가을은 이제 깊을 대로 깊고 익을 대로 익어 있다.

  

가을은 우리 일상의 번요한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하는 계절이다.

아침, 복잡한 소음으로 빠듯이 짜인 하루가 시작되고 은행으로, 백화점으로, 어두운 사무실 구석으로, 크레졸 냄새가 풍기는 병원으로,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 속으로 부산히 찾아가는 우리들 머리 위로, 눈앞으로 편편이 병든 나뭇잎이 흩날릴 때 바쁜 걸음 멈추고 지나온 발자국을 헤며 언뜻 불어오는 바람이 실어다 주는 음악을 듣는 계절이다. 눈을 들어 먼 데 하늘을 바라보며 허공중에 나부끼는 나뭇잎의 목소리를 듣는 계절이다.

 

더러는 숨 가쁘고 더러는 고달팠던, 더러는 가파르고 더러는 절박했던, 더러는 구슬프고 더러는 애절했던 우리들 삶의 질곡, 그것을 돌아보고 그것이 속삭이는 은밀한 음성, 작은 눈짓, 고즈넉한 숨결을 귀 기울여 마음속에 듣는 그런 계절이다.

  

그래, 가을은 지금 지난날 소음과 분노로 얼룩진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땅거미가 내리고 네온등이 명멸하는 이 거리 모퉁이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외로운 이들과 스스러운 이들과 주정꾼들과 그리고 당신과 내가 입맞춤을 보내고, 악수를 나누고, 쓸쓸한 눈빛을 남기고 콧노래를 날리며, 어깨를 부비며, 고독과 슬픔을 나누며 만나고 헤어지던 우리들의 그 날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외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슬픈 사람들이 있었다. 

번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가 내리는 길목에서, 밤이 손짓하는 거리와 거리 위에서, 먼지 앉은 빌딩과 가로수 밑에서, 당신과 내가 사는 지붕과 지붕 밑에서 우리는 그렇게 있었다. 슬픔을 나누며, 기쁨을 나누며, 절망을 나누며, 고독을 나누며 우리는 그렇게 있었다.

하고 많은 욕망, 하고 많은 만용, 하고 많은 좌절을 느끼며 우리는 그렇게 있었다.

  

저무는 거리 위에 발길을 세우고 짐짓 지난날을 뒤돌아보는 계절- 가을은 안으로 깊어지는 계절이다. 한밤의 깊이만큼 제 스스로 깊어지는 계절이다.

혼신의 힘으로 영혼을 불사르는 내연(內燃)의 아픔을, 수직으로 낙하하는 잎새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면서 우리의 정념, 우리의 열망, 우리의 회한, 우리의 고독이 깊어지는 계절―. 안으로 침묵하고 안으로 사념하며 안으로 깊어지는 계절이다.

 

아, 우리는 얼마나 부질없었으며, 우리는 얼마나 근심에 차 있었으며, 우리는 얼마나 이기(利己)에 몸을 떨고 있었던가. 사랑에 인색했으며 용서에 너그럽지 않았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 

자신의 안일에 몰두했고 작은 출세에 눈이 어두웠으며 부박한 허영에 들떠 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이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다른 이의 상처를 위무(慰撫)하지 않았으며, 다른 이의 불행을 눈 여기지 않았다.

아, 우리는 얼마나 허튼 광영을 탐했음이랴. 얼마나 허튼 오만에 차 있었으며, 얼마나 허튼 부귀를 갈망했으며, 얼마나 허튼 욕망에 부대끼었음이랴.

  

가을은 뉘우침의 계절이다. 

밤새 촛불 앞에서 통한의 아픔을 삭이며 하염없이 지난날을 뉘우치는 계절이다. 우리 거처의 남루(襤褸)를 탓하지 아니하며, 우리들 이웃의 배반을 탓하지 아니하며, 사랑하는 이의 별리(別離)를 탓하지 아니하며, 다만 나의 허물을 조용히 뉘우치는 계절이다.

 

생각 없이 뱉어낸 나의 독설(毒舌)이 남의 자존심을 다치진 않았던가. 쓸데없는 나의 고집이 다른 이의 가슴을 멍들게 하진 않았던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이웃을 험하고 침 뱉진 않았던가. 자신의 치부(致富)를 위해 가난한 사람의 동전 한 닢만 한 행복을 훔치진 않았던가. 

  

아, 그러나 가을은 무엇보다 고독해지는 계절이다. 고독이 병처럼 깊어가는 계절이다.

그리해서 다만 혼자이며 자아를 만나는 계절, 신을 생각하며 하나의 생명에 대해 진실로 겸허하고, 하나의 섭리에 대해 숙연하며, 하나의 죽음에 대해 무상(無常)을 깨닫는 계절이다.

 

가을엔 혼자임을 슬퍼하지 말자. 다만 홀로 있으며 홀로 침묵하고 홀로 사색하며 홀로 깨어 있으라. 

홀로 길을 가고, 홀로 방 안에 있으며, 홀로 세상에 있으며, 홀로 표표히 떠나라. 명징(明澄) 가운데 홀로 있고, 회한 가운데 홀로 있으며, 비애 가운데 홀로 있어라. 그러므로 하여 우리의 슬픔이 진정 슬픔일 수 있으며, 기쁨이 진정 기쁨일 수 있으며, 절망이 진정 절망일 수 있으며, 고독이 진실로 고독일 수 있게 하라.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많은 속임수에 가득 차 있더냐. 우리의 감정은 얼마나 메마르고 우리의 언어는 얼마나 허구에 차 있더냐. 아아,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얼마나 가난하며 얼마나 초라하며 얼마나 조악하던가.

 

가을은 시방 나의 곁에 있다. 가을은 시방 너의 곁에 있다. 환희와 영광을 거두고 오욕과 인고를 거두고 좌절과 낙망을 거두고 오직 빛나는 산화(散華)를 위해 머물어 있다. 우리의 성숙을 위해 머물어 있다. 우리들의 눈부신 변신을 위해 머물러 있다.

 

문득 열어젖힌 창밖에 가을이 내린다. 하늘이 투명하다.

우수스으 낙엽이 진다.

한 줄기 바람,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은 지금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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