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의 가르침

필자 석인호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1974년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TBC 방송기자, 중앙일보 싱가포르 특파원,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장 등을 거쳤다. 국정홍보처 국정브리핑팀 위원과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2014년 '좋은수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낱개로 갈라진 마른 마늘쪽들은 새로운 삶을 꿈꾸는 생명체들이다.

여름부터 잠을 잔 마늘은 가을이 지나가도 깨지 않는다.

겨울이 시작되는 늦가을에 농부들은 마늘을 땅속에 심는다.

마늘은 추운 겨울에 땅속에서 얼어 죽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

껍질로 단단히 몸을 싸고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갈 때쯤이면 이번에는

속히 마른 껍질을 벗고 물을 빨아올려 싹틔울 채비를 시작한다.

 

“마늘을 까보셨습니까? 그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한쪽의 마늘에서 나는 자연의 순리를 깨우친다. 삶의 지혜도 함께 배운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생각이 이에 이르면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물론 말 못 하는 마늘이 직접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그건 단지 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마늘을 통해 자연의 순리를 깨달으며 ‘삼라만상이 모두 스승’이라던 선현들의 가르침을 새삼 되새기곤 한다.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이런저런 집안일로 바쁜 집사람이 바싹 마른 마늘 30여 통을 까달라고 갖다 놓았다. 아주 심하게 말라 마늘통들이 부딪히며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다. 내가 집사람을 위해 마늘을 한꺼번에 많이 까거나 빻아 주는 일은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이다. 그것도 마늘이 많이 필요한 김장 때나 이번처럼 한가할 때뿐이다. 다른 일엔 별로 도움을 못 주지만 마늘을 까거나, 김장용 무 배추를 씻는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으니까.

 

마늘을 깔 때마다 나는 힘들고 지겹다는 생각을 한다. 우선 굵은 통마늘을 작은 쪽들로 쪼갤 때면 겉껍질 부스러기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녀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게다가 그 껍질들에서 나오는 매운 기운 때문에 재채기가 나고 눈도 아프다. 그리고 갈라놓은 쪽 마늘의 단단한 껍질을 벗기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다.

 

그런데 쪽 마늘의 겉껍질을 벗기고 나서 속껍질을 떼는 일은 정말 까다롭다. 반투막 종이처럼 얇은 이것은 마늘에 찰싹 달라붙어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내 인내력을 시험하기에 충분하다. 별수 없이 고집 센 마늘과 힘들고도 긴 한판 승부를 벌여야만 했다. 겉껍질의 단단함과 반투막 속껍질의 완강한 접착력은 내 손가락을 힘들게 하고 손톱 밑도 아리게 했다.

 

 

같은 마늘이라도 김장철에 깔 때와 1월 하순의 늦겨울에 까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가을철 마늘 까기는 정말 힘들지만, 늦겨울엔 ‘식은 죽 먹기’다. 단단해서 잘 떨어지지 않던 통마늘이 조금만 비틀면 금방 여러 쪽으로 나누어진다. 겉껍질은 쉽게 벗겨지고 찰싹 달라붙은 얇은 속껍질도 슬쩍 문지르면 또르르 말리며 벗겨진다. 김장철 마늘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될 정도다.

 

어째서 늦겨울에는 마늘이 이처럼 쉽게 벗겨질까? 시골서 자란 나는 마늘의 성상(性狀)을 잘 안다. 추운 겨울을 땅속에서 보낸 후 봄에 싹이 나서 자라고, ‘마늘쫑’이라고 하는 꽃대가 올라와 고개 숙이면 마늘의 삶은 일단 끝난다. 그 때가 대충 여름철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농부들은 잎이 마르기 시작하는 마늘을 밭에서 뽑아 줄기는 버리고 땅속에 있던 통마늘들만 갈무리한다. 이때부터 마늘의 휴면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마늘의 삶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마늘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바로 조물주의 오묘한 섭리가 숨어 있다.

 

우리나라에선 알찬 마늘을 얻으려면 늦은 가을에 껍질을 벗기지 않은 쪽 마늘을 밭에 심어야 한다. 심은 후에는 마늘이 겨울 동안 얼지 않게 짚이나 푸성귀들을 두텁게 덧씌워 준다. 마늘은 그렇게 땅속에서 추운 겨울을 나야만 된다.

 

겨울바람이 봄바람으로 바뀔 때쯤 겨울잠을 깬 마늘의 새싹들이 솟아난다. 아직 겨울 끝자락이라 바람은 차지만 상관하지 않고 싹들은 올라온다. 농부들도 가을에 덧씌워 놓았던 짚들을 말끔히 걷어내 준다. 그래야만 신선한 봄기운과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잘 자라기 때문이다.

 

낱개로 갈라진 마른 마늘쪽들은 새로운 삶을 꿈꾸는 생명체들이다. 여름부터 잠을 잔 마늘은 가을이 지나가도 깨지 않는다. 겨울이 시작되는 늦가을에 농부들은 마늘을 땅속에 심는다. 마늘은 추운 겨울에 땅속에서 얼어 죽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 껍질로 단단히 몸을 싸고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갈 때쯤이면 이번에는 속히 마른 껍질을 벗고 물을 빨아올려 싹틔울 채비를 시작한다.

 

 

비록 땅에 심지 않은 마늘쪽들이지만 자연의 이런 섭리를 잘 안다. 그래서 늦가을 마늘껍질은 잘 안 벗겨지지만, 늦겨울엔 쉽게 벗겨진다. 마늘은 그 법칙을 절대로 어기지 않고 생명을 대대로 이어간다. 단단히 껍질을 붙들고 있다가도 때가 되면 과감히 버릴 줄을 마늘은 안다. 마늘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이나 초목들은 자연의 이 섭리를 알고 지킨다.

 

오직 사람들만 이 섭리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 같다. 한번 잡고 나면 놓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놓기는커녕 오히려 남의 것을 더 빼앗아야 직성이 풀린다, 위정자들 역시 권좌에 오르고 나면 밀어준 사람들을 우습게 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몇 통의 마늘이라도 까면서 마늘의 소리를 들어보라 하고 싶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소리를 듣게 될까?

 

아마도 마늘은 이렇게 속삭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엔 때가 있게 마련이지요. 세상일도 영원한 것은 없답니다. 적당할 때 놓을 줄도 알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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