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연습 - 아버지에의 회고②

언론인 안훈은 TBC PD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뎠다. 동아일보 기자, DBS 라디오 방송작가, MBC 라디오 방송작가를 거쳤고, 1983년 이후에는 여성지 프리랜서 기자로 좋은 글을 많이 썼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시그나 사회공헌재단에서 취재위원으로 봉사했다.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내 곁을 떠났다.

그때부터 내 안에 든 생각이 있다.

모름지기 나와 인연이 된 모든 이들이 적어도 떠난다는

기미(幾微)만이라도 느낄 수 있는 시간,

이별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은.

 

나는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을 가지 않는다.

개인 병원이든 종합병원이든 병원에 들어서면, 언제나 온갖 만감이 교차하여 몸과 마음을 어지럽혀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져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친구들 가운데는 유난히 병원 출입이 잦은 친구가 있는데, 나의 이런 병원 기피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빈축을 하는 일이 만만찮게 있다.

 

10년 전쯤인가, 내가 매우 위태로운 상태(심장 압박)였는데도 병원을 가지 않는 것에 혀를 차던 나의 친구가 그가 다니던 병원에 예약(심혈관 내과)해놓고 갑자기 나를 불러 진료를 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의 의사가 나를 보고 너무 위험하여 당장에 심혈관 시술을 해야 한다 했는데, 그날이 금요일 오후 병원이 끝날 무렵이어서 월요일 오전 입원해 시술 일정을 잡아 스텐트 시술을 한 일이 있다.

 

그때 한꺼번에 3개를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X-ray 사진을 보더니 4개를 했다고 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나는 얼결에 심혈관 시술을 한 셈이다. 그 친구가 나를 병원에 끌어들인 이유는 바로 그 며칠 전 미팅에서 내가 병원을 싫어하고 안 가려고 하는 이유를 얘기한 적이 있었다. 친구는 그것을 유념해 듣고 내가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다는 것을 의문한 까닭이라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친구는 그날부터 내 생명의 은인으로 불렸다.

 

병원을 기피하는 이유 가운데는 내 아버지에 대한 '비견하는 마음'도 한몫을 하고 있다.

아버지 시대에 비하면 현대 의술은 엄청나게 발전했다. 갈수록 첨단 의료기기를 이용해 환자의 모든 장기를 들여다볼 수 있고, 그 데이터를 기초로 해서 진료하는 오늘날의 의술이 훨씬 높은 평가를 받겠지만, 기계화된 오늘날의 의료 방식이 환자를 다분히 몰모트처럼 취급, 의사들의 지극히 기계적인, 비인간적 대면 관계에 이유 없는 저항감이 느껴져 병원 출입이 싫어진 것 아닌가 생각된다.

 

아버지의 시대의 의사들은 많은 임상 경험이 바탕이 되어 병인(病因)을 찾아내고 치료의 목적을 이루는, 인간적 교감이 선행되고 의술은 인술이라는 본래적 실천을 중히 여기는, 그런 시대였다. 아버지는 그런 중에도 환자 본인이 어디가 고장났는지를 이해시키는 데에도 주력한 분이었다,

 

철저한 의사였던 이런 아버지가 단 한 번 외도를 한 일이 있었다.

이천 도립병원장 시절 만난 신익희(자유당 시절 민주당 당수로 대통령 선거운동 중 서거) 씨와의 인연이 각별하여, 6․25 한국 동란을 겪은 직후인 9․28 수복 후 국회의 후생과장으로 잠시 몸 담으셨던 일이 있었다.

 

1․4 후퇴 당시 국회의 모든 기물을 부산으로 후송한는 책임을 맡으셨던 아버지가 마지막 잡동사니 한 차의 불발로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아버지는 다시 본연의 의사(당시 온양 국립병원장)로 돌아오셨다.

 

서울로 수복한 후, 신익희 씨의 끈질긴 정치 참여의 권유를 완강히 사절하셨다. 그분은 아버지를 ‘안동지’라 호칭했는데 '함께 정치를 하자'고 하여 그가 당수이던 시절 아침 새벽 일찍 말을 타고 아버지(당시 우리 집은 돈암동 대로변에 자택)를 찾아오셨는데, 말을 내려 아버지와 함께 신흥사까지 걸어 올라가시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었다. '나는 의사다. 의사는 사람을 고치는 일만 한다'는 것이 당시 그분의 청을 사절한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아버지의 짧은 이 외도로 당시 아버지는 정치인의 실태에 대한 많은 경험을 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아버지가 우려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다.

고3 시절 E여대 전국 여고생 문학 콩쿨이 있었다. 2회째다. 1회 때 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10여 명의 학생을 호명, 수필을 써 오라 해서 써내었더니 제목이 ‘평행선’이었던 그 수필이 입상(가작)한 일이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2, 2학기에 나는 특활 수물(수학/물리)반에서 갑자기 문예반으로 불려가 문예반장을 맡게 되었다.

 

고3 시절, 그것도 2학기 들어서 소설을 써내라는 지도교사의 권유로 소설을 써냈더니(아버지의 눈을 소재로 한 소설, 제목이 ‘눈’이었음), 이번에는 농촌소설을 다시 한 편 써오라는 주문이 있어 ‘바윗골’이라는 소설을 써서 냈다. 그런데 이 2편을 모두 문학콩쿨에 내겠다 해서 하나는 내 옛이름 영자(玲子)로 해서 제출했는데 이것들이 모두 입상(2등과 3등)되었다.

 

부상으로 ‘큰사전’과 ‘국문학전사’를 받았다. 이것을 보시고 아버지가 어머니와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아버지는 내가 문학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아주 평이한 ‘행복한 여성’이기를 바란다는 원론적 얘기를 깊이 있게 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문학은 곧 고난의 길임을 우려하시는 걱정이었다. 그랬던 아버지도 결국 내가 대학 시험에 실패하자 여의대 입학을 주선하신 것 아닌가.

 

아버지를 회고하는 데 있어 나는 더 많은 것들을 얘기 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겨우 대학 2학년, 아버지의 나이 고작 50에 떠나셨다. 내가 아버지와 공유하며 누렸어야 할 수많은 시간은 바로 그때로부터 ‘시작’이었어야 할 무렵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꼭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두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주셨다. 그 하나는 국립병원에 계실 때,환자로 들어온 열여덟 살의 언니를 집에 데려와 키우게 한 일이었다. 전란 중이었고 언니의 집이 철원이어서 돌아갈 곳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계모, 동생들(계모의 소생)만 있는데 철원은 이미 북(北)의 수중에 있어 고아가 된 언니였다. 그 언니를 4, 5년여 데리고 있다가 배필을 찾아 시집을 보내셨다.

 

다른 하나는 아는 분의 부탁으로 진도에서 중학을 중퇴하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취직을 하겠다는 어린 학생을 거처를 마련하여 공부하게 하신 일이다. 그 아이를 결국 정규 고교를 보내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이 아이는 고생고생하면서도 대학 진학을 하여 출중한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사춘기에 들어설 나이에 빗나갈 수도 있었는데 아버지의 손 내밈(助力)이 그들 인생을 바로 서게 한 것이다. 이들은 아버지를 잊지 못해 했고, 우리 가족과는 오랜 연(緣)을 맺고 지내는 이들이 되었다.

 

어찌 이뿐이랴. 그 바쁘신 와중에 겨우 고교를 졸업한 딸을 ‘여성’ 교육을 한다고 호텔 양식당에 데려가 식사 예법을 가르치시고, 어른과 마주했을 때 말하는 예법을 자상하게 일러주시던 분. 음악김상실(르네쌍스)을 갔다 오느라 귀가 시간이 늦었던 것을 혼내시느라 몸소 그곳을 가보시겠다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내 곁을 떠난 것이다. 이를 어찌 납득하겠는가.

그때부터 내 안에 든 생각이 있다. 모름지기 나와 인연이 된 모든 이들이 적어도 떠난다는 기미(幾微)만이라도 느낄 수 있는 시간, 이별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은.

 

나는 아직도 약제실에 반듯하게 누워 계시던 아버지의 그 따뜻한 가슴과 마지막 체온을 잊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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