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내 딸의 결혼식 때 나는 친구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그는 그날 식장에서 반갑게 인사하며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그후 두어 차례 안부 전화가 오갔고, 다른 사람의 길흉사 자리에서 만나곤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의 길흉사엔 성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일일이 부고를 하기가 어려운 흉사와는 달리 결혼식은 꼭 청첩장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청첩장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 그날이 언제인데?” “다음 주일이니 열흘 남았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일종의 서운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에게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중요한 일에 초대할 대상도 안 되는 ‘그저 그렇고 그럴 뿐인 사람’이었단 말인가? 갑자기 오래전 젊었던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그 스쳐 가는 일들 속에 나는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 그때의 나와 오늘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은근히 화가 치민다.
며칠 전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남자들끼리의 모임이었으니 당연히 술잔들이 오갔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날 정말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아들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친구의 아들은 마흔이 넘은 노총각이었다. 더군다나 친구에게는 이 혼사가 개혼이기에 더욱 기쁨이 컸을 것이다. 정말 달려가 마음껏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다른 사람에게는 청첩장을 보냈는데 나에겐 안 보냈다. 그 사이 내가 이사를 한 적도 없다. 또 주소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내 연락처를 그 친구는 알고 있다. 통상 결혼식 청첩장은 한 달 이상 여유를 두고 보내는 것을 감안하면 분명히 나에겐 보내지 않은 것이다.
혈기왕성했던 30대 시절에 나는 그 친구를 만났다. 다른 회사에서 근무하다 경력사원으로 스카우트 된 그가 어느 날 나와 같은 부서에 발령받아 왔었다. 당시 우리 부서에는 한두 살 차이의 젊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젊음은 포용력과 친화력이 강하다고 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는 곧 우리들과 친하게 아울렸다. 군사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랬던 그 시절 정의감에 불타 부조리에 항거했던 젊은이들이어서 더욱 잘 어울렸을 것 같았다.
업무가 끝나면 우리들은 어깨를 걸고 술집들을 돌아다니며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권력의 부조리를 규탄하느라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엔 ‘너와 나’가 없었고 오직 ‘젊은 우리들’만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더욱 의기투합해 서로 간의 거리는 허물어지게 되었다. 모두가 그렇게 정답고 즐겁게 어울려 지냈다. 우리는 서로를 가족처럼 속속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며 지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사이좋게 지냈던 그와 나는 맡은 일이 달라지면서 다른 부서로 흩어졌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내가 그 회사를 떠나면서 더 소원해졌다. 그러나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결혼식장이나 상가 등에서 만났고 인편으로 듣고 물어 서로의 안부 정도는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 사이 나는 어머님과 장모님을 여의었고 딸을 결혼시켰다. 그중 먼저 치른 어머님 장례 때는 같은 회사에 있을 때여서 친구가 조문을 왔었다. 퇴직 후 치른 장모님 장례 때는 그에게 부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5년 전 딸의 결혼식 때 나는 친구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그는 그날 식장에서 반갑게 인사하며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그후 두어 차례 안부 전화가 오갔고, 다른 사람의 길흉사 자리에서 만나곤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의 길흉사엔 성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일일이 부고를 하기가 어려운 흉사와는 달리 결혼식은 꼭 청첩장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청첩장을 보내주지 않았다.
예부터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했다. 비록 시대가 변했고 풍속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 말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변한 시대와 달라진 풍속에 걸맞는 예의범절이 새로 생기게 마련이니까. 나는 딸을 결혼시키면서 이 말이 가진 깊은 뜻을 실감했다. 어떻게 우리 집 혼사를 친구나 지인들에게 전해야 할지를 두고 참 많이 고민했었다. 물론 축의금이나 축하 화환을 안 받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청첩장을 보낼 대상자 선정 때문에 고민에 빠졌었다.
나는 자녀 혼사와 관련한 온갖 유형의 사람들을 보아왔다. 당연히 축하할 일들이지만 잘 못 된 처신 때문에 입방아에 오르는 혼주들을 많이 보았다. 소식이나 연락 없이 지내다 불쑥 나타나 청첩장 돌리거나,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 사람이 청첩장을 보내 온 경우 등이다.
그야말로 ‘넘쳐도 탈, 모자라도 탈’이란 이야기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명문화된 규례나 관습이 없으니 청첩장 수신인 선정은 그야말로 혼주마음에 달렸다. 나 역시 내 맘대로 판단했었다. 물론 당사자들의 반응이 어땠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 만 꼭 알려야 할 사람들이었기에 보냈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 친구의 혼사가 끝난 후 소식을 알려준 사람한테서 혼주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코로나19 등 여러 어려움 때문에 간소하게 치르려고 적게 청첩장을 보냈단다. 그에 대해서야 나도 할 말은 없다. 다만 적게 보낸 그 청첩장 수신인들 속에 나는 없었다. 아무리 길사이지만 초대받지 않은 자리이니 갈 수가 없었다.
‘친구야, 아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러나 조금은 섭섭하구나. 그대에게 나는 초대대상이 안 되는 존재이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