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첩장

필자 석인호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1974년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TBC 방송기자, 중앙일보 싱가포르 특파원,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장 등을 거쳤다. 국정홍보처 국정브리핑팀 위원과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2014년 '좋은수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5년 전 내 딸의 결혼식 때 나는 친구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그는 그날 식장에서 반갑게 인사하며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그후 두어 차례 안부 전화가 오갔고, 다른 사람의 길흉사 자리에서 만나곤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의 길흉사엔 성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일일이 부고를 하기가 어려운 흉사와는 달리

결혼식은 꼭 청첩장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청첩장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 그날이 언제인데?”

“다음 주일이니 열흘 남았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일종의 서운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에게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중요한 일에 초대할 대상도 안 되는 ‘그저 그렇고 그럴 뿐인 사람’이었단 말인가? 갑자기 오래전 젊었던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그 스쳐 가는 일들 속에 나는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 그때의 나와 오늘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은근히 화가 치민다.

 

며칠 전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남자들끼리의 모임이었으니 당연히 술잔들이 오갔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날 정말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아들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친구의 아들은 마흔이 넘은 노총각이었다. 더군다나 친구에게는 이 혼사가 개혼이기에 더욱 기쁨이 컸을 것이다. 정말 달려가 마음껏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다른 사람에게는 청첩장을 보냈는데 나에겐 안 보냈다. 그 사이 내가 이사를 한 적도 없다. 또 주소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내 연락처를 그 친구는 알고 있다. 통상 결혼식 청첩장은 한 달 이상 여유를 두고 보내는 것을 감안하면 분명히 나에겐 보내지 않은 것이다.

 

혈기왕성했던 30대 시절에 나는 그 친구를 만났다. 다른 회사에서 근무하다 경력사원으로 스카우트 된 그가 어느 날 나와 같은 부서에 발령받아 왔었다. 당시 우리 부서에는 한두 살 차이의 젊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젊음은 포용력과 친화력이 강하다고 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는 곧 우리들과 친하게 아울렸다. 군사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랬던 그 시절 정의감에 불타 부조리에 항거했던 젊은이들이어서 더욱 잘 어울렸을 것 같았다.

 

업무가 끝나면 우리들은 어깨를 걸고 술집들을 돌아다니며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권력의 부조리를 규탄하느라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엔 ‘너와 나’가 없었고 오직 ‘젊은 우리들’만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더욱 의기투합해 서로 간의 거리는 허물어지게 되었다. 모두가 그렇게 정답고 즐겁게 어울려 지냈다. 우리는 서로를 가족처럼 속속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며 지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사이좋게 지냈던 그와 나는 맡은 일이 달라지면서 다른 부서로 흩어졌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내가 그 회사를 떠나면서 더 소원해졌다. 그러나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결혼식장이나 상가 등에서 만났고 인편으로 듣고 물어 서로의 안부 정도는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 사이 나는 어머님과 장모님을 여의었고 딸을 결혼시켰다. 그중 먼저 치른 어머님 장례 때는 같은 회사에 있을 때여서 친구가 조문을 왔었다. 퇴직 후 치른 장모님 장례 때는 그에게 부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5년 전 딸의 결혼식 때 나는 친구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그는 그날 식장에서 반갑게 인사하며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그후 두어 차례 안부 전화가 오갔고, 다른 사람의 길흉사 자리에서 만나곤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의 길흉사엔 성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일일이 부고를 하기가 어려운 흉사와는 달리 결혼식은 꼭 청첩장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청첩장을 보내주지 않았다.

 

예부터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했다. 비록 시대가 변했고 풍속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 말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변한 시대와 달라진 풍속에 걸맞는 예의범절이 새로 생기게 마련이니까. 나는 딸을 결혼시키면서 이 말이 가진 깊은 뜻을 실감했다. 어떻게 우리 집 혼사를 친구나 지인들에게 전해야 할지를 두고 참 많이 고민했었다. 물론 축의금이나 축하 화환을 안 받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청첩장을 보낼 대상자 선정 때문에 고민에 빠졌었다.

 

나는 자녀 혼사와 관련한 온갖 유형의 사람들을 보아왔다. 당연히 축하할 일들이지만 잘 못 된 처신 때문에 입방아에 오르는 혼주들을 많이 보았다. 소식이나 연락 없이 지내다 불쑥 나타나 청첩장 돌리거나,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 사람이 청첩장을 보내 온 경우 등이다. 

 

그야말로 ‘넘쳐도 탈, 모자라도 탈’이란 이야기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명문화된 규례나 관습이 없으니 청첩장 수신인 선정은 그야말로 혼주마음에 달렸다. 나 역시 내 맘대로 판단했었다. 물론 당사자들의 반응이 어땠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 만 꼭 알려야 할 사람들이었기에 보냈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 친구의 혼사가 끝난 후 소식을 알려준 사람한테서 혼주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코로나19 등 여러 어려움 때문에 간소하게 치르려고 적게 청첩장을 보냈단다. 그에 대해서야 나도 할 말은 없다. 다만 적게 보낸 그 청첩장 수신인들 속에 나는 없었다. 아무리 길사이지만 초대받지 않은 자리이니 갈 수가 없었다.

 

‘친구야, 아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러나 조금은 섭섭하구나. 그대에게 나는 초대대상이 안 되는 존재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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