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연습 ― 아버지를 회고하며 ①

언론인 안훈은 TBC PD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뎠다. 동아일보 기자, DBS 라디오 방송작가, MBC 라디오 방송작가를 거쳤고, 1983년 이후에는 여성지 프리랜서 기자로 좋은 글을 많이 썼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시그나 사회공헌재단에서 취재위원으로 봉사했다.

아버지의 서거(逝去)로 내가 받은 충격은

무슨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때의 일기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막힌다.

어찌해서 그다음 날도 해가 뜨는지,

어찌해서 세상이 그대로 존재하는지,

납득할 수 없기에 내 가슴은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아버지의 급서(急逝) 비보를 접한 것은 대학 2학년을 막 올라와서였다. 3교시 수업을 하던 중 학생과로 연락이 왔는데 급히 달려가 전화를 받았더니, 사환 학생(아버지가 고교 공부를 시키던)이 울먹이면서 아버지의 부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아서 벌컥 장난하지 말라고 화를 냈더니 그 아이가 엉엉 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아침에, 나의 등교와 거의 같은 시간에 아버지는 병원(당시는 아버지 병원이 종로5가에 있었음)으로 가셨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병원에는 간호사도 있었고 급할 때 쓰는 구급약도 있었는데 이것이 말이 되는가. 내가 알기로는 아드레날린(당시 일반 병원에는 주어지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의사협회 총무였기 때문에 우리 병원에는 이 약이 구비되어 있었고, 이것으로 죽어가는 위급환자 등을 살린 예를 보았음)을 쓸 수도 있었고, 바로 길 건너편에는 아버지의 후배 이문호 내과도 있지 않은가. 전화 한 통이면 달려올 터인데 이것이 말이 되는가.

 

그때의 참극(慘劇)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병리 시험실 의사가 환자의 병리시험 검사를 허위로 작성, 불필요한 처방을 한 것이 노정(露呈)된 것에 격노하신 것이 순간적 심장 마비를 일으켰다는 설명이었는데, 강심제도 쓸 수 있었건만 속수무책이라니 그것이 말이 되는가.

 

아버지의 서거(逝去)로 내가 받은 충격은 무슨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때의 일기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막힌다. 어찌해서 그다음 날도 해가 뜨는지, 어찌해서 세상이 그대로 존재하는지, 납득할 수 없기에 내 가슴은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아버지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셨다.

한순간에 표표히, 손 한번 잡아주지 않고, 말씀 한마디 없이 내 곁을 떠나셨다. 거리에 서면 아버지 비슷한 풍채의 사람을 보고 쫓아가서 확인하고 실망하기를 수없이 거듭하면서도 번번이 그 버릇을 몇 년이나 고치지 못했다.

 

내과 의사로 죽음 직전에 놓인 환자를 수없이 살렸건만 정작 당신은 손 한번 쓰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말이 되는가.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병리실 의사의 부정 진료 건을 환자에게서 듣고 화를 내시던 중, 심장 압박이 있는 것을 보고 간호사가 강심제를 주사하자고 여쭈었더니, 나이 든 사람이 강심제를 맞으면 나중에 얼굴이 푸릇푸릇해진다고 거절하셨다는 것이다.

 

내과 의사이지만 아버지는 관립병원, 그리고 국립병원장으로 계실 때 급한 외과 수술도 마다하지 않고 하셨다. 개인병원을 하시면서 의문을 품는 환자에겐 책을 갖다 펴놓고 설명하실 정도로 열정이셨던 분-.

 

의사라는 직업에 만족하지 않았으나 위급해서 찾아온 환자에 대해서는 열 일 제치고 반드시 살려내셨다. 까닭에, 집과 병원이 함께했던 때는 2층 방 하나는 항상 입원실로 내주었다(대부분 돈이 없어서 때를 놓치고 위급해진 경우가 아닌가 싶다). 또 병을 고친 후엔 병원비에 연연하지 않으셨던 듯하다. 수납부에 얘기해서 돌려보내면 두고두고 농사지은 작물들을 고맙다고 가져오곤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버지의 정신과 성향은 자유스러움에 있지 않았나 싶다. 젊어서는 개인병원을 하면서도 한때는 말(아버지는 당신의 말을 갖고 있었다)을 타시고, 한때는 그림을 그리시는데 열중하셨던 것을 보면 아버지는 자유스러움에 천착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 의사가 되겠다 하면 도시락 싸 들고 만류하시겠다는 말씀을 거침없이 하시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것은 의사란 직업이 개인의 사생활 보장이 어렵고 언제나 아픈 사람을 대하다 보면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다는 점에서 우러나온 역설이 아닌가 싶다.

 

이런 아버지가 내가 S국립대를 실패했을 때 서슴지 않고 당시 여의대였던 S여의대(이것이 훗날 우석대, 현재의 고대 의대로 바뀌었다) 입학을 권유(당시 학장이 김영택씨였는데 아버지와는 제일고보, 서울의대 선배였던 까닭에), 서류전형 입학을 부탁하셨겠는가. 이를 무산시키느라 나는 담임선생을 동원하고 어머니까지 합세해서 없었던 일로 마무리하느라 애를 먹었었다.

 

그런 아버지와의 마지막 기억은 돌아가시기 1년 전 부산 해운대를 갔던 일이다. 5월이나 6월쯤이었는지 기억은 흐린데,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동행해서 해운대를 찾았다. 당시 대한의사협회 총회가 부산에서 있었던 듯한데, 아버지는 의사협회의 총무로서 중구난방의 회의를 리더십으로 이끌며 선배를 회장에 선임시킨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그 총회의 흐름을 예견하셨던 듯 재미없다고 하며 두 딸을 데려가셨다. 당시는 해운대에 호텔이라고는 철도 호텔 하나뿐이어서 그곳에서 총회를 했다. 아버지와 함께 우리는 그곳에 머물었는데, 그때의 해운대는 지금처럼 해안의 모래톱이 깎여 나가지 않아서 끝없이 넓게 모래톱이 펼쳐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2박 3일 동안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놀아주시느라 틈틈이 모래톱을 찾으셨다.

 

그렇게 일찍 가시려 했던 탓인가.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됐는데, 당신이 멀리 모래톱에서 노는 두 딸을 보면서 ‘앞으로 저 어린 것들이 험한 세상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막힌다’라는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아버지와의 이 홀연한 단절은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모든 사고(思考), 모든 의식(意識), 그리고 모든 생활이 걷잡을 수 없이 달라져 갔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이 나름으로 굴러가고 있는 것, 그리고 점점 사람들에게서, 혹은 가족에게서도 잊혀가고 있는 것이 나는 안타깝고 안타까웠다.

 

간간이 명동 같은 데를 기웃거리던 때는 아버지와 함께 어깨를 비비며 걷고 싶은 충동에 목말랐고, 좋은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아버지와 함께였다면…’이라는 마음만 더욱 간절했다.

 

오, 아버지, 아버지-. 그리운 아버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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