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지우며

필자 석인호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1974년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TBC 방송기자, 중앙일보 싱가포르 특파원,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장 등을 거쳤다. 국정홍보처 국정브리핑팀 위원과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2014년 '좋은수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아무리 물리적 무게나 부피가 없다고 하지만

스마트 폰의 사이버 공간에 저장할 수 있는 디지털 데이터 양은 한계가 있다.

마구 찍어 둔 사진들이 쌓이다 보니 그 한계에 육박하고 말았다.

뒷날 좋은 추억거리가 되리라 여기며 지우지 않고 남겨둔 탓이다.

 

 

차곡차곡 쌓으며 지내왔다. 뒷날 언젠가 아주 귀하게 쓰일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아니 멋진 추억까지도 고스란히 상기시켜주리란 믿음 때문이라 해야겠다. 또 어느 때는 필요한 것을 끄집어내 멋지게 사용하리라 생각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하나하나 모우고 저장한 지 어언 5년이 가까워졌다. 열심히 노력한 덕에 좁은 공간에 참 많이도 쌓아두었다. 그렇게 많이 쌓였을 줄 정말 몰랐다. 그런데 그 분량을 알고 나니 이를 어쩌지 하는 부담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버리지 못하는 것도 마음의 병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건 아니다. 오래된 것들은 버리면서 살아야 된다는 선험자(先驗者)의 충고를 들어서도 아니다. 비우지 않으면 새것을 들여놓을 수가 없겠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처음엔 귀하게 생각됐던 것들도 차츰 뒷 구석에다 쌓아두게 되고 새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오래된 것들을 제때 치우기엔 아까운 마음에 쌓아두다 보니 오늘 같은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후회스럽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용기를 내어 과감히 정리할 수밖에.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쌓아두었기에 그럴까 하고 궁금해질 것이다. 내가 쌓아 둔 것은 사진들이다. 이 말에 사람들은 더욱더 궁금해 할 것 같다.

“어떤 형태로? 얼마나 큰 사이즈 이길래? 분량은? 어디에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을 정리하려고 하는가?” 등등.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리라 믿는다.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마다 그 궁금증은 다양한 연상(聯想)들로 머릿속을 채우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궁금증이나 연상들은 다 부질없다. 내가 버릴 그 수많은 사진은 무게나 부피, 형태가 없기 때문에 외형적 저장 공간도 없고 외부적으로는 보이지도 않는다. 세상에 그런 사진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겠지만 분명히 나는 그것들을 보관하고 있다. 다만 물리적 형태가 없어 보관에 필요한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지 않을 뿐이다. 이쯤 되면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그 많은 사진들은 내 작은 스마트 폰에 저장되어 있다.

 

내가 스마트 폰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가 2012년 1월이다. 스마트 폰에 장착된 카메라는 나의 수준에서 보면 아주 편리하고 우수한 사진기다. 이전까지는 필름 카메라나 소형 디지털카메라로 겨우 기념사진 정도만 찍었다. 또 사진 찍을 일이 있을 때만 그런 카메라로 대충 구도만 잡아 찍는 수준이었으니 평소에는 찍을 수도 없었고 찍지도 않았다. 그러나 매일 가지고 다니는 전화기에 성능 좋은 카메라가 달려있으니 자연히 사진을 그때 그때마다 손쉽게 많이 찍게 되었다. 정말 천지개벽에 가까운 변화였다. 밥 먹다가도 찍고, 관광지에서도 찍고, 등산 중에도 찍고, 각종 모임에서도 찍어댔다. 그렇게 찍은 각종 사진을 대부분 그대로 스마트 폰에 저장해 두다 보니 분량이 실로 엄청나게 많아지고 말았다.

 

아무리 물리적 무게나 부피가 없다고 하지만 스마트 폰의 사이버 공간에 저장할 수 있는 디지털 데이터 양은 한계가 있다. 마구 찍어 둔 사진들이 쌓이다 보니 그 한계에 육박하고 말았다. 뒷날 좋은 추억거리가 되리라 여기며 지우지 않고 남겨둔 탓이다. 물론 내 나름대로는 맘에 안 들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진들을 제때 제때 정리했지만 그렇게 많이 쌓였다. 찍은 순간이나 당일에는 모두 지우기 아깝고 예쁜 사진들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결코 들춰보지 않는 것이 사진첩 속의 사진인 것처럼 핸드폰 속의 시진들도 그랬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결코 다시 찾아보지 않을 사진들로 내 스마트 폰의 저장 공간은 이제 숨차하고 있었다.

 

그래서 작심하고 지우기 시작했다. 처음 지우기 시작할 때 확인하니 무려 4,400여 장이 보관돼 있었다.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 최근 것부터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전화기의 카메라 사진은 최근 것부터 역순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오래된 것부터 하려면 힘들고 불편하다. 또 어떤 내용의 화면인지 확인하려면 일일이 확대해서 봐야 한다. 그 때문에 마구 지울 수도 없다. 내용을 확인한 후 지우고 다음 사진도 또 그런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두 시간쯤 쉬지 않고 해도 겨우 1,000여 장만 지울 수 있었다. 물론 어떤 사진을 볼 때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느라 속도가 늦어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찍어서 보관만 했지, 결코 다시 찾아보지 않을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날 이후 틈틈이 지우고 있지만 그사이 새로 찍은 사진들이 추가되는 바람에 아직도 내 핸드폰 속의 사진은 2,100매쯤 된다. 나는 이 사진들을 계속 지워나갈 계획이다. 그리하여 올해 연말까지는 대폭 정리해서 정말 기념할만하고 남겨두고 싶은 것들만 보관할 생각이다. 지우고 비워야만 새로운 것들이 들어올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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