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싶다. 나를 생각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세상에는 현명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지혜롭고 영명(英明)하여 우러르게 되는 많은 이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으니 모두의 나의 발언은 자칫 어폐가 있는 얘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그 말을 바꾸고 싶지 않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갑자기 암이나 회복 불능의 치명적 병에 걸린 이들이 “왜 나냐”고 비탄의 원망을 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그 말이 다소는 공소하게 느껴졌다. “왜 나”라니, 그런 상황에 처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그 ‘누구도…’ 일 수 있으니 그 말처럼 싱거운 표현이 어디 있는가. (물론 그 정황이 극단의 심사를 드러내려 함인 것을 모르진 않지만)
얼마 전 나는 왼쪽 다리가 갑자기 아파서 보행이 어려웠다. 정말 갑자기여서 그 어느 것도 인정할 수 없었다. 가까운 친구 몇 사람이 퇴행성관절염 같다고 했지만 내 스스로는 퇴행성관절염은 뭘…? 그냥 이러다 낫겠지…, 하면서 두 달 가까이를 흘려보냈다.
그런데 웬걸? 별스럽지 않게 소염진통제를 먹으면서 두 달을 버티어도 좀체 나을 기미가 안보여 병원을 찾고 치료를 시작했다. 그런데도 시원스레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암담한 심정으로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전조 증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컴퓨터를 쓸 때 입식이 싫어서 나는 한때 거금을 주고 산 고가구 교자상을 거실 한 켠에 놓고 그 옆에 컴퓨터, 모니터를 올려놓고 쓰는데, 그 얼마 전부터 구부린 다리가 심상찮게 조금씩 아팠다.
그런 것을 몇 번 그냥 지나친 일이 있었다. 그것이 지난 연말과 신년 무렵이었는데 다리의 발병이 1월 12일이었으니 전조 징후는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설령 그것을 알아챘다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겠나). 이제는 고장 날 때가 되어서 고장 난 것이라 생각한다
20대 때, 그러니까 대학을 갓 나와 창간하는 여성지 기자(기자로 말하면 신문사가 정통인데 모교 교사 임명이 거론되고, 지연되는 바람에 신문사 응시 때를 놓치었다. 7월 며칠인가 창간 기자 모집에 응시, 7명 선발 중 수석 입사로 첫발을 떼었을 때 나는 안경이 쓰고 싶어서 시력이 1,2 임에도 안경을 맞추어 썼다. 검은색 뿔테로 된 꽤 괜찮은 로이드 안경이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눈이 나쁘지 않아 안경을 쓸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내게는 안경을 쓴 친구들이 꽤 멋스럽게 보였다. '때가 되면 나도 안경을 쓰리라' 했던 것을 실천에 옮긴 것인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더러는 잔 모로 같다고 했고 더러는 미아 패로 같다고도 했는데, 어린 마음에 그것은 모두 안경 때문일 것이며 그런 이들이 미모에 중점을 둔 배우가 아닌 개성파였기 때문에 그다지 듣기 싫지 않아 신바람을 날리며 태평로를 누비었다. (회사 사옥이 태평로에 있었다). 그러나 안경을 쓴 것은 잠시 그 시절뿐, 직장을 KBS로 옮기면서 안경 쓰는 일은 슬그머니 없어졌다.
40대 초, 공부를 다시 하고 싶어 대학원 시험(전공, 영어, 대학 성적)을 거쳐 모교 대학원에 입학을 한 일이 있었다. 전공과 선택 등 4~5개 텍스트를 중점으로 후배들과 섞이어 지도 교수와 연구 중심 과정을 공부하는 동안 나는 시력 감퇴로 많은 책을 보는데 상당한 애로를 겪었다.
한 가지 주제를 갖고도 그에 관련된 논문을 적어도 대여섯 편 이상은 살피어야 하고, 그리고 자기가 주창하는 논지는 새로워야 하며, 그것을 개진하는데도 상당한 근거제시가 있어야 하므로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는 것이 대학원 공부 과정이다.
대학원 과정이라면 대학을 마치었을 때 몇몇 교수로부터 강력한 요청을 받았으나 무급 조교를 하면서 하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널리스트가 되겠다고 뿌리쳤던 일이 있다. 그랬는데 여성동아에서 일할 때 동료 기자(그는 집안 사정으로 10년 걸쳐 학부 졸업 후 대학원 과정 중에 있었음)가 나의 경력을 알고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사람이 대학원 이수를 안 한 것이 말이 되냐고 일침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저런 동기가 대학원 공부를 결심케 했던 것이다.
노안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교수나 다른 학생들이 눈치챌까 싶어 그것을 감추느라고 그때 막 시작된 다초점렌즈 안경(독일 렌즈)을 68만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맞춰 쓰면서 애를 썼지만, 결국 한 학기를 끝으로 대학원 수업은 접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눈 때문이다. 그 당시는 취업이 쉽지 않은 학부 출신 후배들이 대학원 진학을 대거 하던 때이어서 그 속에 섞이어 뒤늦게 공부하는 내 모습이 싫었던 탓도 있었다.
당시는 안경 밑부분에 돋보기를 넣으면 돋보기 표시 나는 것이 싫어서 다초점 렌즈의 안경을 맞춰 쓰곤 했는데, 혹은 더 이전에는 안경 쓴 것이 멋있게 보여 도수 없는 안경을 겉멋으로 쓰기까지 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내가 컴퓨터를 쓰거나 책을 보거나 하는 모든 곳에 돋보기를 놓아둔다. 주방 일을 하는 것 말고는 화장실에까지, 읽어야 하는 것이 있는 모든 곳에 돋보기를 놓아둔다.
여성지를 할 때 화보나 기타 편집에서 캡션을 달 때마다 편집에서 멋지게 보이려고 작은 활자(4호나 5호 정도)를, 그것도 아미(흐리게 조화시키려고)를 써서 달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이 얼마나 무모한 만용인지를 깨닫는다.
모든 상품에 곁들여 있는 설명서를 볼 때마다 4호, 5호도 안 되는 잔글씨로 설명을 붙이고 있어 그것을 해득하려면 돋보기를 쓰고도 다시 큰 돋보기를 갖다 대어야 겨우 읽을 수 있으니 이것은 보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짜증스러운 때가 적잖다. 특히 약제 설명이야말로 잔글씨가 2호, 3호 정도 크기가 투성이인데 이는 배제되고 지양되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얼마 전 참으로 우연찮게 김승태 씨가 쓴 글 백내장 수술 후기 ‘세상이 온통 환하게 보여요’를 읽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고도 근시에 고도 난시, 시력이 0.1이 되지 않는 그런 눈으로 50여 년을 살아야 했던 그 고통스러움을 눈이 나쁘지 않은 이들이 어찌 알 것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 계단을 가차 없이 똑똑 구두 소리를 내면서 내려가던 발걸음—, 아니 구두굽은 최소 3.5cm 이상은 되어야 모양이 나지…, 하던 내가 어느 날 슬그머니 신발장 속에 있는 높은 굽 신발 30여 켤레를 의류함 속에 갖다 넣었다. 관절이 아프고 보니까 그 예쁜 높은 굽 구두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나의 어리석음을 탄하려 한다면 끝이 없다.
세월이 흐르면 나이를 먹고, 나 또한 70도 80도 된다는 것을 몰랐었다. 자녀가 둘, 그들이 모두 늦은 결혼을 했으므로 ‘할머니’란 호칭이 다소간 유예되었을망정 결국은 ‘할머니’였음에도 그것이 너무 생경하여 나의 호칭 같지 않던 감성, ‘늙음’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던 나의 지난 시절, 그 모든 것들이 순리에 순응하는 이들보다 얼마나 힘겨웠던가.
사람마다 개개의 개성이 다르니 세상사를 받아들이는 감성 역시 제마다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나는 남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극히 상식적인 순리조차도 순응이 쉽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쉽게 하는 것은 나에게는 늘 어렵고 힘든 것이었다. 지금, 그것을 깨달아 가면서 매우 괴롭다.
왜 몰랐을까. 그땐—.
나도 나일 먹고, 할머니도 되고, 몸의 여기저기가 고장이 나고 아프고,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또 그리해서 슬프고 처연해지고 외로워진다는 걸….
아 어리석고 어리석을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