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communication)

 

'소통(communicat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Communus'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Communsus'는 함께하다는 뜻을 가진 'com'과 짐을 지다라는 뜻을 가진 'Munus'가 합해진 단어이다. 직역하면 '같이 짐을 진다'라는 뜻이 될 것이다. 

 

의미의 전달에서 바라보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같은 짐을 지듯이 같은 의미를 공유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소통을 중계하는 매체가 다양해졌고, 소통하는 방식도 다양해졌다.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것은 지도자, 그 중에서도 정치적 지도자의 소통에 관해서이다.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일 대 多'의 소통을 많이 하게 된다. 이를 위해 다양한 장치들과 경로들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라든지, '불통' 이라든지 하는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평을 듣는 정치지도자들은 왜 그럴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서 발견한 것이 '소통(communication)'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원래의 뜻 '같이 짐을 진다'이었다. 이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표현이 "대통령의 1시간은 5000만 시간의 가치가 있다"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 대 多'의 소통에서 가장 부족하기 쉬운 측면은 '일'쪽에서 '다'쪽으로 가는 소통이 아니다. 당연히 '다'에서 '일'쪽으로 올라오는 소통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귀가 2개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쪽의 사람은 자신의 주위 사람에게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소통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게 되면 올라오는 소통은 '일 대 다'가 아니라 '소 대 다'가 되었다. 이제 그 '일'은 상당히 편하게 '다'쪽의 소리를 들을 경로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소'쪽에서 본의이든 아니든 정보의 왜곡이 일어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다. 

 

이제 그는 '일 대 다'에서 '일 대 소 대 다'라는 좀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소통(communication)의 의미인 '같이 짐을 지는 것'으로 돌아가보자. 어찌되었건 처음에 말한 '일 대 다'에서는 '일'이 '다'의 짐을 같이 지고, 역시 '다'도 '일'의 짐을 같이 지는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중간에 '소'가 끼게 되었을 때, 과연 그 '소'는 '다'쪽의 짐을 더 지려할까? 아니면 '일'쪽의 짐을 더 지려할까? 이상적인 건 '소'가 '다'쪽의 짐을 더 지려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소'는 자신들이 모시는 '일'쪽의 짐을 더 지고 싶어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당연한 것이고, 인지상정인 것이다.

 

여기에서 '소통의 오류' 또는 '정보의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충성스러운 '소'를 가진 '일'에게는 그 '소'의 충성이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이 또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소통의 오류' 또는 '정보의 왜곡'을 바탕으로 특정한 정책을 결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일'의 자리에서 소통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소'이외에도 자신의 '짐'을 같이 지는 경로, 즉 소통의 경로를 더 마련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이 정보의 왜곡들이 쌓여 '실패'를 겪게 될 가능성이 줄게 될 것이다.

 

[ 포천좋은신문 문석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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