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천은 문향(文鄕)과 경승(景勝)의 고장이다. 포천향교와 용연·화산·옥병서원은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곳이며, 영평팔경(永平八景)은 수도권의 경승을 대표하는 곳이다. 또한, 포천은 고려말부터 조선시대 고위층 관료들이 은거하며 학문과 후학 양성을 도모했던 지역이다. 독곡 성석린, 백사 이항복, 사암 박순, 용주 조경 등은 그 대표적인 포천의 역사 인물이다.
윤세징(尹世徵:1595~1631)은 백사 이항복의 사위로 잘 알려져 있으며, 군내면 용정마을에 입향한 인물로 '파평 윤 씨 판서공(휘 세징) 파 종중'의 파조(派祖)로 추숭되고 있다.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용정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큰아들인 윤이익(尹以益)은 나주목사를 지냈고, 둘째 아들인 윤이제(尹以濟)는 어영대장, 한성부 판윤, 네 번의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내며 숙종의 총애를 받은 포천이 낳은 대표적인 조선 중기 고위 관료로 종중에서 가장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이다. 파평 윤 씨 판서공(휘 세징, 이하 '판서공'이라 한다)의 후손들이 4백여 년 간 포천에 세거해 오고 있음에도, 그동안 포천 향토사가들조차 윤세징 일가의 묘비와 석인상에 별반 주목한 바 없다.
지난 5일 판서공 종중 임원진의 안내로 용정마을 묘역(용정리 192-1)을 답사한 홍순석 강남대 명예교수는 윤세징 일가의 묘역이 이제까지 포천시의 향토사에 기록된 바 없음을 아쉬워했다. 특히 홍 교수는 1998년도에 포천문화원의 위촉 사업으로 김희찬 교수(경희대박물관장)와 함께 『포천금석문대관』을 출간한 바 있는데, 그 당시 판서공 종중 일가의 금석문 자료를 누락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자책하였다.
그리고 포천시의 급변하는 도시화 과정에서 지금이라도 판서공 일가의 묘역을 보존하기 위한 학술 조사 사업과 보존 대책이 시급해졌다고 우려를 밝혔다. 이에 판서공파 후손들도 보존 대책에 발 벗고 나섰다. 금년도 상반기에 홍 교수가 이끄는 조사단에 의뢰해서 본격적인 학술 조사를 할 예정이다.
홍 교수에 의하면, 김희찬 교수를 비롯해 경기도박물관과 포천시박물관의 연구진도 참여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할 예정이다. 홍 교수는 1992년도 창옥병 암각문 학술 조사를 비롯해 30여 년간 포천의 역사 인물과 금석문을 발굴해 온 포천학 전공자이기도 하다. 조만간에 포천시 관련 조사자료를 정리해서 포천시박물관에 기증할 예정이라고 한다.

홍 교수에 의하면, 군내면 용정마을 파평 윤 씨 판서공 일가의 묘역과 거의 흡사한 사례가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양당마을에 있다. 경주 손 씨 양민공 손소(孫昭) 일가의 묘역인데, 손소 부부의 묘비의 경우 조선초 사림파를 대표하는 김종직이 글을 지었고 손중돈(孫仲墩)이 글을 썼다. 손중돈 부부의 묘비는 당대의 학자인 이언적이 글을 짓고, 관료층 문인이자 명필인 이관징(李觀徵)이 글씨를 썼다. 손경의 묘비도 이관징이 썼다. 또한 묘소 좌우의 석인상도 특이한 양식으로 보존 가치가 있어 손소 부부와 아들 손중돈 부부 묘비, 손경의 묘비와 함께 석인상이 2006년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포항시의 경주 손 씨 묘비는 포천시의 판서공 윤세징의 묘비와 여러 면에서 흡사하다. 묘비의 형태가 이수(螭首)와 비신(碑身)이 일체형이다. 일반적인 묘비의 경우 개석이 없거나 기와지붕 형태이며, 비신과 분리되어 있다. 비문의 글씨를 당시의 명필인 이관징이 썼다는 사실도 일치한다.

포천시의 윤세징 묘비에는 「前禮曹判書李觀徵撰幷書」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관징이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도 썼다는 것이다. 이관징이 비문 글씨를 남긴 자료도 흔치 않은데, 글을 짓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은 그만큼 더 높게 평가될 수 있다는 소지이다.
윤세징의 묘역에는 묘비 외에 동자석, 석인상, 상석, 망주석 등 석조물도 모두 구비되어 있어서 조선 중기의 묘제(墓制) 자료로서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6월 중에 실시할 중간평가회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이 같은 문화유산이 주목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음은 포천시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포천시 관계부서와 함께 학술조사 사업이 큰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한다.